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8화
곡을 마무리 짓고 내려오자 깜짝 놀랄 정도의 박수 소리가 내가 서 있는 무대로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브라바!”
머리가 울릴 정도의 환호성에 집중력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예의를 차려 인사하고 고개를 들었다.
조명이 들어온 청중석은 검은 실루엣이 아니라 분명히 1700명이나 되는 청중들을 보여 주었다. 열광적인 찬사. 난 모두의 표정까지 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카메라들도 눈에 들어왔다. 지미집에 실린 거대한 카메라가 내 쪽을 정조준했다.
카메라 렌즈와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어색했지만, 살짝 웃어 주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내 연주를 들어 준 걸까. 가늠조차 어렵다.
“감사합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겠지만 나지막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할 수 있다면 더 감사를 표하고 싶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다. 난 마지막으로 청중들을 일견하고 대기실 쪽으로 향했다.
“타티아나!”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음악가분들이 날 맞이해 주었다. 넘치는 칭찬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한 분, 한 분 고마움을 담아서 인사하고, 마지막으로 에르네스트와 마주했다.
올해는 작곡도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라흐마니노프 같은 대가가 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내 자랑스러운 친구.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환상곡을 환상적으로 쳤다고밖에 할 말이 없네.”
“고마워요.”
난 가볍게 그의 칭찬에 답했다. 에르네스트는 킥킥 웃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나도 그 옆에 앉았다. 모니터링 화면이 보였다.
내가 막 마친 무대는 잠시 스크린이 내려온 사이 다시 마지막 연주 세팅을 하는 중이었다.
간신히 한숨 돌리고 목을 좀 축이려는데 갑자기 복도 쪽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며 스태프 한 명이 급히 들어왔다.
그가 잔뜩 흥분해선 기세 좋게 외쳤다.
“연주자분들, 이미 소식 들으셨어요?”
난데없는 소리에 율리아가 의문을 표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처음이신데요.”
모두가 쳐다보자 스태프는 약간 주눅이 들었는지 처음의 그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 시청률이요. 시청률엔 관심이 없으실지 모르겠는데 혹시나 해서 알려 드리려고…….”
“예? 관심이 왜 없어요? 시청률이 어떻게 되었는데요?”
사실 PD들이 우리 앞에 앉아서 봉을 휘두르고 있는 것도 아닌지라 눈앞에 있는 청중들을 상대로 연주를 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실황 방송이 나간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관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눈을 빛내자 스태프는 용기를 얻어 크게 외쳤다.
“우리 음악회 시청률이 지금 동시간대 푸른빛의 시청률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모두가 경악했다.
나 역시 깜짝 놀랐다. 푸른빛의 시청률을 넘어섰다고? 어떻게?
그리고 그 순간, 에르네스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모스크바 표준시의 사람들이 이 녹화방송보다 우리 음악회를 더 많이 보면 기분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이럴 거라 예상하고 말했던 거예요? 놀란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니 그는 이러쿵저러쿵하지 않고 피식 웃을 뿐이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맙소사.”
“진짜요?”
“진짜고말고요! 여기, 아예 디렉터룸에서 뽑아 왔습니다.”
스태프는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 주고 싶었는지 몇 가지 그래프가 그려져 있는 종이를 보여 주었다. 아마 시청률 추이를 나타내는 표인 것 같았다.
난 이미 북적북적한 저기까지 파고들어서 볼 생각은 들지 않아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진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모두들 현실감이 안 드는 건 똑같은 것 같았다.
“이게 말이 되나?”
“시작부터 꽤 높았는데요?”
“예. 상당히 높았죠. 하지만 푸른빛의 시청률은 잡지 못하고 약간 차이를 두고 있었는데, 자정 즈음부터 해서 올라가더니 지금 넘어섰습니다. 보통은 서서히 떨어지는 게 정상인데 저희 음악회는 시청자들의 기대감이 유독 높은 것 같다는 분석이…….”
스태프가 이러저런 설명을 해 주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우리 음악회가 텔레비전 생방송으로도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었다.
“대단한데!”
“이럴 줄은 상상도 못 했잖아요?”
“우리 콘서트 디렉터가 기분 좋겠는걸.”
그 말대로였다.
알렉세이는 우리 음악회를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꾸렸고, 또 프로그램도 우리 음악가들의 자유로운 경쟁과 선택을 최대한으로 존중하는 쪽으로 기획했다.
그렇게 조금 파격적으로 자유를 보장해 주는 데엔 분명 콘서트 디렉터로서 그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었을 테고, 그건 이 음악회의 성공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일단 티켓도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시청률도 동시간대 특집 방송을 이겼다고 하니 이만하면 훌륭한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성공이 곧 알렉세이의 성공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기쁘다.
“타티아나.”
예카테리나는 기분이 좋은지 마치 나비처럼 헤실거리며 걸어 다니다가 내 옆에 앉았다. 그녀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너무 잘됐다.”
“그러네요. 시청률이 이렇게 높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과연 몇 명이나 본 걸까요?”
“글쎄. 보자…… 퍼센트를 어디다가 곱해야 하지……? 로만!”
숫자가 나오자마자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로만을 불렀다. 아무리 로만이 수학과 출신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부를 줄은 몰라서 깜짝 놀랐다.
약간 무례한 일이 아닌가 싶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저쪽에 있던 로만은 어떻게 예카테리나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바로 와서는 그녀의 요구를 순식간에 알아듣고는 대답했다.
“모스크바 시간대에 사는 사람들의 인구 데이터와 타 지역 시청자들의 데이터가 필요하겠군요.”
“……됐어요.”
학자 같은 태도로 데이터를 내놓으라는 로만을 보며 예카테리나는 김이 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걸 또 로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있었다.
조금 황당했지만 이미 두 사람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기분 전환이 빠른 사람답게 언제 실망했냐는 듯 다시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꿈만 같네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영원하진 못할 겁니다.”
이번에도 로만이 기운이 쭉 빠지는 말을 했다. 난 이제 예카테리나가 너무한 건지 로만이 너무한 건지 판별할 수가 없어졌다.
로만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떴다.
“제가 할 수 있는 계산을 러프하게 해 보겠습니다. 지구만 따져 보더라도 인류 문명은 1만 년 정도밖에 안 되었고 그건 지구 전체의 나이를 따져 보면 0.0002% 정도밖에 안 됩니다.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이라고 본다면 0.2초 정도의 찰나의 순간이죠. 모든 건 순간에 지나가는 겁니다.”
예카테리나를 화나게 하려는 건가……?
그냥 기쁘다는 관용어를 이렇게 굳이 모든 건 순간일 뿐이라고 짚어 주는 건 어떻게 보면 좀 잔혹하기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카테리나의 표정이 심각했다. 어이가 없어서 무시하려나 싶더니, 너무 기분이 상했는지 급기야 한 마디 하려는 듯한 태세다.
난 지금이라도 로만의 입을 틀어막고 예카테리나를 달래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로만이 하고 싶어 했던 말들은 지금부터였다.
“하지만 전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가 이 행성에서 스쳐 지나가지 않고 서로 만나서 이렇게 함께 음악을 공유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짧기에 아름다운 기적이죠. 기적의 순간을 함께 체험하고 있어서 기쁘네요. 예카테리나,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우리는 아까 시청률로 푸른빛을 꺾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 놀라서 로만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였다.
“…….”
난 조금 감동했다.
그간 막연하게 기적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로만의 말을 통해 더 구체적이고 또렷하게 와닿았다.
순간을 사는 사람들과 그 속에서도 순간의 음악을 하는 음악가들.
우리들이 하는 건 로만이 보는 것처럼 긴 기준으로 보면 그저 짧은 순간 반짝하고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걸고 싶어질 정도로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카테리나는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멍하니 로만을 바라보더니 주섬주섬 말을 꺼냈다.
“……로만 일부러 생각하고 막 그런 말 하는 거예요?”
“무슨 생각 말입니까?”
“아뇨, 됐어요…….”
이번엔 아까와 조금 어감이 다른 어투였다. 예카테리나가 로만에 대해 오해를 조금 하고 있었다면, 이번에 완전히 풀어졌으리라 확신했다.
갑자기 뭔가 먹고 싶어졌다면서 예카테리나가 로만을 끌고 가 버리고, 난 에르네스트와 남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에르네스트였다.
“타티아나. 너도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이젠 연주 끝났으니까.”
오늘 컨디션 관리를 하느라 별로 안 먹긴 했지만 허기가 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목이 조금 마를 뿐이었다.
난 괜찮다고 하고 물이나 마시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가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연주에 쏟아 낸 집중이 깨지고 나자 피로가 온몸에 몰려들고 있었다.
난 아직도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에르네스트에게 부탁했다.
“저기…… 그럼 따뜻한 디카페인 차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알았어.”
에르네스트는 바로 일어나서 차를 끓이러 갔다.
나는 멍하니 앉아서 천천히 손을 마사지했다. 무리가 조금 가긴 했어도 큰 문제는 아닌지 금방 괜찮아졌다.
팔을 들어 보았다. 피아노를 칠 땐 그토록 가벼웠었는데 지금은 그냥 들어 올리는 것조차 무거웠다.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정말 모든 힘을 다 써 버린 기분이다. 하지만 이렇게 총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연주를 잘 마쳤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 이 곡은 내가 지금 허락받은, 끌어낼 수 있는 피아니즘의 총체라 할 수 있는 곡이었다.
테크닉도 음악성도 다시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던 내가 2년이 안 되는 동안 이루어 낸 음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을지 모를 이 상황에서 내가 지금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바로 직전에 연주했던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 저번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던 훔멜 피아노 협주곡 2번,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날 무대로 이끌고 또 연주자로서 있을 수 있게 해 주었던 곡들, 내가 다시 얻어 낸 곡들이다.
그동안 방황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해서 이루어 낸 이 음악들이, 나는 사실 꽤 마음에 든다.
꼭 힘들고 어렵게 얻어 내야만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건 내 것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아하하.”
구세프 선생님의 지도가 옳았다.
약속으로 날 묶어 두고 음악학교의 학생으로 처음부터 키워 나가려 하신 구세프 선생님의 방식은 미하일 선생님의 수준 높은 지도와 합쳐져 불과 1년 만에 날 여기까지 올려놓았다.
이런 큰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건 모두 선생님들 덕분이다.
“…….”
물론 그사이 잃어버린 곡들도 많다.
쇼팽의 마주르카나 소나타 등, 몇 마디 편린들로 희끄무레하게 떠다니는 것들이 참기 힘들어져서 꽁꽁 묶어 아련한 기억 깊은 곳 어딘가에 묻어 두었던 곡들.
이제 와서 내 혼자 힘으론 도저히 찾기 어렵게 된 곡들.
구세프 선생님은 2년 후엔 한 곡이라도 되찾도록 도와주시겠노라 약속하셨고 난 그 약속을 맹세처럼 믿고 있지만, 사실 지금 내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은 조금 변질되어 있었다.
어쩌면 많이.
적어도 2년간은, 선생님들이 날 가르치는 걸 그만두지 않으시겠지.
내가 학교를 떠나지 않고, 구세프 선생님이 약속을 잊지 않는 한 앞으로도 2년은 지도를 받을 수 있겠지.
처음엔 하루라도 더 줄이고 싶었던 3년짜리 약속은, 이제 약간 다른 의미로 내게 중요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 역할은 지금 이렇게 현실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정제와 비슷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점이 거꾸로 날 안도하게 했다.
“후후…….”
구세프 선생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시고 내가 애원을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강철 같은 기준을 지니셨다.
오늘 연주를 꽤 잘하긴 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분은 이 정도로 약속 기한을 앞당겨 주거나 하실 분은 절대 아니었다. 더 혼내고 더 가르쳐 주시겠지. 레슨을 받을 생각에 벌써부터 즐겁다.
난 천천히, 조금 더 천천히 손가락을 스트레칭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