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화
에르네스트는 건반에서 손을 내리고, 숨을 가다듬고, 옆에 놓인 생수병을 쥐었다.
하지만 연습하면서 마신 생수병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요.”
그때 옆에서 타티아나가 슥 자신의 생수병을 내밀었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타티아나는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악보에 집중했다. 에르네스트는 그 옆모습을 보다가, 목을 축였다.
오늘 정말 굉장한 무대가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차오른다.
타티아나는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 무대 준비에 임하고 있었고, 오늘 마주한 그녀의 실력은 어제의 실력과는 또 한 차원 다르게 발전해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와 함께 하나의 음악을 만들면서 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생수병을 돌려주며 말했다.
“타티아나.”
“예?”
“오늘 컨디션 좋은 것 같네.”
“후후, 그렇게 들렸나요?”
에르네스트가 기대감을 담아 말하자, 타티아나는 솔직하게 기뻐하며 화답했다.
“에르네스트도 오늘 소리 좋네요. 당일 컨디션 관리는 특별히 안 하시는 거죠?”
“딱히. 물만 좀 많이 마시고, 먹는 건 포장된 샌드위치 같은 것만 조금 먹는 편이야.”
“아, 저번에도 그러셨던 것 같긴 하네요.”
오늘은 연말 음악회 당일이다.
에르네스트는 징크스랄 건 별로 없지만, 먹는 것에는 신경을 조금 쓰는 편이었다.
탄산음료 대신 생수를 마시고, 꼬박꼬박 식사를 하는 대신 가볍게 비닐에 포장된 신선식품류를 먹는다. 무대에 영향이 가는 일이 없도록 기본적인 변수부터 통제하는 자기관리였다.
지금 생수병만 하나씩 들고 이 연습실에 들어와서 연습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타티아나는 생수병을 톡 치며 말했다.
“오늘은 저도 에르네스트의 컨디션 관리를 따라 해야겠네요. 이미 물 마시는 것부터 따라하고 있지만요.”
“아니, 굳이 그럴 필욘 없어. 배고프지 않겠어?”
“아하하, 괜찮아요.”
에르네스트는 괜히 자기 때문에 타티아나가 좋아하는 차도 못 마시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어서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정말 걱정 말라는 듯 싱긋 웃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뭐, 이따 저녁에 올 아나스타샤가 제대로 챙겨 주겠지. 에르네스트는 너무 깊게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방금 좋았던 리허설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던 에르네스트는 무심코 시계를 올려다보고는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었다.
“3시네.”
“그렇네요.”
“해피 뉴 이어. 타티아나.”
“……??”
타티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저런 얼굴 할 줄 알았어. 에르네스트는 푸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타티아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표정에 스산함이 깃들 때까지 실컷 웃어 놓고는 그녀가 참다못해 한 마디 하기 직전에 설명해 주었다.
“지금 캄차카 쪽은 자정이잖아? 그러니까 이미 러시아엔 새해가 찾아온 거지.”
러시아는 시간대가 11개나 된다. 가장 서쪽의 칼리닌그라드 표준시에서 가장 동쪽의 캄차카 표준시까지 10시간이나 차이가 나고, 모스크바와 캄차카는 9시간의 시차를 두고 있다.
때문에 이곳 모스크바의 연습실에서 12월 31일 오후 3시라면 저 멀리 동쪽의 캄차카는 이미 1월 1일 자정인 것이다.
타티아나는 약간 멍한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해 봤어요.”
모스크바에서만 쭉 살면 은근히 이런 생각을 못 하는 애들이 많다니까. 에르네스트는 이번엔 정말 완벽하게 타티아나를 놀라게 만들었다는 성취감을 느끼면서 보다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기로 했다.
“봐 봐. 보여 줄게.”
에르네스트는 꺼 놓았던 스마트폰을 켜고는 공중파 방송을 볼 수 있는 앱을 실행시켰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옆에 앉아선 캄차카 표준시로 볼 수 있는 공영방송을 틀었다.
막 자정을 알리는 행사가 마무리되고, 공영방송의 새해 전야제 프로그램인 ‘푸른 빛’이 막 2부를 시작하고 있었다.
“정말이네요. 이 방송 푸른 빛이죠? 저녁 9시부터 시작하는, 그 방송이요.”
“맞아. 지금은 2부 하네.”
“약간 신기하네요.”
타티아나는 이제야 조금 현실감이 드는지 눈을 빛내며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우리 경쟁 프로그램이지.”
“경쟁 프로그램이요?”
“뭐 굳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가 무대에 오르는 송년 제야 음악회도 저녁 9시부터 시작한다. 모스크바에도 푸른 빛이 방송될 때 동시에 방송되는 것이다.
굳이 시청률 같은 것을 따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콘서트 디렉터는 음악회 생방송이야말로 최고의 연말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고, 에르네스트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그는 간단하게 표현했다.
“모스크바 표준시의 사람들이 이 녹화방송보다 우리 음악회를 더 많이 보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
그런데 에르네스트의 말에 타티아나는 단순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생방송이라서 다른 시간대에 사시는 분들께 보여 드릴 수 없다는 건 조금 아쉽네요.”
“푸하하, 넌 그게 걱정이야?”
“약간은요.”
자뭇 심각하게 타티아나가 대답했고, 에르네스트는 웃음을 흘리며 스마트폰을 접었다. 그렇게 걱정할 것까진 없었다.
“괜찮아. 생방송이 방영된 후로도 크리스마스까지 휴일간 몇 번쯤 재방송될 테니까. 그사이에 보고 싶은 사람은 보겠지.”
“다행이네요.”
타티아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타티아나는 무대에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선보이고 싶어 하는 연주자의 본질과 정말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안도하는 모습도 참 타티아나답다고 생각하는 사이, 캄차카와 이곳의 시차를 생각하는지 물끄러미 시계를 보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그럼…… 저희는 6시간 남았네요.”
“응. 그렇네.”
“준비할 시간을 따지면 적어도 3시간 후에는 시작해야…….”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순간 그녀의 눈가에 스쳐 지나가는 피로함을 발견했다.
피아노를 연주할 땐 그야말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 주어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덜컥 걱정이 들었다.
“타티아나.”
“……예?”
“너 오늘 몇 시에 일어난 거야?”
에르네스트가 알기로 타티아나는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서 연습을 하는 연습광이기도 하다.
타티아나는 무심하게,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평소와 똑같아요.”
“이따가 안 피곤하겠어?”
“피곤하면 안 되죠.”
피곤하면 안 된다. 그녀는 종종 그렇게 가혹하게 느껴지는 말들을 하곤 했다.
물론 타티아나는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는 일 없이 스스로 알아서 잘 한다.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20시간 가까이 집중하는 것 정도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에르네스트는 약간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시계를 보다가 그녀에게 제안했다.
“아니면 아예 지금 여기서 조금 자 둬. 내가 늦지 않게 보고 있을 테니까.”
“……예?”
“넉넉하게 2시간쯤은 자도 될걸?”
연주는 괜찮을 것 같고, 그렇다면 조금 휴식을 취하는 것도 컨디션 관리 방법이었다.
학교가 쉬는 터라 오늘 빌린 이 연습실엔 마침 긴 의자도 있었다. 담요만 빌려오면 타티아나가 누워서 자는 것 정도는 아무 문제 없을 것 같다.
“…….”
그런데 타티아나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가, 크게 뜬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곧 심각하게 고민하는 눈초리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난 오늘 10시까지 푹 자서 괜찮다고 말하려던 에르네스트는 지금 타티아나가 이렇게 쳐다보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15초 전의 자신을 목 조르고 싶어졌다.
가만히 있으면 도저히 수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느낀 에르네스트는 간신히 한마디 더했다.
“……나가 있을까?”
그 말에 타티아나가 빵 터졌다.
“아하하하……. 아뇨,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래?”
“예.”
타티아나는 한참을 웃더니 눈가를 슥 비비며 말했다.
“그보다 에르네스트. 우리 잠깐 나가지 않으실래요.”
“어딜?”
“그냥, 밖에요.”
가볍게 말하는 타티아나는 정말 편안해 보였다. 에르네스트의 괜한 걱정을 풀어 주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손을 펼쳐 창밖을 향하며 말했다.
“한시도 낭비하지 않고 무대 준비한 생각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연주회 직전까지 연습하는 건 되레 안 좋을 것 같고, 그렇다고 해서 자는 건 시간이 아까워요.”
“…….”
“잠깐 나가서 쉬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에르네스트가 그녀에게 자는 건 어떻겠냐고 했던 건 자는 것도 무대 준비의 일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럴 필요까진 없고, 차라리 나가자고 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여태껏 같이 붙어 다니며 연습하면서도 한 번도 노는 일이 없이 바쁘게 연습하던 타티아나가 막상 음악회 당일 날 놀자고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나요?”
“좀 의외여서.”
“의외라서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지. 에르네스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 나가자.”
두 사람은 코트를 걸쳐 입고 연습실에서 나왔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은 살짝 그쳐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며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렇게까지 춥진 않았다.
“저기 가 봐요. 에르네스트.”
타티아나는 활기차게 앞장서서 에르네스트를 이끌었다. 에르네스트는 안 나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따라갔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무리와 또 한 해의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로 다양한 장식들이 거리를 수놓고 있었다. 게다가 1월 7일 크리스마스도 앞두고 있어서 크리스마스 장식과 조명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거리뿐만 아니라 건물 외벽을 죄다 조명으로 둘러놓은 곳도 있었다.
타티아나가 감탄사를 발했다.
“늘 느끼지만…… 연말이 되면 정말 온 도시를 예쁘게 해 놓는 것 같아요.”
타티아나는 작년 겨울엔 밖에 나오는 일이 별로 없었다. 크리스마스까지 이어지는 긴 휴일 동안 집 안에만 있었다고 들었다. 심지어 자기 생일도 까먹을 정도로.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너무나 즐거워하며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응. 예쁘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과 몇 시간 뒤를 앞두고 있는 음악회 일정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돌아다닐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동시에 에르네스트는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이중적인 생각을 했다.
거리는 그저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곳곳에 흥미를 끌 만한 것들도 많이 있었다.
특히나 두 사람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거리 콘서트를 위해 설치된 무대였다. 스태프로 보이는 남자들이 이 추운 날에도 티셔츠만 한 장 입고 자재들을 나르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노상 무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말고 연주회를 하는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엄청나게 많지. 클래식은 거의 없고 거의 전부 팝 음악이긴 하지만.”
“음…… 그래요? 이런 콘서트도 언젠가 한 번 와 보고 싶긴 하네요.”
클래식이 아닌 팝 음악 등엔 정말 절망적일 정도로 관심이 없는 타티아나였지만, 그녀는 딱히 팝 음악을 낮게 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관심이 없을 뿐.
하지만 막상 무대를 보니 없던 관심도 생기는 모양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데리고 이런 콘서트에 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그다음으로 발견한 건 거리 한복판에 설치된 작은 회전목마였다. 크기는 작아도 굉장히 화려해서 이목을 확 끌었다.
“올해도 회전목마를 두었네요.”
타티아나는 매년 봐도 신기하다는 듯 회전목마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도대체 길 한복판에 저걸 왜 해 놓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려다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물끄러미 회전목마를 보던 타티아나가 대뜸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타 보실래요, 에르네스트?”
“……뭐?”
“사진 찍어 드릴게요. 연말이잖아요?”
연말이지 않냐는 말만 붙이면 다 해결되는 거야? 에르네스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열다섯 살이 아니라 다섯 살 때에도 회전목마에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왜 저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고, 다니는데 방해나 되고, 그냥 싫다.
“싫어. 네가 올라가 봐.”
“멀미할 것 같아서 싫어요.”
“나도 멀미해.”
하지만 타티아나는 어림없다는 듯 받아쳤다.
“거짓말 마세요. 저번에 리처드와 내기하셨을 때 코끼리 코 스무 바퀴도 도셨잖아요.”
“아니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어서요.”
몇 번이나 말하는데 정색하고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의지력으로 움직여서 회전목마를 지키고 있는 직원에게 돈을 건네고 그 위에 올랐다.
어린애들 사이에 끼어 있자니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에르네스트는 그 모든 시선을 익숙하게 무시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 한 명의 시선만 제외하고는.
타티아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그 얼굴에 조금이라도 비웃음이 감돌고 있었다면 당장에 뛰어내릴 생각이었지만, 타티아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회전목마에서 내려온 에르네스트는 한 마디밖에 못 했다.
“타티아나. 혹시나 해서 말인데 다른 애들한테 사진 주지 마. 진짜.”
타티아나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절대로 안 줘요.”
에르네스트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