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00화 (400/1,277)

##  400화

에르네스트를 봐 온 세월이 5년이었다.

아르카디는 그사이 이 어린 천재의 성격을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스승인 구세프를 닮았는지 황소고집에, 그러면서도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정중하고 고상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르네스트는 음악을 위해서라면 정말 무엇이든지 하는 과감함과 자신감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스스로의 뜻을 밝혔다.

“저 이번 학기부터 작곡을 부전공처럼 배우려고 합니다.”

“……뭐?”

“그리고 음악원은 작곡과로 갈 예정입니다.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늦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작곡과?”

“예.”

물 흐르듯 나오는 대답에 천하의 구세프가 입을 떡 벌리고 멍한 소리만을 내뱉었다.

아르카디도 지금 충격으로 제대로 된 생각이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구세프는 훨씬 더 심한 듯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선생과 교수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고도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지금 아르카디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정말 대단하다는 감탄이었다.

열다섯 살의 나이에 저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심지어 자기 지도 선생과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를 앞에 두고.

구세프는 거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처럼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유황 불꽃이 뿜어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그 목소리는 건조하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게 신년 각오냐?”

“앞으로 음악가 인생의 각오이기도 하고요.”

“…….”

그 누구라도 학생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말문이 막히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구세프는 에르네스트의 이런 고집스러움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닌지 바로 공격에 나섰다.

“작곡과에 가서, 작곡을 배워 뭘 할 참이냐? 영화음악이라도 쓰려고?”

클래식 음악이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지금, 작곡가들은 무슨 곡을 쓰든 클래식 음악을 쓸 수 없었다. 200년 전에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하는 것이 기본이던 흐름은 어느새 바뀌어서 이미 완성된 음악들을 반복해 연주하는 것만이 규칙처럼 세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걸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똑바로 말했다.

“아뇨, 피아노 소나타와 협주곡을 써서 러시아 클래식 음악을 다시 되살릴 겁니다.”

선생도 교수도 미처 엄두도 못 낼 포부.

코웃음이 먼저 나오고, 그게 얼마나 어린 치기인지 상세히 현실을 말해 주어야 하는데.

아르카디는 자기 나이의 1/3도 안 되는 어린 학생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길이야말로 에르네스트 같은 천재가 걸어야 하는 길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구세프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골방에 처박혀서 곡 쓸 게냐? 그 피아노 실력은 녹슬게 두고?”

하지만 이번에도 에르네스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녹슬 일 없어요. 연주회도 할 거거든요. 19세기에도 다 그러고 살았는데, 마차 타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지금 못할 건 어디 있나 생각이 드네요.”

당대 거의 모든 음악가들이 그러했다.

마차를 타고 유럽을 여행하고, 곡을 쓰고, 연주회를 열고. 그렇게 살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면서도 일평생 수백 곡을 작곡해 남긴다.

에르네스트의 말대로 교통수단이 훨씬 편리해지고 작곡 테크닉도 훨씬 다양해진 지금은 그렇게 못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마지막 이유로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작곡을 배워야 피아노를 더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피아노라는 악기에 더 깊게 파고들고 싶다는 욕구가 음악의 근원까지 손을 뻗게 만들었다.

그런 것이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

한동안 침묵하던 구세프가 손으로 코트 앞섶을 더듬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기가 콘서트홀만 아니었으면 당장 담배를 꺼내 물었을 법한 태도였다.

구세프는 깊게 들어간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 같긴 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긴 하…….”

“그 말이 아니다. 네가 지금 작곡도 피아노를 위해 배우겠다고 하는 말투, 누구랑 닮았는지 알긴 하나?”

짜증스럽게 팍 쏘자 에르네스트가 이번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구세프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는 듯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방향성이 틀리진 않았지. 네가 작곡에도 재능이 있다면, 작곡도 배우는 게 맞아.”

그렇게 바로 인정하는가 싶더니, 손을 뻗어 에르네스트를 가리킨다.

“문제는 할 수 있느냐 없느냐지.”

구세프가 철저하게 신뢰하는 에르네스트라는 음악가는 바로 피아니스트로서의 에르네스트였다. 그는 아직 작곡가 에르네스트를 모른다.

때문에 알아가려면 시험이 필요하다.

“에르네스트. 난 네가 할 수 있는 음악을 안다. 그 무엇도 아닌 네 곡을 작곡해 와라. 형식 불문. 그 곡이 괜찮다면 작곡을 배워도 좋다. 엉망이라면 재능이 없는 거니까 피아노나 치고.”

“……알겠습니다.”

작곡을 배우고 싶다는데 작곡을 해 오라는, 말도 안 되는 시험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군말 없이 응했다.

아르카디는 구세프가 정말 진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당장 곡을 쓰라고 해도 쓸 수 있어야 한다. 정말 천재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아르카디 교수님.”

그렇게 구세프와의 이야기가 시험으로 일단락되고, 에르네스트가 아르카디를 돌아보았다.

아르카디는 할 말이 참 많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약간의 허탈함.

5년이나 봐 온 아이라서 어차피 내 품으로 올 내 학생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물론 레슨 몇 번 봐 줬다고 해서 내가 저 천재의 미래를 저당 잡아 놓았다고 할 순 없었다. 그건 정말 웃기는 소리였다.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예상을 한참이나 앞질러 나가는 진짜 천재였고, 또 그런 천재가 적어도 무슨 생각으로 음악원에 진학하지 않고 있었는지는 알았으니까.

여러 생각으로 복잡한 아르카디를 보며 에르네스트가 정중히 말했다.

“너무 늦게 진로를 정해서 죄송합니다.”

“…….”

에르네스트 역시 약간은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르카디는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학생이 교수에게 느껴야 할 빚 따윈 없다.

“아뇨, 늦었다고 하긴 조금 그렇군요. 에르네스트는 이제 열다섯 살이니까.”

“하지만 교수님에겐 죄송한 마음이 많습니다.”

“괜찮아요.”

아르카디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절대 에르네스트가 부담감 따위를 가지는 일 없도록 웃으며 말했다.

“피아노에만 국한시켰던 제 소견도 좁았던 거죠. 그만큼이나 훨씬 더 다채롭게 음악을 접하고 배워 나가려고 학생 스스로가 결정했다면, 전 언제나 환영입니다. 응원합니다. 에르네스트.”

“감사합니다.”

“혹시 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에 올 수 있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종종 레슨은 봐 줄 수 있겠군요.”

그 말에 에르네스트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어쩌면 레슨 받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르카디는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했다.

“…….”

타티아나는 이 엄청난 대화가 오가는 와중 한 마디도 않고 듣고 있었다.

그녀 역시 무언가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아르카디는 온화하게 웃으며 물었다.

“타티아나는 알고 있었나요?”

“……예.”

그럼 대체 내 말이 얼마나 웃기게 들렸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타티아나가 참 바르게 대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티아나도…… 너무 늦었다고 제가 계속 재촉한 모양새였는데, 천천히 생각하고 결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군요. 맞아요?”

“그렇지도 않아요.”

이번에도 겸양인지, 아니면 정말 아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아르카디는 잘 모른다. 하지만 더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르카디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폈다.

“하하, 아무튼 알겠습니다. 앞으론 그런 일 없도록 하죠. 그냥…… 믿고 지켜보겠습니다. 에르네스트도 타티아나도.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 주시고요.”

두 사람의 듀엣 연주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자신의 기획을 깼을 땐 약간 실망했지만, 예상대로 되지 않고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그 예상 이상의 훌륭한 연주를 해냈을 때 아르카디는 희열과 유쾌함을 느꼈었다.

지금 역시 그랬다. 이 두 사람들은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아르카디를 놀랍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르카디는 즐겁게 기다리기로 했다.

“아, 혹시나 해서 말인데 활동은 많이 하세요. 그건 천재들의 의무니까.”

하지만 가급적이면 많이, 자주 보고 싶었다.

***

아르카디 교수님이 손을 흔들며 떠나고, 미하일 선생님과 구세프 선생님. 그리고 나와 에르네스트가 남았다.

선생님들은 말씀이 없으시고, 에르네스트도 쓸데없이 웃거나 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가 던진 폭탄선언은 아직도 그 여파를 남겨 놓고 있었다.

모두가 복잡한 생각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구세프 선생님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던져 넣었다.

“올해가 참 재미있는 한 해가 되겠군.”

에르네스트의 일을 생각하면 분명 그렇다. 제대로 시험을 통과한다면 작곡을 배울 테고, 구세프 선생님은 에르네스트가 제대로 피아노와 작곡 모두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실 테니까.

올해 말에 에르네스트가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상상도 안 간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엉뚱한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

갑자기 내 이름을 왜 부르시지?

난 멍한 표정으로 구세프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선생님이 말했다.

“내가 아까 네게 말했었지. 다음에 레슨실에서 줄 게 있다고.”

“아…… 그러셨지요.”

“사실 난 다음에 볼 때까지도 고민을 해서, 그때까지도 결심이 안 서면 그냥 선물이나 사서 네게 줄 생각이었다.”

“……예?”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안 갔다.

구세프 선생님이 저렇게까지 고민하실 일이라고?

어안이 벙벙해져서 되묻자 구세프 선생님이 팔짱을 끼며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군.”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듯한 어투였다. 그렇게 단호한 어투로 무언가에 매듭을 짓곤, 다시 날 내려다본다.

“약속 기억하나?”

“……!”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이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3년간 얌전히 있으면 내 과거 음악 중 한 곡 정도는 되찾게 도와주겠다고, 구세프 선생님이 날 묶어 둔 약속.

그때는 끔찍했고 싫었지만, 이젠 그 약속만 믿고 있으면 현실에 충실할 수 있으니 내가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안정제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도 했다. 난 분명히 그러한 자각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은 2년이 코앞에 훅 내던져졌다.

“원래는 3년을 약속했었지만 이제 1년이 조금 지났지. 하지만 난 네가 잘 한다면 남은 기간을 조금 줄여 줄 수도 있다고 했었고.”

구세프 선생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킨다.

“네가 잘 해서, 줄여 줄 생각이다.”

그리고 아주 엄격한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신다.

“전부 다.”

난 이런 상황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갑자기 머리가 빙빙 도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레슨 시간에? 바로?

“선생님, 잠시만요. 너무 갑작스럽…….”

“뭐냐? 좋아할 줄 알았건만.”

“그게…….”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약간 당혹스러웠다.

곡을 찾고 싶은 건 당연했다.

해야 한다. 그건 확실했다. 난 여전히 쇼팽의 몇몇 곡들을 제대로 연주할 수 없다.

이렇게 조금만 깊게 보면 엉망인 내가, 언젠가 짐작도 못 한 어느 날 완전히 무너져 버리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무섭다.

한 곡의 이름을 받는다고 해서 되찾을 수 있을지도 사실 미지수였고, 새로 쌓아올린 탑 밑에 깔려 있는 곡을 끄집어내기 위해선 날마다 다시 스스로를 부숴야 하는 나날이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내 모든 신경은 현실을 지키는 데에만 쏠려 있었고 구세프 선생님과의 약속이라는 안정제에 안주해 있는 상태였다.

갑자기 다시 묻혀 있는 곡을 찾아 어두운 미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듣자 덜컥 겁부터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잘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전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

“미숙? 그 정도의 이슬라메이를 연주해 놓고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저렇게 거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매달렸는데?”

구세프 선생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잘라 말했다.

“잘 생각해 봐라, 타티아나. 넌 지난 1년 동안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학교 자선 연주회의 주역으로 서고,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해내고, 심지어 송년 제야 음악회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 주었다.”

“…….”

“대체 내가 네게 뭘 더 하라고 해야 하는 게냐?”

선생님은 객관적으로 날 평가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난 네게 미숙하거나 모자라다 할 생각이 없다. 넌 자격을 갖춘 피아니스트야.”

내가 구세프 선생님으로부터 이렇게까지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연주가 구세프 선생님의 마지막 기준점을 건드렸다는 건 확실했다.

선생님은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르카디는 학생들을 구속하지 않았지. 난 그가 구속하는 스타일이라고 오해했었지만…… 지금 보면 그건 내 쪽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구속이라고 표현된 관계는 그리 좋게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약속으로 구속된 시간을 편안히 여기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이 나약함. 피아노 연주자로서 강해진 만큼, 난 굉장히 나약해져 있었다.

“넌 이제 괜찮아졌지.”

“…….”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해 주마. 해 봐라. 그리고 그 후는 네 자유다.”

마지막으로 구세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걸 바라지 않았나?”

여러 생각이 든다.

그간 피아노 연주자로서 다시 활동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해 왔지만 사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멋대로 외면해 오지 않았나.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생각하며 안일하게 굴지 않았나.

확실한 건,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흐를수록 난 더 나약해졌으리란 거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말로 다시 한 번 도전해 볼 마지막 여력이 남은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없고, 불안하지만.

난 천천히 고개를 들고 구세프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바라…… 왔어요.”

구세프 선생님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피식 웃었다. 난 그 미소에서 염려와 믿음 등 많은 것들을 읽어냈다.

홀로 어두운 미궁을 맨손으로 헤집고 다니는 일이라도, 내 뒤에서 불빛을 비춰 줄 사람들이 있다.

저번과는 또 다른 한 해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콘서트홀 밖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은 하얗게 물들었다.

- 모스크바의 여명 1부 完 -

< 모스크바의 여명 2부 # 황장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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