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6화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알레니체프는 웅성거리는 주변의 소음을 하나도 들을 수 없었다.
“…….”
상념에 잠긴 그의 머릿속엔 타티아나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던 피아노 협주곡이 떠다니고 있었다.
중앙음악학교의 교사로서 구세프는 학생의 연주회를 무작정 칭찬하고 옹호하기보단 약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개선할 점을 찾아낼 의무가 있었다. 그래야 레슨으로 가르칠 것이 생기고, 아직 어린 피아니스트를 보다 높은 곳으로 밀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세프는 지금 타티아나에게 박수 말고는 보낼 것이 없었다.
물론 대가들의 연주와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어린 나이에도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카리스마와 실력을 갖추었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다. 앞으로도 가르칠 것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렇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한창 방황하던 타티아나가 콩쿠르, 자선 연주회를 통해서 제대로 자신의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번엔 그간 자신 없어 하던 협연까지 정말 멋지게 성공시키는 것으로 피아니스트로서 성장한 것에 대해서 구세프는 그저 잘했다는 소감 외에도 해 주고픈 말들이 여럿 있었다.
선생이나 음악가의 입장을 내려놓고 타티아나를 바라보면 가슴이 조금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장한 녀석.”
중얼거리는 구세프의 옆으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구세프?”
“크흠.”
미하일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구세프를 불렀다. 구세프는 언제나처럼 약간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뭔가.”
“뭐냐니. 자네야말로 뭐 하나? 나가세.”
“생각 좀 하고 있었네.”
대충 대답하는 구세프를 보며 미하일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오늘은 레슨하지 말게나. 다음에 하자고 다음에.”
“미하일……. 내가 지금 연주를 마친 타티아나를 붙잡고 점수표에 점수를 매기면서 이러쿵저러쿵할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가?”
구세프는 오늘의 연주를 놓고 타티아나와 앉아서 되짚어 보고 레슨을 할 생각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나중에 학교로 돌아가서 선생과 학생으로서 만났을 때의 이야기였다. 오늘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구세프가 으르렁거리자 미하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일세.”
“참 나.”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를 친구였지만 요즘 들어 어쩐지 타티아나와 닮아 가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하며 구세프는 혀를 찼다.
미하일이 말했다.
“솔직하게 칭찬이나 해 주게. 타티아나는 자네가 칭찬해 주는 걸 굉장히 좋아하니까.”
“제발 부탁이니 지도 선생은 자네라는 걸 자각해 주게.”
“충분히 자각하고 있네. 그러니까 잘 아는 거지.”
미하일은 확실히 보통 선생들과는 조금 다른 편이었다. 구세프는 한마디 더 하려다가 약간 맥이 풀려서 그만두었다.
“아무튼, 쓸데없는 소리 안 해도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 두게.”
“알겠네. 자, 그래도 나가지. 다른 가족분들은 이미 밖이라네. 샴페인이라도 다 같이 한 잔 해야 하지 않겠나?”
“좋지.”
구세프는 대답하면서 주변을 바라보니 이미 청중들은 반 이상 빠져나가 있었다. 연주회의 열기에서 머리를 조금 식히기 위해선 청중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구세프와 미하일은 홀 밖으로 나와서 로비로 향했다. 타티아나에게 초대받은 사람들은 거기에 모두 모여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유리가 로비로 막 들어선 미하일과 구세프를 보고는 알은체를 했다. 유리는 그 무뚝뚝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훌륭한 연주였소. 미하일 표도로비치.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아주 흡족한 듯한 모습이었다. 미하일은 유리와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굳게 악수를 한 채 이야기했다.
“저희야말로 감동했습니다.”
“다 선생분들 덕 아니겠소.”
“무슨 말씀을. 유리 알렉세예비치께서 따님을 잘 지원해 주신 덕이죠.”
“하하하.”
유리가 호탕하게 웃으며 미하일의 손을 놓고,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샴페인 잔을 직접 가지고 와서 두 선생에게 건네주었다.
직접 샴페인을 가져다주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미하일은 약간 놀랐지만 미소를 지으며 받았다. 이 잔은 베르체노프 콘체른의 총수가 보이는 최소한의 성의이자 감사의 인사였다.
미하일과 구세프가 잔을 받자 유리가 자연스럽게 잔을 앞으로 뻗었다. 세 남자는 가볍게 건배했다.
미하일은 입안을 상쾌하게 만드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옆을 보았다.
로비뿐만 아니라 복도를 걷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연주회 시작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인터미션 사이의 분위기는 연주회의 수준에서 비롯된다. 연주회가 엉망이었다면 굉장히 불쾌한 분위기가 둥둥 떠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걱정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눈을 뜬 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주회 1부에 충분히 만족한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미하일이 살풋 웃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지금 이 분위기, 보이십니까? 모두들 흥분해 있는 것 같군요.”
“그런 것 같소.”
“타티아나가 좋은 피아니스트라는 것이 오늘 다시 한 번 증명된 것 같아 큰 기쁨을 느낍니다.”
“나 역시 딸아이가 자랑스럽소.”
유리는 미하일의 말에 적극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순식간에 한 잔을 비워 버리고 다음 잔으로 손을 뻗는 모습이 아무래도 몇 잔 더 마실 것 같다.
구세프는 기분 좋게 조금 더 마시고 싶기도 했지만 2부가 남아 있어서 자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타티아나가 초대한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로비 저편에서 오늘 연주회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한 아나스타샤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타티아나!”
구세프는 그 외침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무대 위에서 금빛으로 빛나던 피아니스트, 타티아나는 여느 때처럼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평소엔 늘 차분한 것 같으면서도 때론 과격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잦은 타티아나였지만, 그녀는 보다 중요한 무대에 설수록 더더욱 차분하고 침착해지는 묘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타티아나는 첫 협연 무대라는, 굉장히 크고 중요한 무대의 1부를 마치고도 그리 흥분하거나 들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친구들이 들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거의 날듯이 달려가선 타티아나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너무 잘했어!”
“고마워요. 아나스타샤!”
“무대에서 너밖에 안 보이더라. 정말로.”
“아하하, 고마워요. 발렌티나.”
발렌티나도 그 축하에 끼어서 말했고, 타티아나가 짧게 웃으며 답해 주었다.
그렇게 모인 세 명을 중심으로 다른 남학생들과 아이들도 다가가서 저마다 한마디씩 축하를 건넸다.
“좋은 무대였어. 타티아나.”
“항상 느낀 것이지만 언제나 타티아나 후배님은 연습 때보다 어떻게 실전에서 더 잘하시는군요.”
“저기 사람들 다 2부에서 거의 기절하지 않을까?”
“멋졌어요, 언니!”
축하를 받으며 타티아나는 한 명 한 명 모두 소중하다는 듯 답인사를 해 주었다.
늘 그녀는 연주회를 보러 와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하곤 한다. 구세프는 그것이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 타티아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나는 저 오케스트라를 알아.”
상투적인 축하 인사가 아닌 약간 특별한 말이었다. 그 말에 타티아나와 다른 친구들이 모두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예전에 같이 협연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네가 훨씬 더 잘 해낸 것 같아. 오케스트라와 정말 잘 어우러지더라.”
그 말엔 구세프가 조금 놀랐다. 저 자존심 강한 녀석이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딱히 자존심을 굽히거나 어쩔 수 없이 인정해 준다는 뜻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친애하는 친구에게 건네는 따뜻한 축하 인사였다.
“멋있었어.”
타티아나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에르네스트의 축하를 받았다.
“고마워요. 에르네스트.”
“응.”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스타니슬라프와 협연을 했던 건 몇 년 전 일이잖아요? 지금 하시면 더 잘하시겠지요.”
“그걸 또 따지냐…….”
타티아나는 그 와중에 에르네스트가 어릴 때 했던 연주는 지금의 연주와 대비할 수 없다는 정론을 펼쳤고 에르네스트는 황당하다는 듯 삐딱하게 섰다.
하지만 결국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아무튼, 잘했다고.”
“후후, 고마워요.”
타티아나 역시 쓸데없이 진지하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 나름의 농담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인사가 끝나고, 타티아나는 어른들에게 다가왔다.
가장 먼저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인 베샤스트니흐 부인이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너무너무 감동적이었어! 타티아나.”
“감사드려요.”
“훌륭했다. 타티아나.”
“아버지 덕분이에요. 루슬란 오빠도요.”
차례로 화답하고, 마지막으로 타티아나의 시선은 미하일과 구세프에게로 향했다.
“선생님.”
타티아나가 부르는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애틋한 느낌이 있었다.
성인 연주자들처럼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타티아나는 학생이 아니라 한 명의 피아니스트로 인정하고 봐 주어야 했지만, 지금 미하일과 구세프를 부르는 타티아나는 그저 한 명의 학생처럼만 보였다.
미하일은 잠시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달리 더 말할 것도 없구나. 넌 내 최고의 학생이다. 타티아나.”
“……아.”
타티아나는 그 이상 가는 칭찬이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감격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는, 반드시 말해야겠다는 듯 말했다.
“미하일 선생님도 제 최고의 선생님이세요.”
“고맙구나.”
사제는 옆에서 보고 있기가 부끄러울 정도의 말을 주고받았다. 구세프는 이전 같았으면 탄식을 내며 고개를 돌렸겠지만, 이번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잘 했다. 타티아나. 레슨을 해 준 보람이 있군.”
“아, 구세프 선생님.”
타티아나는 구세프를 보고는 멈칫했다. 그 표정만 봐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여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미하일이 최고라고 말해 놓았으니 구세프에겐 무어라 해야 할지 고민 중인 것이다.
은근히 딱 부러지지 못하고 미적거리기도 하는 것이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라서 구세프는 약간 안심이 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럴 때 타티아나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진 명확했다. 구세프는 솔직하게 말했다.
“타티아나. 오늘 넌 무대에서 나와 미하일, 그리고 여러 음악가들에게 배운 것들을 멋지게 보여 주었다. 아주 잘했다.”
“감사합니다. 구세프 선생님.”
타티아나의 표정은 마치 눈이 사르르 녹아내리듯 편안해졌다. 구세프는 한결 나아진 타티아나를 보며 정말 잘했다는 뜻으로 가볍게 어깨라도 두어 번 두드려 주고 싶었지만, 짐짓 엄하게 눈썹을 꺾으며 말했다.
“뭐……. 다 끝난 건 아니다. 1부가 끝났을 뿐이니까 집중력 잃지 말고. 물 정도는 괜찮겠지만 차를 마시거나 찬바람을 쐬진 마라. 잘못하면 컨디션이 망가진다. 지금 그 컨디션 그대로 2부에서도 최선을 다 해라. 알겠지.”
지도 선생인 미하일도 좋은 말뿐이었지만, 지금 모두가 기뻐하고 있을 때 한 명쯤은 이런 역할도 도맡아야 하는 것이다. 구세프는 스스로가 그런 역할에 아주 적합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타티아나는 긴장하는 대신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우후후.”
“뭐냐?”
약간 퉁명스럽게 묻자 타티아나가 죄송하다는 듯 말했다.
“지휘자님이 하셨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나서요.”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맞아요, 구세프 선생님. 2부가 남았으니까요.”
그녀는 다시 연주자의 눈빛을 하고는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냐.”
구세프는 짧게 대답했지만 사실 속으론 타티아나의 이런 태도를 정말 높게 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속마음을 드러내면 또 타티아나가 웃을 것 같아서, 구세프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야기를 마친 타티아나는 다시 친구들에게로 돌아가서 발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인터미션 시간이 그리 길진 않지만 친구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녀라면 이렇게 몇 분이나마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으로 2부에서도 정말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세프는 선생들의 역할은 딱히 더 필요 없겠다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와야겠군.”
“자넨 피아노 앞에 앉을 일 없으니 말인가?”
“불만 있나?”
“아니. 마음대로 하게.”
“흥.”
피식거리는 미하일을 두고 구세프는 그대로 로비에서 나와 테라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