## 308화
머리가 어지럽다.
곡이 안 될 것 같다는 말은 스타니슬라프와 곡들을 협의하면서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이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말 자체가 충격이기보단, 지금 앞에 서 있는 두 사람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피메노프와 에르네스트.
저 두 사람이 언제 이 연습실에 들어왔는지도, 애초에 왜 같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르카디 교수님이야 모스크바 음악원 소속이시니 일요일에도 여기에 있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왜?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이유는 분명했다.
촉망받는 연주자인 그가 9학년을 앞두고 방학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와 만날 이유가 딱히 무엇이 있겠는가?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방금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과 그것에 대해 평가한 스타니슬라프였지만, 자꾸만 아르카디 교수님과 에르네스트 쪽으로 시선이 간다. 자꾸만 입을 열고 묻고 싶어졌다.
콘탁이 있었던 건가요? 실력을 봤나요? 데려가실 건가요?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막 입 밖으로 나오려는 목소리와, 그것을 가로막는 생각이 상충하면서, 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날 보더니 크리스티나가 돌연 쌍심지를 켜며 스타니슬라프를 쏘아보았다. 매서운 시선에 스타니슬라프가 의문을 표했다.
“뭐지? 크리스티나.”
“그냥 넘어가실 일이 아닌데요. 스타니슬라프.”
크리스티나는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날 위해서 대신 나서 주고 있었다.
“우리가 요청해서 타티아나가 곡을 보여 주었잖아요. 그렇다면 거기에 맞는 말을 해 주어야죠. 다짜고짜 안 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문제가 있다면 문제를 말해 주세요.”
“문제가 있지.”
“대체 타티아나의 어디에 문제가 있는데요?”
“무슨 소리지?”
그런데 스타니슬라프는 크리스티나를 상대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무뚝뚝하게 툭 내뱉는 말이 크리스티나의 신경을 더 거슬렀는지 그녀가 다시 무어라 쏘아붙이려는 찰나, 스타니슬라프가 묵직하게 말했다.
“왜 갑자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크리스티나. 이전까지 했던 이야기와 똑같네. 우리 오케스트라의 규모의 문제일세.”
“아…….”
크리스티나는 그제야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라흐마니노프나 브람스의 협주곡을 내가 할 수 있다고 해도 오케스트라가 부족하다며 후보에서 제쳐 놓았던 이유와 똑같았다. 차이코프스키 역시 2관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하는 곡인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모든 것을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다시 물었다.
“잠깐만요, 그러면 왜 시켜 봤어요?”
“차이코프스키는 피아노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일세. 경쾌하고 화려한 해석이라면 우리 오케스트라로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봤지.”
오케스트라의 규모가 작다고 하여 대편성을 필요로 하는 곡들은 절대 연주하지 못하란 법은 없었다. 편곡을 하여 피아노 한 대로도 연주할 수 있는 것처럼, 지휘자의 판단하에 악기를 재편성하거나 가필을 하는 식으로 얼마든지 연주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악보에서 음표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일반 기악 연주자에 비해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연주하는 지휘자에겐 조금 더 많은 자유가 주어져 있었다.
물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고 지휘자의 판단으로 연주된 곡이 얼마만큼의 완성도를 가지는지에 대해선 철저하게 지휘자의 책임이 된다.
스타니슬라프는 지휘자의 자유와 책임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피아노 연주자인 내 해석에 따라서 1관 오케스트라로도 합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때문에 먼저 들려 달라고 요청했고, 대답이 나왔다.
스타니슬라프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 보니 안 될 것 같네만.”
지휘자로서의 결론에 크리스티나가 조용히 동의를 표했다.
“……그렇죠.”
“그렇다면 다른 곡을 찾아봐야지.”
담담하게 말하는 스타니슬라프를 보며 난 살짝 혼란스럽기도 했다. 결국 칭찬이긴 한 것 같은데 감사하다고 답인사를 하기가 애매했다.
무뚝뚝한 사람인가 싶으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음악에 대해 깐깐한 사람인가 싶으면 융통성도 꽤나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모든 면에서 미진한 나로선 스타니슬라프라는 지휘자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믿고 따라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화를 내 주었던 크리스티나가 스타니슬라프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스타니슬라프. 제가 실수했네요.”
“괜찮네. 그건 그렇고.”
스타니슬라프는 대수롭지 않게 사과를 받더니, 옆을 바라보며 물었다.
“용무라도 있소?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난 스타니슬라프의 음악관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시 잊을 수 있었던 두 사람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에르네스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서 있었고 아르카디 교수님은 좋은 체격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웃고 있었다.
“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이 이어지고, 아르카디 교수님이 유쾌하게 말했다.
“무슨 용무가 있겠습니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챔버 오케스트라와, 우리 부속 중앙음악학교의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리허설 중이라기에 인사차 온 것이죠.”
“…….”
“아직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을 때가 잊히지 않는군요. 자, 반가워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다시 뵙는군요.”
그러고는 척척 걸어와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미리 인사를 했어야 하는데, 너무 당혹스러워서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난 황급히 그 손을 받아 악수하며 뒤늦게나마 인사했다.
“아……. 반갑습니다. 아르카디 교수님.”
“정말 훌륭한 연주였어요. 아주 감명 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짧게 잘했다는 칭찬은 답하기 쉬워서 좋았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고, 아르카디 교수님은 다시 에르네스트에게 돌아가서 친구와 인사하지 않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더니 내 쪽으로 손을 흔들흔들했다. 딱히 격식을 차려 악수를 하거나 하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스타니슬라프가 그런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물었다.
“거기 친구는?”
“에르네스트 말입니까?”
아르카디 교수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에르네스트야말로 오늘 저와 진지한 용무가 있어서.”
“흠.”
스타니슬라프는 말 안 해도 알겠다는 듯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나 역시 스타니슬라프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가라앉았던 궁금증과 불안감이 다시 찾아온다.
회의에 집중해야 할지 이 잡념에 집중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은데, 아르카디 교수님은 아예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야기도 끝났겠다, 좋은 피아노도 들었겠다. 연주회 기획 중이시라면 잠깐 도와 드릴까요? 외부인이긴 하지만 교수인 제 의견은 꽤나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귀 오케스트라와 과거 협연 경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겠군.”
“자, 자 그러면 회의 다시 시작해 봅시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이자 동시에 명망 있는 음악가이기도 한 아르카디 교수님이 친절을 베풀겠다는데 거절할 만한 명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을 포함한 채, 회의가 다시 재개되었다.
***
그 후 30분 정도 짧게 진행된 회의는 굉장히 효율적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스타니슬라프의 특징은 이미 잘 알고 있고, 협연자인 내 특징도 콩쿠르 심사위원으로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제3자의 관점에서 나오는 통찰력과 방향성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어디 그냥 제3자의 음악가인가. 아르카디 교수님은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십여 년을 넘게 재직 중인 분인 만큼 굉장히 넓고 깊은 경험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간 회의로 통해 추려졌던 후보곡들은 아르카디 교수님의 의견과 조언으로 조금 더 합리적으로 정리되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아르카디 교수님은 아예 이참에 연주회 프로그램을 결정해 버리고 다음부턴 리허설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고 싶어 하시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스타니슬라프가 막았다.
이렇게 오케스트라와 협연자가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스트를 만들어서 몇 번쯤 각자 연습하고 고찰하는 시간도 중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아르카디 교수님은 약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조언자 입장이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조금 다른 이유로 회의를 그만하고 싶었기 때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로, 모든 것이 결정되기 전에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연주회이기 때문에 내가 관계자들과 알아서 할 일이기도 하지만, 내 연주회이기 때문에 두 분께 아무 조언도 받지 않고 결정해서 진행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지금은 내가 철저하게 이성적인 상태에서 이 회의에 집중하여 프로그램을 결정할 자신이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아르카디 교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본 직후로 난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아무리 안간힘을 써 봐도, 계속 머릿속에 불안감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사실 불안해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는데도, 웃을 수가 없다. 복잡한 감정들이 마구 얽히면서 머리를 어지럽힌다.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지.”
그렇게 교수와 지휘자 사이에서 제대로 내 의견 피력은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나는 상태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묻는 말들에 진지하게 대답은 했던 것 같은데, 이래서야 음악가 실격이다. 울고 싶다.
“좋아요. 좋아.”
아르카디 교수님은 오늘 바로 프로그램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데엔 조금 불안을 표하긴 하셨지만 그래도 더 과하게 말하진 않고 스타니슬라프를 존중했다.
난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자각이 있었기에 죄송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말도 잘 안 나왔다. 그래도 감사를 표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르카디 교수님.”
“하하하핫, 저야말로 좋은 시간이었어요. 타티아나의 연주회가 정말 기대되는군요.”
아르카디 교수님은 껄껄 웃었다.
난 순간적으로 지금 내 연주회가 아니라, 묻고 싶은 것을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에르네스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진지한 용무가 있었다고 하셨는데 그게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은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확인한다 한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아르카디 교수님이 말했다.
“그나저나 타티아나. 생각은 조금 해 봤습니까?”
“생각……이요?”
“우리 음악원에 오지 않겠냐는 제안 말입니다.”
순간 당황했다.
에르네스트의 생각만 하느라 미처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아르카디 교수님이 보시기엔 나 역시 데려가고 싶은 학생인 것이다.
“…….”
아르카디 교수님은 내게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걸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에르네스트를 보니 약간 갈등이 인다.
주저하고 있자 아르카디 교수님이 은근하게 말해 왔다.
“이거 참……. 물론 우리 음악원의 부속학교이니 중앙음악학교도 학생들을 참 잘 가르치긴 합니다만, 전 조금이라도 빨리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 같은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고 싶어서 말이죠.”
“…….”
“곤란해하는군요. 음, 미안하지만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어때요? 언젠가 올 곳이고, 다른 학생들은 너무나 오고 싶어 하는 곳이고, 그에 비해 언제라도 쓸 수 있는 티켓을 쥐고 있다고 말이죠.”
“그건…….”
“농담하는 게 아니니 진지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분이 정말로 날 원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세계 최고의 음악원에서 최고의 교수인 자신이 책임을 지고 가르치고 싶다는 의지가 전해져 온다.
그건 정말 어마어마한 유혹이었다. 세상 어느 연주자가 달가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
난 여전히 머뭇거린다.
언제나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려면 받아들여야 했다. 이 기회를 붙잡아 음악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은 연주자로서 내게 굉장한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 자괴감, 어리광 등이 날 결박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옥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르카디 교수님은 침묵하고 있는 날 내려다보시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으셨다. 이분이 내게 잘해 주시려고 노력하시고 인내 중이시라는 것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난 얼마나 이기적이고 약한가. 부끄럽다.
교수님이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오늘 즐거웠습니다. 타티아나.”
“예……. 아르카디 교수님.”
“또 보죠.”
또 보자는 말은 강하게 와닿았다.
힘 있게 나와 악수를 마친 아르카디 교수님은 곧이어 다른 사람들과도 작별 인사를 하고는 에르네스트를 마지막으로 악수하고 연습실에서 떠났다.
스타니슬라프도 작별 인사를 건네 왔다.
“다음 일정은 베르너와 상의하도록 하지. 흠, 그사이 오늘까지 나온 곡들은 한 번쯤 생각해 오게. 지도 선생과 상의도 해 보고.”
“아……. 예. 감사합니다.”
스타니슬라프가 오늘 회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기로 한 데엔 나에 대한 배려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정말 무뚝뚝하지만 얼마나 속이 깊은지 모르겠다.
크리스티나도 웃으며 말했다.
“빨리 같이 리허설하고 싶어.”
“예. 저도요 크리스티나.”
“다음에 봐 그러면.”
다른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나와 악수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모두가 떠나고 연습실 안엔 나와 루슬란 오빠, 에르네스트만이 남았다.
루슬란 오빠는 내가 에르네스트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두겠다는 듯 멀찌감치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난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에르네스트.”
“응.”
회의 내내 얼마나 묻고 싶은 게 많았는지 그는 알까.
에르네스트가 아르카디 교수님과 같이 있는 것을 보자마자 갑자기 짓쳐든 현실감과 불안.
움직이지 않고 버티고 있는 한 적어도 몇 년은 지속되리라 믿었던 관계가 다른 곳에서부터 갈라져 나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중에 회피하고 있었던 내게, 난데없이 들이닥친 현실은 자꾸만 이기적인 생각만 불러일으켰다.
친구이자 동료 음악가로서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불합리한 생각이 많이 들었고,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지.
가슴이 답답하다. 그대로 말하면 이상한 말이 쏟아질 것 같아서 모든 것들을 잠시 미뤄 놓고 일단 반갑게 인사부터 했다.
“잘 있었나요?”
“이제 와서?”
에르네스트는 만난 지 30분이나 되어서야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우스운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모스크바를 지키고 있었지. 너야말로 여행은 어땠는데?”
“좋았어요.”
“재미있었나 보네. 난 맨날 그냥 그래서 뭐…….”
맨날 그런 게 뭔지 난 잘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알 것 같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님과의 콘탁이라면 방학 내내 해도 모자를 일이었으므로.
못 참겠다.
신중하게 단어들을 골랐다.
“있잖아요,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뭔데?”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진학하실 건가요?”
이 단순한 문장을 묻기가, 정말이지 어려웠다.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뻔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혹시나, 지금까지 있어 주었으니까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정말 미미한 기대감이 자아낸 문장은 서투르고 조야하게만 들렸다.
별로 상관없다는 듯 웃으면서 쿨하게 물어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바보같이 표정 관리도 못 하는 내게, 에르네스트는 바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넌 어때?”
“예?”
“타티아나 너도 조기 입학 제안받았던 것 아니야? 저번에 분명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전에 에르네스트를 두고 구세프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았을 때, 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었다.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받긴 했어요.”
“그래서? 넌?”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
에르네스트는 입을 다물고 날 바라보았다.
우리 둘 사이에서, 서로를 떠보는 듯한 무언의 기 싸움이 오갔다.
먼저 말하긴 껄끄러웠다.
거절했다고 말한다면 이유가 나와야 할 텐데, 내가 막 적응한 학교와 선생님, 친구들과 1년 만에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어른스럽지 못하고 응석이나 다름없는 이유는 솔직하게 말하기 정말 어려웠다. 아나스타샤에겐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었지만, 에르네스트를 상대로는 어쩐지 힘들다.
무엇보다, 내가 솔직하게 털어놓더라도 그가 날 전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대답은 없다. 하지만 가겠다고 말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 달 후인 9월이면 에르네스트는 중앙음악학교에 없을 수도 있다.
그렇게 그가 진학한다면 웃으며 축하해 주진 못할망정 섭섭해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구제불능인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느낀다. 정말 이기적이고 불쾌하다. 고등교육기관으로 가야 하는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이 따위라는 것에,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급기야 내 머리는 제멋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고 그에게 같이 학교에 있으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는 상상을 했다.
그 대답으로 에르네스트는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같이 모스크바 음악원에 가자고.
이 상황에 놓인 단 하나의 해결책처럼 들린다. 연주자로서 그와 내가 가야 할 길처럼 보인다.
오늘 내가 아르카디 교수님에게 입학 제의를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하고 진지하게 갈등했던 것은, 에르네스트가 간다면 나도 갈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한다면 선생님들은 축하해 주실 것이다. 선생님들은 나 같은 학생들을 몇 번이고 졸업시켜 보셨을 테니까. 게다가 몇 해 빠른 조기 입학이라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리처드와는 대결을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남았고 한승우는 아직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데. 류보비의 반주도 해 주고 싶고 아나톨리에게 줘야 할 것도 있는데. 발렌티나와 해야 할 이야기도 많고,
아나스타샤는?
“…….”
한참 동안이나 무거운 정적이 있었고,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르네스트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