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85화 (385/1,277)

##  385화

1년의 끝을 장식하는 12월은 날마다 추위를 더해 갔다.

점점 더 추워지는 날씨를 피부로 느낌과 동시에 연말의 분위기 또한 체감할 수 있었다. 이 추위는 내게 있어서 1년이라는 한 주기의 끝을 알리는 신호와 비슷했다.

호주 같은 나라는 12월이 여름이라는데, 그런 나라에서 맞이하는 연말은 어떤 기분일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약간 이상할 것 같기도 하고.

“앗 뜨거…….”

이러저런 생각을 하며 찻잔을 들었다가 깜짝 놀라 내려놓았다. 하마터면 교복에 쏟을 뻔했다.

난 혀를 내밀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식을 때까지 둬야겠다.

그렇게 차가 미지근해지길 기다리는 사이, 난 잠시 휴식하면서 미지근해져 있던 신경에 다시 뜨거운 불길을 쏟아부으며 손을 뻗었다.

“…….”

머릿속에 흐르던 선율을 건반으로 쏟아내고, 귀로 거둬들인다.

다시 머리로 들어온 선율은 현실의 어려움과 내 상상 사이의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 차이를 조금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난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양손으로 건반을 짚었다.

모든 집중력을 모아서 연주에 몰두한다. 연주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면서 손끝을 보다 잘 통제할 수 있게 되고, 보다 나아진 음악을 들으면서 귀가 예민해진다.

작은 음색의 차이도 놓치지 않게 된 귀는 이보다 더 높이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고 난 그 방법을 다시 손으로 현실에 실현했다.

지금까지 수만 번은 반복해 왔던 과정.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는 점점 더 강인해졌다.

새롭게 자라난 나무는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사방으로 가지를 펼쳤다.

난 연주를 하는 와중에도 이 곡에 피아노 듀엣, 성악곡, 콰르텟 등 다양한 편곡이 가능함을 느꼈다.

“아핫…….”

연습을 마치자마자 난 웃음을 터뜨렸다.

피아노 솔로 곡을 협주곡으로 편곡할 생각까지 하다니, 내가 미쳐도 많이 미쳤나 보다. 주어진 곡이나 똑바로 연주할 것이지.

하지만 편곡도 선곡도 할 수 없었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난 제대로 음악가로서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는 거겠지.

이젠, 모든 것이 많이 익숙해졌다.

“후…….”

다시 찻잔을 들고 입김을 불어 식힌 다음에 입으로 가져갔다. 적당히 식은 로즈메리 차가 향긋하다.

난 휴식을 즐기며 꺼놨던 스마트폰을 켜고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의 연습하러 가겠다는 메시지가 있었고, 콘서트 디렉터인 알렉세이에게서 온 것도 있었다. 며칠 뒤 있을 음악회 일정에 대한 정보였다.

그리고 의상숍에서 온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최고의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피팅을 한번 더 해 볼 수 있도록 방문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저번에 한 번 피팅을 하고도 며칠 전에 또 했었는데, 그걸로도 모자란가 보다. 며칠 사이 살을 빼거나 찌우진 않았는데 또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다. 하지만 내가 최고의 곡을 만들기 위해 신경 쓰는 것처럼, 신경 써서 제작해 주는 건 감사한 일이다.

난 오후 연습은 이쯤하기로 하고 피아노 덮개를 닫았다.

“……음?”

코트를 입고 연습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길 잠시, 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앙증맞은 키에 어딘가 익숙한 금발. 에르네스트의 동생인 사샤였다.

“사샤!”

다시 발걸음을 빨리 하며 반갑게 인사하자 사샤가 돌아보았다. 귀여운 미소가 그 얼굴에 맺혔다.

사샤는 당장 달려와 안길 것처럼 반가워하다가도, 학교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짐짓 예의 있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나.”

“후후, 사샤도 안녕하세요. 오늘 수업은 끝난 건가요?”

“네. 방금요. 레슨 받았어요.”

“무슨 곡이었나요?”

“스카를라티 소나타요.”

“아! 그래요? 저도 얼마 전에 다시 연습했었는데 말이에요.”

레퍼토리 확인 차 연습했던 적이 있어서 그렇게 말했더니 사샤가 기대 어린 눈으로 물었다.

“몇 번이요?”

“K96이요.”

“그거 너무 어려워요.”

사샤가 입을 내밀며 말했다. 500곡이나 넘는 소나타 중에 어쩌면 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스르륵 사라졌다.

난 빙그레 웃었다. 스카를라티 소나타 K96은 확실히 쉬운 곡은 아니다. 하지만 번호만 듣고도 어떤 곡인지 아는 걸 보니 이미 들어 봤고, 또 어렵다는 판단까지 한 것 같다.

그렇다면 괜찮다. 어렵다면 연습하면 되고, 사샤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

“금방 할 수 있어요.”

“그 금방이 내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사샤는 약간 답답하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더니, 곧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누나 연습은 어때요?”

“제 연습이요?”

아무래도 며칠 뒤 앞두고 있는 음악회가 꽤 큰 음악회이다 보니 궁금해할 만도 하다. 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직접 보여 드릴게요. 아, 맞아요. 사샤. 제가 티켓 드렸나요? 혹시 괜찮다면 오실 수…….”

“티켓 있어요.”

“예?”

“형이 줬어요.”

난 멍하니 물었다가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소리를 했는지 깨달았다.

아나스타샤를 비롯한 내 친구들에게 티켓을 나누어 주면서 당연히 사샤도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에르네스트가 자기 동생에게 티켓을 안 주었을 리가 없었다.

“아…… 그냥 한 장 예비로 드릴까요?”

창피함에 횡설수설하자 사샤의 눈빛이 조금 안타깝다는 듯 변했다. 예비 티켓이 무슨 소리야?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한 말인데도 어이가 없다.

하지만 바보 같은 소리만 연이어 하는 나와 달리, 사샤는 고개를 휘휘 젓더니 점잖게 화제를 돌려 주었다.

“형은 그러던데요. 타티아나 누나랑 듀엣곡은 거의 완벽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으니까 기대하라고요.”

“무, 무슨 경지요……?”

“뭐라더라, 작곡가 본인이 와도 인정할 거라 그랬던가?”

갑자기 에르네스트 쪽으로 향한 이야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요 며칠간 그와 같이 붙어 다니면서 함께 듀엣곡을 연습했지만, 늘 문제점을 바로잡고 보다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한 이야기를 나누기만 했었다.

그런데 동생에겐 저렇게 말했단 말이야? 난 에르네스트가 도대체 이번 듀엣에 얼마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난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정돈 아니에요, 사샤. 그건…….”

“아니에요?”

“그건…….”

에르네스트가 잘못 말한 거라고 딱 잘라 말할 순 없었다. 난 저런 말들을 할 수 있는 에르네스트가 정말 밝게 빛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난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에, 에르네스트는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

사샤는 약간 이상하다는 듯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듀엣이니까 누나도 똑같은 거 아니에요?”

“음…….”

두 명이서 한 곡을 연주하는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난 영원히 저렇게 말하진 못할 것 같다. 에르네스트의 말을 빌려야만 하는 걸까.

갑자기 든 생각에 가만히 있자, 사샤는 걱정이 서린 눈빛으로 물었다.

“누나는 기대되지 않아요?”

내가 에르네스트와 듀엣하는 것 자체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하나 보다.

그건 절대 아니었다. 난 가장 대답하기 쉬운 질문에 경쾌하게 대답했다.

“기대하고 있어요. 무척.”

사샤는 그제야 안심된다는 듯 웃었다.

“그럼 저도 기대돼요.”

우리는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사샤도 이 시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었다. 난 할 일이 있었고, 사샤는 집에 돌아가야 한다.

마침 좋은 생각이 나서 사샤에게 제안했다.

“아, 사샤. 오늘은 같이 돌아가시지 않으실래요? 차로 데려다 드릴게요.”

“괜찮아요.”

“아뇨, 어차피 오늘 잠시 들를 곳이 있는데 거기가 사샤의 집 근처거든요.”

사샤는 몇 번 사양하더니 오늘만 특별히 데려다줄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내가 부탁하자 그제야 받아 주었다.

사샤와 손을 잡고 정문을 나왔다. 스마트폰으로 빅토르를 부르려고 하는데, 사샤가 내 손을 슥 당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자 정문 옆 게시판에 서 있는 빅토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빅토르? 뭐 하세요?”

“아가씨.”

빅토르는 날 보며 씩 웃더니 게시판 쪽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포스터 나왔군요?”

“포스터요?”

무슨 말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게시판엔 커다란 글씨로 송년 제야 음악회라 프린팅되어 있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렇게…….”

포스터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쩐지 다른 포스터보다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진 것 같지만, 생방송도 하는 큰 음악회이니만큼 포스터는 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나와 에르네스트의 사진이 누가 보더라도 가장 커다랗게 나와 있는 건 문제였다.

뭐야 도대체? 이 음악회의 메인은 사실 모스크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아닌가? 왜 나랑 에르네스트가? 말도 안 돼.

이 음악회 진행위원회는 포스터를 한 번 시안을 만들어 보여 주지도 않고 그냥 진행하는 거야? 내 표정은 또 왜 저렇게 삭막한 거야?

너무 당황스러워서 뭐라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아가씨는 웃으시는 게 예쁜데 말입니다.”

내 속도 모르고 빅토르는 그런 소릴 했다.

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입을 열었다. 내 입이 말했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요……. 작년에도 이랬던가요?”

“비슷했던 것 같긴 한데…… 조금 칙칙했지 않았나 싶군요.”

“칙칙……요?”

“인상 쓰고 있는 중년들만 있었던 것 같은 기억이 나서 말입니다.”

작년 봤던 송년 제야 음악회 포스터를 떠올렸다. 유명한 음악가들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포스터였다.

내가 그 포스터가 얼마나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빅토르는 가볍게 일축했다.

“칙칙하진 않아서 좋군요.”

“무슨 실례되는 말씀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크게 나온 것 같지 않아요? 저랑 에르네스트?”

“뭐 어떻습니까?”

난 생각도 못한 상황에 미칠 것 같은데, 빅토르는 그저 킥킥 웃기만 했다. 그가 진짜 내 경호원이 맞나 싶을 지경이다.

그리고 거기에 사샤가 한술 더 떴다.

“형이랑 누나가 주인공이네요.”

“그럴 리가 없어요!”

첫 회의 때 율리아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지, 이렇게 포스터를 보니 기가 막힐 정도였다.

난 계속 포스터를 보고 있는 것도 힘들어서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저분들이 얼마나……. 어쩌지, 알렉세이에게 연락을…….”

“하하하하, 아가씨도 참, 미팅 첫날부터 저 쟁쟁한 음악가들 사이에서 대결까지 해서 자리를 따내신 분이 이제 와서 왜 이러십니까?”

“그거랑 이거랑 같나요?”

난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뜻으로 날을 세우며 말했다.

확실히 내가 당당하게 실력으로 예카테리나와 대결을 해서 듀엣 자리를 따냈고, 다른 음악가 분들이 그 대결의 입회인으로서 우리를 인정해 주신 건 맞다.

하지만 그건 가장 어린 후배로서 최소한의 자격을 보인 것 정도였다. 난 그 이상을 바란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노려보건 말건, 빅토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할 뿐이었다.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포스터를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

“제가 보기엔 멋지기만 하군요.”

말도 안 된다고 반박할 말이 수십 가지는 있었는데, 진심으로 흐뭇하게 좋아하는 빅토르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으…….”

“그래도 부담스러우십니까? 그럼 여기 포스터에 적힌 관계자 번호로 제가 전화를…….”

“……아니에요, 빅토르.”

이미 우리 학교에까지 붙은 포스터를 이제 와서 바꿔 달라 하는 것도 복잡한 일이다.

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난 몰라도 에르네스트는 클래식계에서 이름난 기린아다. 인기도 많고 팬층도 두터우니까 이렇게 주인공처럼 내세워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왜 가장 어린 우리 두 사람이 이렇게 크게 나왔는지, 당혹스러움은 여전하긴 했지만.

“에르네스트니까…… 괜찮겠죠.”

“……그 친구가 괜찮은 건 저한텐 상관없는데요. 전 아가씨가 괜찮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일단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그리고 어떻게 되든 내가 할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조금 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난 웃음을 보일 수 있었다.

“더 잘해야겠단 생각밖에 안 드네요.”

“다행이군요.”

빅토르도 날 따라서 키득거리며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마지막으로 포스터를 바라보고, 이만 가자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빅토르는 게시판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선 포스터 끄트머리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고정핀을 뽑는 그를 보며 물었다.

“……뭐 하세요?”

빅토르는 자기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는 농부처럼, 너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떼서 저희 숙소에도 한 장 붙여 놓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 그걸 숙소에 왜 붙여요??”

“다들 아가씨를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그게 아니라! 그렇다고 학교 게시판에 붙어 있는 걸 떼면 어떻게 하나요?”

“어차피 교내 여기저기 붙어 있던데, 한 장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안 돼요!”

“그럼 아가씨가 한 장 구해다 주시죠.”

“저 지금 괴롭히려는 거죠?”

빅토르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실실거리며 장난을 쳤다. 난 사샤보다도 유치한 내 경호원을 보며 한숨밖에 안 나왔지만, 그래도 결국 그와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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