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28화 (328/1,277)

##  328화

한국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

멍하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한승우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괜히 메신저 앱만 만지작거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3시가 다 되어 간다. 러시아는 오전 9시경으로 이미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오늘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음악학교의 개학식 날이다.

한승우는 그 중앙음악학교의 학생이면서도, 한국에 있는 자신의 방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

욕이라도 실컷 하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누굴 욕한들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앞서 두 달, 그리고 뒤의 한 달. 총합 여름방학 석 달 동안 해 왔던 것들이 나름대로의 협의와 이해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모두 착각이었다.

논리는 강압에 부딪쳐 무너지고, 진심은 권위를 이기지 못했다.

한승우의 아버지는 그를 모스크바에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참 전부터 그러했으니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한승우를 지원해 주었던 할아버지조차 이번엔 침묵했다.

러시아에 1년간 있는 사이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른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한승우의 편이었던 할아버지가 이번엔 등을 돌렸다는 점이었다.

“…….”

태어나서 자란 나라였지만, 한승우는 어쩐지 여기에 자신의 편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기분을 느꼈다.

어차피 아군이 없다면 맞서 싸우겠다는 심정으로 아버지에게 있는 힘껏 대들기도 했다.

하지만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을러대는 고함 소리와 욕설. 종국에는 다리를 분질러 봐야 소용없을 테니 손목을 분질러 놓아야겠냐는 윽박이 있었고 한승우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화도 안 난다. 그냥 어이가 없고 슬펐다.

“……그렇게 부러지진 않을걸.”

슬픔이 지나가고 나서야 명징한 분노가 차오른다.

어른들은 사춘기라는 이름하에 이 나이대의 아이들을 규정짓고 대충 무시한다.

하지만 그 사춘기라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고 치더라도, 분명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그 불합리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중앙음악학교가 한국에 있는 학교라면 몇 날 며칠을 걸어서라도 갔겠지만, 애석하게도 중앙음악학교는 머나먼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다. 비행기표 등 비용으로 못해도 50만원은 필요했다.

한승우는 저금을 모두 빼앗긴 지금 50만원을 구할 곳이 없다는 것에 절망감을 느꼈다.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다면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미성년자는 아르바이트 하나를 하려고 해도 부모님의 동의서가 필요하다.

어린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겠지만, 한승우에겐 정말 지독한 족쇄처럼만 느껴졌다.

그리고 돈뿐만이 아니라 여권도 빼앗겼다. 부모님이 집에 없는 사이 온 집 안을 뒤져 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그의 여권은 절대 찾을 수 없는 어딘가에 가 있거나, 폐기되었을지도 모른다.

“…….”

분노가 질척하게 가라앉으면서, 지독하게 외롭고 우울해졌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방법을 찾아보았을 텐데, 하필이면 방학의 3분의2 이상이 지난 시점에서 급격히 악화돼, 아무 대비도 하지 못하고 이 상황에 이르렀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지 부모님이 가라고 하는 중학교에는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안 가고 버틸 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버티고 버티다가 어머니가 눈물을 보이실 때면 마음이 급격하게 약해짐을 느낀다.

할 수 있다면 다 집어치우라고 던지고, 그냥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고 굶어 죽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한승우는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자각이 있었다.

답답함과 부모님에 대한 분노,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 중앙음악학교의 친구들에 대한 걱정 등이 엉키면서 기분이 안 좋아졌다.

이러다가 돌아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한승우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당장 어떠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일단 잠시 머리를 쉬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려는 순간, 스마트폰 화면이 반짝였다.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막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화면에 표시된 상대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리처드 피츠앨런 하워드였다.

러시아에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가 영국인이라는 말은 조금 웃기게 들리기도 하지만, 한승우는 이 영국인 친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전화를 받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 야, 뭐 해.

대뜸 묻는 말에 한승우는 웃어 버릴 뻔했다. 지금 심각한 상황이란 걸 빤히 알면서도 리처드는 일부러 대수롭잖다는 듯 말을 걸어오곤 했다.

거기에 힘입어 한승우도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해.”

- 아무것도 안 하고 뭐 하고 있는데.

“인생을 곱씹고 있지.”

- 시인 납셨네.

친구와 나누는 시답잖은 헛소리들. 그리고 이 타이밍은 서로 킬킬거리며 웃을 타이밍이었는데, 한승우도 리처드도 웃지 않았다.

리처드가 물었다.

- 거기 몇 시지?

“오후 3시.”

한승우는 다시 시간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도 점심도 다 걸렀다.

리처드가 재차 물었다.

- 학교는?

중학생이 한낮에 학교에 있지 않고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물론 한승우는 학교란 곳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가고 싶은 학교가 조금 멀리 있을 뿐이다.

한승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학교는 중앙음악학교야.”

- 그야 그렇겠지.

“농담하는 것 아니야. 리처드.”

- 나도 알아.

리처드에게 장난을 치거나 놀리려는 의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저 해야 할 이야기를 한다는 듯 이야기했다.

- 어쨌든, 우리 학교 오늘 개학했어.

“그리고 난 여기에 있고.”

- 상황이 뭣 같네.

결국 짜증이 툭 튀어나온다.

한승우는 그간 겪은 일과 현 상황에 대해 가장 친한 친구인 리처드에게 어느 정도 털어놓은 바 있었다.

때문에 리처드는 다른 누구보다 한승우에게 잘 공감하고 상황을 이해해 주고 있었다.

- 부모님은 여전하셔?

“어. 끔찍해.”

- 유감이네.

정말 끔찍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한승우가 말했다.

“그리고 오늘 중앙음악학교가 개학이라는 것도 다 알아보셨더라. 오늘까지 날 여기 잡아두었으니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 이기고 지는 게 어디 있냐?

“우리 아버지는 그래.”

어떻게든 피아노를, 그것도 러시아에서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아무리 말해 봐도, 한승우의 아버지는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사춘기 열다섯 살짜리의 말로 치부했다.

때문에 그저 이렇게 강압적으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한 뒤에 시간이 흐르면, 그 후엔 알아서 정신을 차릴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한승우는 이를 갈았다.

“혼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지.”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시든 알 바 아니었다.

개학까지 빠르게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서 결국 개학식에 참가하진 못했지만, 이대로 멍청하게 질질 끌려다니긴 싫었다.

“늦더라도 갈게. 어떻게든.”

- 어떻게? 아니…… 그것보다, 야. 너 자퇴당할 뻔했던 건 아냐?

“자퇴를 어떻게 당해?”

- 부모님이 서류를 보내면 되거든.

“……아 씨.”

자퇴라는 행위의 주체인 자신이 그럴 생각이 없는데 갑자기 자퇴라니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듣고 보니 말이 되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자식을 자퇴시키고 모국의 학교에 입학시키겠다고 자퇴서를 제출한다면 학교에서 그것을 반려하진 않을 것이다.

중앙음악학교는 한 명의 유학생을 굳이 지키려 들 이유가 없다. 한승우는 그 정도 입장 파악은 하고 있었다.

한승우는 빠르게 그 문제부터 무마시켜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알겠어. 지금 선생님에게 바로 내가 전화해 볼게.”

- 그럴 필요 없어. 이미 이야기했으니까. 최대한 미뤄 놓기로.

“뭐? 아, 리처드 네가 말해 준 거야?”

- 아니.

“뭔데.”

자퇴 아닌 자퇴에 대한 문제로 머리가 복잡한데 리처드는 이상한 소리를 해 댔다. 한승우가 조금 짜증이 나서 다시 물어보려는 찰나,

- 받아 봐. 타티아나.

“!?”

리처드는 상상도 못 한 이름을 불렀고, 수화기 너머로 핸드폰을 건네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소음이 일다가, 잦아들고.

- 여보세요.

익숙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승우는 미처 예상치 못한 친구와 통화하게 되면서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텅 빈 백지처럼 되는 기분을 느꼈다.

간신히 입만 움직여 그 이름을 부른다.

“어……. 타티아나.”

- 한승우.

이름을 부르자마자 짧게 화답해 온다.

그 목소리는 설산의 눈보라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한승우가 바짝 얼어붙은 사이,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 나한테 할 말 없어?

유일하게 자신에게만 쓰는 반말. 처음 러시아어가 미숙했을 땐 그 차이를 몰랐지만, 어느 정도 잘 하게 된 이후론 타티아나가 반말을 하는 것에 대해 한승우는 약간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사실 그리 친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도, 친밀하게 느껴지는 그런 것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친밀함은 반전되었을 때, 보다 강한 위압감을 가져오기도 한다.

타티아나는 분명하게 한승우에게 실망하고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한승우는 그간 타티아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일단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

- 하…….

타티아나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격조 없고 예의 없는 언행을 거의 하지 않는 타티아나가 이 정도까지 표현하는 것은 정말 많이 실망했다는 표현이었다.

“…….”

처음엔 이렇게 개학날까지 모스크바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못했기에 구태여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되면서 모스크바로 갈 방법이 아예 사라져 버렸을 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타티아나에게 손을 뻗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의 도움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왜 그렇게 잘해 주는진 모르겠지만 늘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승우에게도 어느 정도 선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물론 타티아나는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승우는 무슨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욕은 어마어마하게 비싼 편이었다.

- 솔직히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닌데, 그래도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

이 정도로 용서해 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안도된다는 듯 말할 줄도 상상도 못 했다.

한승우는 놀라기도 하고,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마땅한 대답도 찾지 못해서 멍청히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타티아나는 딱히 대답을 원하진 않았던 것 같다.

- 이야기는 리처드에게 들었어. 곤란한 상황 같더라.

“뭐……. 그렇지.”

- 그냥 그렇지가 아니잖아?

“…….”

- 자퇴는 어떻게든 미뤄 둘 수 있었지만…… 영영 휴학으로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거야. 어려워. 정말로.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에 절로 목이 멜 정도였다. 멀리 러시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 온 이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승우는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타티아나, 너무 신경 쓰지 마. 괜찮을…….”

- 한승우.

상투적으로 한 말이었는데, 타티아나가 살짝 발끈한다.

-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정말로 화낼 거야.

그녀는 상투적인 말이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진지할 땐 한없이 진지한 사람이기도 했다. 한승우는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 하나도 안 괜찮고 신경 끌 수 없어. 난…… 네가 중앙음악학교에서 9학년도 보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니?

“……맞아.”

- 네가 포기했다면, 다시 올 생각이 없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지막하게 잦아드는 목소리.

이윽고 타티아나는 무언가 결심한 듯 천천히, 묵직한 무게를 실어 온다.

- 하나만 물어볼게.

“응.”

-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까.

“도와줄 수 있는 것?”

- ……이번 딱 한 번만. 정말 한 번.

누군가에게 약속하듯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 모든 의무와 다짐을 깨고서라도, 널 도울 수 있다면 도와줄게.

그 의무와 다짐이 무엇인지 알 순 없다. 하지만 그것이 타티아나에게 있어서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확실했다.

- 네가 필요하다면.

“…….”

- 내가 뭘 하면 되겠니.

베르체노프가의 영애가 내미는 손.

한승우는 그녀가 그토록 부잣집의 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의식하거나 특별하게 대하려 하지 않았고, 타티아나 역시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거나 특별한 대접을 받으려 들지 않았지만,

그 또한 타티아나에겐 하나의 의무와 다짐에 속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지금 깨달았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을 위해서 하진 않아도 친구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리할 용의를 지녔다.

“…….”

타티아나가 보내오는 친애에 한승우는 숨을 죽였다. 농담처럼 받아 주고 싶었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만약 한승우가 지금 자신을 데려가서 베르체노프가의 방을 빌려 달라고 한다면 타티아나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정말 많은 문제가 생기고 시끄러워지겠지만, 그녀는 한다.

다만 그렇게 되면 곤란해지는 것은 타티아나다.

그렇다면 생각할 것도 없다.

한승우는 근 며칠 만에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충분해.”

- ……?

“이렇게 전화해 준 것으로 충분해.

- 전혀 충분하지 않…….

“충분해.”

웃음을 되찾은 한승우가 다시 확고하게 말했다.

그 긍정적인 분위기가 전화 너머로도 전해졌는지, 타티아나가 작게 말했다.

- 그러니.

메마르게 가라앉는 목소리. 하지만 신뢰가 담겨 있다.

한승우는 약간 기운을 찾은 지금에서야 자신이 수동적으로 체념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좌절했고 우울하다고 하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타티아나가 올지도 모른다.

웃기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녀처럼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이 유학생 따위를 위해서 스스로 곤란해질 것을 알면서도 움직일 리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렇다.

그러나 이전에도 몇 번이고 타티아나는 그렇게 했고, 한승우는 이번에야말로 그렇게 둘 순 없다고 생각했다.

한승우는 기운차게 말했다.

“지금 정말 아무것도 없고, 뭘 해야 할지 몰라 멍청하게 앉아 있었지만……. 이젠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 뭘…… 하려고?

“돈부터 만들어야지. 일당을 받는 막노동을 해서라도.”

- ……!

중앙음악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뭐든지 하겠단 의미로 말한 것인데, 타티아나의 놀란 기색이 전해져 왔다.

그녀가 당혹감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 한승우. 내 말 잠시만 들어 줄래.

타티아나는 스스로를 다잡는 듯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어떠한 감정을 내색하지 않으려는지 냉정한 어투였다.

- 돈이라면 내가 빌려줄 수도 있어. 따라서 그건 문제가 아니야.

“문제야. 언제까지고 내가 그렇게 받을 순…….”

- 어차피 출세하면 갚겠다며. 그리고 간단한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공사장 같은 곳은…… 너무 위험해. 네가 할 수 있지도 않고.

“할 수 있어.”

- 손이라도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

- 절대 안 돼.

딱 잘라서 타티아나는 막노동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그럼 돈은 어떻게 구하고 어떻게 중앙음악학교로 돌아가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한승우는 타티아나가 이렇게까지 강력하게 반대하니 기세가 조금 꺾였다.

애초에 부모님 동의서 없이 중학생이 불법으로 막노동을 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지만.

타티아나는 조금 더 진지하게 설득조로 말했다.

- 아무튼…… 그렇다면 확실히 말할게. 네가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혼자서 해야 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이야.

“뭐……?”

- 얼마가 걸릴진 모르겠지만, 부모님을 진지하게 설득하고 허락을 구해서, 지원과 응원을 받아 러시아로 돌아오는 것이 네가 할 일이야.

한승우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타티아나가 웃음기 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정말 농담인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미안한데, 타티아나. 넌 우리 집 상황을 잘 모르잖아.”

- 잘 몰라. 그래도 내가 줄 수 있는 게 직접적 도움이 아니라 조언뿐이라면……. 다시 한 번 힘내 달라고 말하고 싶어.

얼마나 심각한 반대가 있는지 받아 보지 않았으니 모른다. 하지만 바른 방법이 있다는 것은 안다.

말로 꺼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지도 모르는 말이었지만 타티아나는 전혀 흔들림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한승우는 어이가 없다가도 감탄했다.

“타티아나, 넌 정말…… 올곧게 말하는구나.”

- 어렵고 힘든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어.

보다 조심스럽게, 타티아나가 말했다.

- 하지만 널 위해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내 말을 믿어 줘.”

“…….”

감히 의심할 수도 없었다. 진심 어린 조언은 한승우에게 크게 와닿았다.

하지만 다시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을 떠올려 보아도 좋은 결과가 떠오르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승우는 결국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할게.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

- ……그러니.

“그냥 여기서 나가고 싶어.”

- …….

이번에도 타티아나가 진지하게 충고하듯 그래선 안 된다고 타이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이번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난 널 말릴 자격이 없어.

“아니, 그건 아니지. 타티아나. 넌 내게 무슨 말이라도 할 자격이 있어.”

- 그 말이 아니야.

“……?”

조금 의아해하는 사이, 타티아나가 지금 할 말은 여기까지라는 듯 이야기했다.

- 그래도 내 말을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줘. 충동에 몸을 맡기지 말고. 진지하게…… 부딪쳐 줘.

“…….”

- 힘내. 또 전화할게.

그 말을 끝으로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들로부터의 전화는 끊어졌다.

“…….”

한승우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침대 끄트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중앙음악학교로 돌아가고 싶다.

피아노에 집중된 수업과,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금방 배워서 익숙해진 러시아어, 그리고 세계적인 천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 연주자 친구들. 모두 그리웠다.

돌아가야 했다.

올곧은 타티아나는 되도록 후회하지 않도록 매듭을 지어 달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잡히지 않는다.

다만 그 말은 한승우를 하여금 더더욱 강하게 중앙음악학교로 가고 싶도록 만들었다.

정 안 된다면 도망치듯이라도 가야만 했다.

“…….”

보다 독한 마음으로 이를 악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한승우는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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