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397화 (397/1,277)

##  397화

모스크바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 아르카디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오늘 이 음악회에 섭외하도록 그가 강력히 추천했던 연주자들이 모두 월등한 퍼포먼스로 자신들의 실력을 뽐냈다.

나이도 경력도 보지 않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추천한 인선이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중에서도 예카테리나, 에르네스트, 타티아나 이 세 사람은 아르카디를 최고로 만족시켜 주었다.

“……하하.”

처음에 그는 에르네스트를 예카테리나와 듀엣으로 만들면 상당히 좋은 무대가 될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리고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어 보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자존감이 옅은 타티아나는 진짜 프로 피아니스트와 무대를 가져 보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세르히를 듀엣 파트너로 추천했었고.

하지만 그런 아르카디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는 고집대로 두 사람의 듀엣을 이루었다.

이미 회의 현장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었을 땐 아르카디가 손쓸 틈도 없어진 상황이었다.

처음엔 약간 입맛이 쓰기도 했지만 두 중앙음악학교 천재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도 하겠다, 믿고 지켜보기로 했었다.

그 결정이 이렇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주 좋아.”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직접 결정하고 선택해서 심지어 편곡까지 한 듀엣 곡은 아르카디의 예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어 정말 신선하고 훌륭한 음악성으로 그를 감격시켰다.

어리고 당돌하고 찬란한 두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음악이었다.

‘교수 생활을 오래하면서도 이렇게 즐거운 일은 드문데. 역시 오래 앉아 있고 볼 일이군. 어린 친구들은 항상 날 놀랍게 하지.’

아르카디는 평소 기대하고 있던 것들이 자신의 예상에서 빗나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가끔은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굉장히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에 새삼 흥겹기도 했다.

아르카디는 애정과 열의가 넘치는 눈빛으로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오늘 마지막으로 가장 기대하고 있는 솔로 무대가 남아 있었다.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스네야나 교수의 멘트가 끝나고, 곧 귀청이 터질 것 같은 박수와 함께 한 피아니스트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은회색 드레스로 치장한 백금발의 피아니스트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걸어와 무대 가운데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타티아나는, 피아니스트들이 으레 그렇듯 청중들보단 빨리 피아노를 마주하고 싶다는 듯 후다닥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고개를 들고 청중들을 천천히 응시하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언제 보아도 감탄이 나올 정도라, 교본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의 무대 매너다. 미하일 선생이 저런 걸 직접 가르친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다시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타티아나는 사뿐히 돌아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짧게 준비를 마치고는 가만히 건반을 내려다본다.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시작할 때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들었다. 순식간에 모든 소음이 멎었다.

그 정적 속에서 타티아나가 손을 들었다.

양손을 모아 연주하는 하나의 선율이 포르티시모로 또랑또랑하게 홀 안을 울렸다.

“…….”

이슬라메이islamey op.18

1869년 작곡된 밀리 알렉세예비치 발라키레프의 피아노 독주곡으로, 그가 카프카스 지방과 아르메니아 지방으로 여행을 갔을 때 얻어 내었던 민속음악적 선율을 기초로 하여 작곡된 곡이다.

각 지방의 색과 러시아 음악 특유의 색도 포함하고 있는 완성도 높고 아름다운 곡이지만, 이 곡은 그 모든 것을 표현해 내기 위해 연주자에게 엄청난 수준의 기교를 요구했다.

19세기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이 이 곡을 광적으로 연습하다가 오른손에 부상을 입었던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고, 지금까지도 대표적인 피아노 난곡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곡이다.

아르카디의 학생들 중엔 이슬라메이를 레퍼토리에 넣고 있는 학생들이 꽤 많았지만, 사실 상당히 부담스럽게 곡을 소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생방송으로 송출되기까지 하는 큰 무대에서 연주하라고 하면 대부분 난감해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자신 있게 이 난곡을 무대 위로 가지고 올라왔고, 부담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곧은 자세로 시원시원하게 연주해 나갔다.

‘얼마나 수준 높은지 이 정도만 들어도 알겠군.’

아르카디는 의자에 푹 늘어지면서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라메이의 첫 악절은 카프카스 지방의 선율이다. 처음은 포르테로 연주했다가 다음은 피아니시모로 대조적인 다이내믹을 보이는 것이 포인트다.

하지만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아르카디는 보다 분석하는 느낌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 첫 마디는 내림마단조로 단순한 주제를 연주하게 되어 있지만, 타티아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더욱 깊게 이 음악의 본질을 캐치하고 있었다.

바로 장단조의 개념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전통적이지만 강력한 음계, 선법의 특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현대 선법의 기준으로 보자면 에올리안 선법이라 불리는 음계다. 타티아나는 바로 그 부분을 더더욱 확실하게 끌어내어 민속음악적인 요소들을 감칠맛 나게 부각시키는 중이었다.

그 아카데믹함, 그리고 연구한 것들을 실제로 현실에 드러낼 수 있는 섬세함은 교수인 아르카디도 기겁할 지경이었다.

타티아나는 마치 지금 다루고 있는 악기가 피아노가 아니라 다른 민속 악기로 들릴 정도로 교묘하게 음색을 컨트롤하면서 곡의 첫 주제를 던지고 있었다.

바로 이런 디테일함은 피아니스트가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 중 하나였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실력은 섬세함뿐만이 아니었다.

“…….”

두 번씩 반복된 간단한 주제들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장3도와 단3도로 따라붙는 러시아식 예배 음계로 치장된, 보다 화려해진 주제가 시작되었다.

타티아나는 카프카스의 민속음악을 화성화하여 러시아의 색채를 칠한 이 환상적인 주제를 아주 매끄럽게 연주해 나갔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다시 한 번 더 주제가 반복되고, 양손으로 연달아 연주되는 건반이 바로 격렬한 선율이 되어 이 춤곡을 한껏 경쾌하게 몰아붙였다.

‘훌륭한 해석이야.’

연주하는 손은 매우 격정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음향들이 모여 이루어 내는 춤은 굉장히 우아하고 여유가 넘치는 흐름을 지니고 있었다.

긴 소매의 팔을 펼치고 흔들거리다가, 청중석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결코 급하거나 허둥거리지 않는다.

타티아나의 음악은 무척이나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한 느낌으로 무곡의 향연에 심취하게 만들었다.

“…….”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듯한 그 음색에 이리저리 놀아나는 듯한 기분을 느끼다가, 잔잔해지는 부분에서 카프카스 지방의 산맥과 호수 등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타티아나는 훨씬 화려하고 멋지게 주제를 확장시켜서 재등장시켰다.

아르카디는 몇 번이나 놀라면서도 다시 한 번 그녀의 테크닉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옥타브로 깔끔하게 음들을 표현하는 건 쉽지 않다.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가까이서 보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입이 떡 벌어지는 테크닉을 보란 듯이 퍼부어서 호화롭게 곡을 장식한 후에, 타티아나는 멋지게 이 춤곡의 마무리를 짓고는 다음 테마로 넘어갔다.

‘못하는 부분이 없어.’

이번엔 아르메니아 지방의 세레나데였다.

느릿한 안개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음형이면서도, 넓은 화음을 사용하고 있어 분명하게 뇌리에 파고든다.

민속음악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부점과 당김음이 특징적이었는데, 타티아나는 대체 얼마나 연구를 했는지 아주 절묘한 리듬으로 이 사랑 노래를 이끌어 나갔다.

중간중간 섞여서 마치 사람의 호흡처럼 느껴지는 루바토를 듣고는 정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주제는 보다 발전해서 반짝이는 아르페지오의 도움을 받아 아름답게 드러났다.

서정적인 선율이 노랫소리로 바뀌어 애절하게 울려 퍼진다. 타티아나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지 노래를 하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피아니스트는 결국 피아노로 노래를 해야 한다는 짧은 진리가 세상 피아니스트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그렇게 괴로워하는 피아니스트들에게 타티아나는 희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아르카디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음악에 빠져들었다.

“…….”

아르카디를 감동시킨 아르메니아의 테마가 지나가고 다시 카프카스의 테마가 돌아왔다. 다성음악의 교차 처리를 이렇게 물 흐르듯 해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교묘하고도 신통한 솜씨다.

깔끔하게 춤곡을 한 번 펼친 타티아나는 양 팔을 옆으로 크게 떨치고는, 스르륵 내려앉는 소맷자락이 다 떨어지기 직전, 다시 화려하게 휘둘렀다. 새하얀 소맷자락이 확 부푼다.

한순간에 엄청난 속도로 쏟아붓는 옥타브 연타. 11도 가까이 두 옥타브를 넘나들어야 하는 도약 연주.

이 엄청난 테크닉을 구사하면서도 곡의 테마와 다이내믹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음악으로 표현한다.

과연 열다섯 살이 가능한 연주인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연주이지만 눈보다 정확한 귀는 이 이슬라메이의 완성도를 거의 최상급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었다.

“……하.”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아르카디는 거의 넋을 놓고 각 패시지를 분석하며 타티아나가 얼마나 대단한 수준의 연주를 펼치고 있는지 느꼈다.

카프카스의 춤곡은 크게 선회하며 무대를 돌아 중앙으로 되돌아오더니, 열정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음표들과 함께 청중들을 데리고 하이라이트로 향한다.

코다. 악장 지시는 allegro vivo.

이슬라메이라는 이름의 이 곡의 모든 것을 함축한 마지막 음악이 시작되었다.

2/4박자로 시작되어 차근차근 뒤를 돌아보듯 발을 내딛던 타티아나는 거침없이 크게 발을 내딛고는 옥타브 글리산도로 다시 치솟았다.

듣기만 해도 끝으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흥겨운 소리. 타티아나는 들썩이는 모습으로 모두를 이끈다.

이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르카디는 알면서도,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다음 이어진 타티아나의 토카타 음향은 강렬하고 정열적이었다.

“…….”

타티아나의 양손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건반을 연타했다. 지금껏 보여 주었던 템포도 기가 막힐 정도였는데 더 빨라졌다.

격정적인 연타였다. 박자가 뭉개지는 게 당연하지 않나 싶을 정도인데 페달도 별로 쓰지 않고 그대로 선명하게 모든 것을 드러낸다. 명확한 자신감이 넘치는 연주였다.

그다음은 거의 글리산도로 들리는 속도의 옥타브 아르페지오의 장식을 받으며 마지막 주제가 펼쳐진다.

피아노 테크닉의 정수를 한껏 담고 있는 연주가 너무나 아름답게 흘러나왔다.

마지막까지 반짝이는 음표들을 흩날리듯 최고 속도로 건반들을 연주하며 내려오고, 곡의 마무리를 알리는 환상적인 화성을 크게 울리는 것으로 타티아나는 연주를 끝마쳤다.

“브라바!”

누구나 이 음악이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바로 알아보았다.

티켓값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청중들은 모자란 값을 더 내기 위해 목이 쉬고 손이 아프도록 찬사를 쏟아부었다.

아르카디는 앉았던 모습 그대로 매끄럽게 일어나서 청중석을 향해 인사하는 타티아나를 보며 할 말을 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돼.’

저 애가 왜 아직 중앙음악학교에 있는 거지.

음악원의 교수로서 아르카디는 스스로에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더 강력하게 설득하지 않고 난 대체 뭘 한 건가.

타티아나가 연주하는 이슬라메이를 듣고 나니 저런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가 중앙음악학교에 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처럼만 느껴졌다.

저 애는 보다 넓은 세상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과 많은 연주를 하며 자라날 의무가 있다.

물론 어린 학생들은 음악에만 매진할 것이 아니라 다른 상식이나 일반 교과목들을 배울 필요가 있기에 중앙음악학교라는 곳이 있지만, 열다섯 살이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일단 오늘 음악회에 추천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이슬라메이도 대단했지만 그 전에 에르네스트와 듀엣으로 연주한 마법사의 제자도 무척이나 훌륭했으니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이 타티아나를 주목하고 팬이 되어 줄 것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에르네스트는 주말에 레슨을 봐 주면서 서서히 음악원의 교육 방침으로 끌고 오려고 해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타티아나에게도 똑같은 설득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교수, 그 이전에 음악가로서 생각하며, 아르카디는 일단 연주가 끝나면 무조건 저 애를 다시 만나 봐야겠단 생각부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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