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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327화 (327/1,277)

##  327화

슬픔과 무력감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들이 순식간에 수백 가지는 떠올랐다가 사라져 간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제한되어 있다. 그 제한을 무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현실적이어야 했다.

복도를 걷는 구두 소리. 내 머리는 냉정하고 침착해져 간다.

난 제일 먼저 학교에서 막아야 할 상황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게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한시라도 빨리 부딪쳐 볼 뿐이다.

말없이 따라오는 리처드는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내가 무엇을 하든 옆에 있어 주겠다는 것 같다.

교무실 문을 노크하기 직전까지 난 고민하고, 갈등하고, 각오를 다지면서 허리를 똑바로 폈다.

문을 두드리고, 살짝 열자 가장 근처에 있던 선생님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누구……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류드밀라 선생님.”

류드밀라 선생님은 개학식이 끝나자마자 교무실을 찾은 나와 리처드를 보고도 친절하게 맞이해 주셨다. 행정적으로 볼일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무슨 일이니?”

“예브게니아 선생님께 여쭐 것이 있어서요. 자리에 계신가요?”

“저쪽이란다.”

“감사합니다.”

난 감사를 표하고 예브게니아 선생님의 자리로 향했다.

자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홍차를 드시는 노년의 여선생님이 보인다.

희끗한 머리와 동그란 안경. 세월의 품격이 묻어 나오는 듯한 인자한 얼굴. 중앙음악학교 기악과 선생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성을 지니신 예브게니아 니콜라예브나 말로바 선생님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찻잔을 내려놓고 우릴 돌아본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맺힌다.

“이게 누군가요. 타티아나, 오랜만이군요.”

“안녕하세요, 에브게니아 선생님.”

“리처드도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직접적으로 수업을 듣거나 레슨을 받아 보진 않았지만, 나는 두 번의 실기시험으로 예브게니아 선생님과 이래저래 인연이 있다.

선생님이 평범한 안부를 물어 오셨다.

“여름 방학은 잘 보냈나요?”

“저희는 잘 보냈어요. 제 친구 한 명을 제하면 말이에요.”

“음.”

약간 버릇없는 말이었다는 건 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만큼 난 머리가 복잡하고 여유가 없었다.

냉정해져야 했다.

일단 사과부터 드리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갑자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찾아온 이유는 알겠군요.”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한승우의 지도 선생님이었다. 평소 찾을 일이 없는 우리가 찾아온 게 그의 일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아시는 듯했다.

선생님은 아예 의자를 돌려 우리 쪽을 향하시고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친구들이 이렇게 찾아오기도 하고……. 한 군이 참 생활을 잘 했단 생각이 드는군요. 아, 그렇지 않아도 두 분이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었단 건 알고 있답니다. 지도 선생으로서 고마워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짧고 대답은 빨랐다.

“앞으로도 그 애는 잘 할 수 있을 테고, 저희가 도와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겠지요.”

오랜 연륜으로 다져진 여유와 담담한 뒤로 약간의 곤란함이 스쳐 지나간다. 지도 선생님이 아무것도 모르실 리 없었다.

난 그냥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예브게니아 선생님. 혹시 한승우에게서 자퇴 의사가 오거나 하지 않았나요?”

“뭐?”

질문을 받은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아니라 옆에 있던 리처드가 놀란 목소리를 냈다. 갑자기 내 입에서 나온 자퇴라는 말에 당황한 것 같다.

그는 생각도 못 했을지도 모르지만, 잠깐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순서였다.

난 한승우의 부모님을 만나 본 적이 없지만, 한승우를 한국의 중학교에 수속을 밟게 하면서 여기 러시아에 학적을 남겨 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학적이란 같은 나라에서처럼 연동되어 자동으로 옮겨 가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퇴를 하고 유학을 오거나, 또 자퇴를 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리고 한승우가 직접 자퇴를 하고 돌아가진 않았으니, 방학 사이 무언가 행동이 있었을 것이라고, 난 예상했다.

“왔지요.”

“어떻게요?”

“전화와 메일로요.”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천천히 이야기해 주셨다.

“한 군 본인에게서 온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통역을 통해 전화가 왔지요. 하지만 그런 식으론 자퇴가 불가능하다고 전했고, 그다음은 이메일로 정식 요청이 왔군요. 한 군의 부모님이 보냈죠.”

“…….”

어쩜 예상에서 이렇게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는지.

하지만 거기에 대해 기뻐할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난 조금 더 침착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EMS를 통해 자퇴서 양식을 보내고, 그걸 받아 자필로 작성 후 다시 보내오면 수리하게 될 거예요. 해외라면…… 열흘쯤 걸리겠군요.”

“우편이 이미 보내졌나요?”

“아뇨. 아직이죠.”

“…….”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리처드에게 이야기를 듣자마자 급히 교무실에 온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혹시 한승우의 자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거기에 대한 처리가 어떻게 진행될지, 그걸 막거나 보류할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서 확인하고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난 우리 학교의 행정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하고,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모른다.

그래도 무엇이라도 좋으니 러시아에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이 자리에 왔다.

난 차분히 물었다.

“선생님, 그…… 양식 보내실 건가요.”

“요청을 받은 이상 안 보낼 순 없답니다.”

사무적인 목소리.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신지 모르겠다.

그저 학생 한 명이 자퇴할 참이고, 그걸 받아들이면 끝이라고 생각하시는 걸까. 정말 그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무작정 자퇴를 받아 주지 않는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았다. 감정적으로 여기에 있는 나와 달리 학교 행정이란 그렇게만 되는 게 아니었다.

어차피 유학생 한 명. 없어진다 한들 학교에 어떤 거대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거대한 문제나 다름없다.

친구라는 미명하에 뭐든 다 할 수 있진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최소한 내가 학교에서 가능한 일은 해 보고 싶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렇다면 우편을 보내는 시간을 조금 늦출 순 없을까요.”

“뭘 하려는 거죠? 타티아나.”

“…….”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조금 냉담하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날 안다. 심지어 내가 편입학 시험장에서 사고를 쳤던 것부터 봐 오신 분이었다. 때문에 지금도 내가 어떤 사고를 치진 않을지, 의심하고 걱정스러워하시는 것이 보였다.

그땐 선생님의 재량으로 잘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당당하고 싶었는데, 약간은 맥이 풀렸다. 지금도 내가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있는 걸까?

하지만, 만약에 한승우가 부모님을 설득하고 돌아올 수 있게 되었는데 이미 자퇴서가 수리되어서 이곳에 있을 자리가 없게 된다면 얼마나 절망적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최소한 그런 일은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이후 잘되리란 자신은 없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도 미미하게 남은 희망으로 입을 연다.

“모르겠어요. 그래도 돌아올지도 모르잖아요……?”

“돌아온다라…….”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날 올려다보시다가, 말씀하신다.

“타티아나. 한 군은 한국인이고 여긴 러시아죠. 돌아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간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건……!”

“적어도 한 군의 한국인 부모님들은 그렇게 주장한답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생님.”

“맞아요. 전 학교 선생이죠. 그리고 여러분은 친구 학생이고요.”

선생님의 말은 여전히 담담하지만, 짙은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한승우를 직접 한국에서 콘탁하여 스카우트까지 하신 분이었다. 그 재능과 장래성을 보고 키워 보고자 하신 것이다.

그런 분이 애써 데려온 제자를 1년 만에 놓아주게 생겼는데 담담하게 있으실 수 있을 리가 없다.

냉담한 표정 뒤로 무력감이 드러난다.

열다섯 살 학생인 우리뿐만 아니라, 예순이 넘으신 예브게니아 선생님도 지금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부모님의 격렬한 반대란 그만큼이나 강력한 벽이었다.

“…….”

무슨 말인지 잘 안다. 충분히 이해했고,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그건 반대 중인 부모님이 아니었다. 바로 한승우 본인이다.

“한승우는 돌아오고 싶어 하고 있을 거예요.”

“…….”

“선생님도 전화를 해 보시지 않았나요? 그 애가 이제 오기 싫다고 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한승우는 엄청난 반대를 당하면서도 피아노 하나를 배우러 명함 한 장 들고 혈혈단신으로 러시아에 날아왔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배움에 대한 갈망이 높은 친구다.

그런 그를 위해 이쪽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돌아오고 싶어 한다면, 이 학교를 돌아올 장소라고 생각해 준다면.

돌아올 자리는 지키고 있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안경을 고쳐 쓰고는 찻잔을 들었다.

천천히 목을 축이던 선생님은 돌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타티아나.”

“……예.”

“정말 못 말리겠군요.”

처음 편입 시험장에서 내가 그 미친 짓을 했을 때 날 보시던 눈빛과 비슷했다. 걱정스러우면서도 흐뭇해하시는 듯한 표정.

선생님이 찻잔을 내려놓으시며 물어 오셨다.

“학교 행정에 관한 일이 그렇게 늦추거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타티아나.”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아요. 선생님.”

“무리한 부탁이라고요?”

“…….”

학부모로부터 자퇴를 요청받았는데 그걸 친구인 내가 늦춰 달라고 말하는 건 당연히 무리한 부탁이다. 행정이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시더니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업무용 서류들이 몇 장이나 있었다.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그중에서 가장 위에 있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난 그 서류 가장 위에 적힌 제목을 똑똑히 보았다. 자퇴원이었다.

이제 저 서류를 우편으로 한국에 보내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한승우의 자퇴가 진행될 것이다.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는데,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심드렁하게 종이를 한 번 흔들었다.

“별로 그렇지도 않은데 말이죠.”

“?”

그러고는 그대로 스르륵 일어나시더니 우리를 지나쳐 가시고는, 벽 쪽에 있는 세절기에 서류를 그대로 넣어 버렸다.

세절기는 종이를 인식하고 몇 초도 안 되는 사이 빨아들여 갈아 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쉽군요.”

“…….”

빈 종이일 뿐이지만 선생님의 이 행동이 보여 주는 의미는 확실했다. 당장 한국으로 우편을 보낼 일은 없을 것이다.

선생님은 후후 웃으며 말씀했다.

“어머나……. 나 좀 봐. 학부모께서 긴급히 요청한 서류를 폐기해도 되는 종이인 줄 알고 저도 모르게 파기해 버렸네요. 이거 참 나이가 들다 보니 노망기가 있는지…….”

“……선생님.”

“전 컴퓨터를 쓸 줄 모르니 다른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다시 뽑아야겠네요. 어디 보자……. 학기 초라 모두들 바쁘실 테니 부탁드리기도 미안하고…… 얼마나 걸리려나 모르겠네.”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중얼거리시면서 다시 걸어와 의자에 앉으셨다.

난 내가 굳이 이렇게 부탁하지 않았어도, 예브게니아 선생님이라면 끝까지 시간을 지연시키셨을 것이라 확신했다.

괜한 일을 한 기분은 아니다. 예브게니아 선생님은 혼자서도 이렇게 제자를 지켜 내려 하셨겠지만, 지금은 나와 리처드에게 고맙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계셨기 때문이다.

“타티아나. 리처드.”

선생님은 사뭇 진지하게 우릴 불렀다.

“어려운 상황이에요. 전 이런 경우를 꽤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잘 알아요.”

“……예.”

“그래도 고맙군요.”

오랫동안 이 학교에 계시면서 끝까지 졸업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 학생들을 몇 명이나 봐 오셨을지, 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선생님은 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우리에게 무리한 말씀을 하시진 않는다.

다만 작은 부탁은 있었다.

“홀로 외롭게 싸우고 있을 한 군에게 전화를 걸어 주세요.”

“……예.”

나와 리처드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곤 교무실에서 빠져나왔다.

“…….”

교무실 밖으로 나와서 우린 서로 누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학교 밖 교정으로 나왔다.

9월의 찬바람이 불면서 낙엽들을 쓸어간다.

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깨달으면서 복잡한 머리 위로 우울함이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타티아나.”

“예. 리처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었네.”

리처드가 말했다.

그래도 단기적으론 예브게니아 선생님이 자퇴를 막아 주실 것 같다는 점에 리처드는 약간 안도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난 우울하게 뇌까렸다.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그렇긴 하지만.”

한승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국 무단결석이 쌓이게 될 테니 자퇴든 제적이든 별 차이 없게 될 것이다. 아무 의미 없다.

결국 그가 한국에서 어떻게 될지가 중요했다.

“한승우는 지금도 싸우고 있을까요.”

“그럴걸.”

“부모님과 그런 식으로 대립하는 건 굉장히 힘들 거예요.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뛰쳐나가고 싶어질 정도로.”

“……나도 알아.”

리처드도 말했다. 내가 한승우의 상황을 잘 이해하는 것처럼, 리처드 역시 영국에서 상당한 반대를 받고서 러시아에 온 유학생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인정을 받고 방학이면 영국에 왔다 갔다 하고 있긴 하지만, 꽤나 좋은 집안의 아들이면서도 유학생활 내내 궁핍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제대로 된 지원을 하나도 못 받는 건 분명했다.

성적을 확 끌어 올려서 보다 좋은 성과를 보이면 좋으련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리처드는 그것도 거부하고 있다.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어쨌든, 리처드의 상황처럼만 일이 되어도 좋겠다.

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될까요.”

“나도 모르지. 넌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어?”

“그야…… 같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면 좋겠죠.”

“한국을 버리고?”

“……아뇨.”

리처드의 말에 난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강압적인 부모님과 연을 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피아노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 나갔을 때,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난 익히 아는 바가 있었다.

큰 문제는 없다. 이러나저러나 다 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 새겨지게 된다. 그것을 단순히 후회라 부르는 것은 너무 가볍게 부르는 것이다. 그건, 그보다 훨씬 깊고 어두운 곳까지 파고든다.

난 어깨를 옹송그리며 말한다.

“그건 안 돼요.”

“왜?”

“뛰쳐나가 버리면 그땐 편하겠죠. 증오로 가득 찬 마음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지켜 줄 테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건 치유되지 않아요.”

“…….”

“영원히 상처로 남게 될 거예요.”

지금 한승우가 한국에서 어떻게든 뛰쳐나와서 예브게니아 선생님에게 몸을 의탁한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다. 내가 도와도 소용없다. 내가 무턱대고 그를 데려올 생각을 못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가장 좋은 건 어떻게든 부모님에게 이해를 구하고 허락을 제대로 구하는 것뿐이었다.

“지금 저 상황에서 허락을 받을 수 있겠어?”

“…….”

리처드는 약간 힘없이 말했다. 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적인 해결이 그리 쉽지 않다는 건 그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쉬웠다면 여름방학 내내 허락을 얻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난 리처드를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에 떨어진 낙엽을 떼어 주며 말했다.

“일단 연락을 해 보죠……. 아, 리처드. 한승우의 한국 전화번호는 아시나요?”

“알지.”

“전화해 주세요.”

“지금?”

“예. 지금.”

일단 지금 그와 연락이 가능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리처드가 전화를 거는 사이 난 생각했다.

그간 내게 아무 말 않았던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위로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무기력하게 주저하는 마음이 스멀거린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리처드는 스마트폰을 귀에 붙이고 섰다.

그가 말했다.

“야, 뭐 해.”

“…….”

저기, 리처드. 너무 주저 없으신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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