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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454화 (454/1,277)

##  454화

검은 새가 지저귀고 있다.

고개를 든 나는 이게 늘 내가 꾸던 꿈의 세계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이번엔 손에 색연필도 쥐여져 있지 않았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가, 검은 새와 눈이 마주쳤다. 한참 높은 곳에 있던 새는 고개를 옆으로 기웃거리더니 날개를 홰쳤다.

잘 모르겠지만, 난 새가 약간 어처구니없어한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런 새의 행동에 난 죄책감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뭘 하려고 하더라도 이렇게 멀리서 올려다보는 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 새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이리 오시겠어요.”

내 입으로 말해 놓고도 기가 막혔다. 내가 기르는 새도 아니고, 지금은 불만도 꽤나 많아 보이는데 이런 식으로 불러 봐야 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과 달리 검은 새는 잠깐 고민하는 것처럼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날개를 펼치곤 순식간에 휙 날아들었다.

깜짝 놀랐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컸다. 그리고 발톱도 날카롭고 부리도 뾰족했다. 저 새가 날 공격하려 한다면 난 크게 다칠게 분명했다.

그러나 검은 새는 내 앞에서 속도를 줄이곤 가볍게 팔 위에 앉았다. 발로 팔을 꽉 쥐고 있는데도 피부에서 피가 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

팔 위에 앉은 검은 새는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그 커다란 눈과 마주하자 새의 감정을 조금 더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새도 내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을까?

그렇게 나와 새는 잠시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머리카락이 눈가에 스쳤다.

난 이렇게 작고 약한 몸인데, 이 애는 왜 더 작은 새인 걸까.

팔을 살짝 당기며, 나지막이 물었다.

“왜 저였나요?”

언제나 그렇듯 검은 새는 대답이 없었다. 난 그게 늘 짜증스럽고 답답했는데, 지금은 괜찮았다.

한참 동안이나 난 검은 새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또 내린 눈은 소복이 쌓여 세상을 하얗게 만들었다. 아나스타샤는 턱을 괴고 창밖으로 하얀 풍경을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시시껄렁한 메시지들. 아나스타샤는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멍하니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보다가, 그녀는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어디 가?”

옆자리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어서 아나스타샤 쪽엔 신경도 쓰지 않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발렌티나가 툭 던지듯 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슥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짧게 답했다.

“병문안.”

“…….”

발렌티나는 스마트폰을 내리곤 고개를 돌렸다. 원래 거기엔 항상 있어야 할 친구가, 지금은 없었다.

타티아나는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감기 등으로 아파서 못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걱정도 안 하고 오늘 병문안도 갈 필요 없을 것이다. 바로 어제 갔다 왔으니 감기 정도로 연달아 병문안을 가는 것도 실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상태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발렌티나가 중얼거렸다.

“의사가 괜찮다고 했었잖아?”

“눈을 못 떴는데 뭐가 괜찮은 건데?”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날카롭게 대꾸하자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타티아나는 일주일 전 위클리 연주회 후 뒤풀이를 하던 연습실에서 연주를 하고는 기절했다. 그러고는 오늘까지 쭉 일어나지 못했다.

어제 찾아가 봤을 때 보았던 타티아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고요히 잠든 모습은 마치 곧바로 일어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혀 왔다.

“…….”

곧 일어나겠지. 방금 발렌티나가 말한 것처럼 의사들도 괜찮다고 했었고……. 심지어 루슬란에게 들은 바로는 타티아나는 중앙음악학교에 편입 오기 전에 이미 반년 넘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괜찮을 거라고 말하는 루슬란의 얼굴을 보기가 얼마나 죄스러웠는지, 아나스타샤는 생각만 해도 괴로웠다.

그래도 매일 찾아가 보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여 오늘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아나스타샤.”

하지만 발렌티나는 그녀의 도리는 따로 있다는 것처럼 차분히 말했다.

“네 마음은 알겠어. 그런데…… 콩쿠르 얼마 안 남지 않았어?”

“얼마 안 남았지.”

“그럼 연습해야지.”

“할 거야.”

할 거고, 오늘도 했었다. 아나스타샤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제대로 피아노에 쏟고 있었다.

대신 타티아나에게 가 보는 시간은 무조건 빼 놓아야 할 뿐이다.

발렌티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타티아나는 네가 찾아오는 것보단 연습실에 가길 바랄걸.”

“…….”

“그 애가 피아노를 대하는 태도는 신을 대하는 것과 닮아 있어. 불신자는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말은 정확했다. 만약 타티아나가 일어나 있다면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나스타샤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할 게 분명했다. 아마 이런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연습에 힘쓰라 하겠지.

하지만 언제는 내가 그 애의 말을 잘 들었던가? 아나스타샤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발렌티나. 내가 그런 것도 모른다고 생각해?”

발렌티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나스타샤는 친구에게 짜증을 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는 속으로 반성했다.

지금 그녀는 스스로에게 짜증이 나 있었다.

일주일 전, 타티아나가 마지막 연주를 끝마쳤을 때, 연주 직후 그녀가 찾아온 자리는 바로 아나스타샤의 옆자리였다. 스스로 쓰러질 장소를 고르듯 그 자리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의지로 잠깐 눈을 붙이겠다고 했었다.

가장 화가 나는 건 그때 타티아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연주 전에도 피곤하다는 모습을 보였던 것 때문에 정말 피곤해서 졸음을 참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잠깐이나마 졸 수 있도록 손대지 않고 30분 정도 내버려 두었다.

그렇지만 그 후로 타티아나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후회했다. 30분 동안 내버려 둘 일이 아니라 곧바로 병원에 데리고 갔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눈치채지 못했지만, 적어도 바로 옆에 있는 아나스타샤는 알았어야 했다. 타티아나가 믿고 몸을 의탁했을 때, 아나스타샤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가 했었던 연주에만 감탄하고 신경이 팔려 있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끔찍한 목소리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때…….”

“아나스타샤.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었잖아.”

“…….”

발렌티나는 조금 더 강하게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조용한 침묵이 흐르고, 결국 발렌티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르네스트도, 리처드도. 다른 애들도 다 연습하러 갔어. 타티아나가 우리 반으로 돌아오지 않을 리 없다고 하면서.”

그리고 그녀는 기가 막히다는 듯 덧붙였다.

“심지어 한승우는 뭐랬는지 알아? 그 애가 깨어나면 아마 우리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올라 있을 테니 지금 자리를 비운 틈에 조금이라도 연습해 둬야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다고 했어.”

“미쳤네, 승우 한.”

“그래, 안 그래도 그 애가…….”

막 맞장구를 치려던 발렌티나는 말을 하다가 말고 웅얼거렸다. 아나스타샤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것처럼, 한승우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도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그녀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싶어 했다.

“안 그래도 내가 혼쭐을 내 주고 왔지!”

발렌티나는 경쾌하게 말하며 허공에 주먹을 휙휙 휘두르기까지 했다. 설마 때리기라도 했니? 어차피 그 덩치에 네 주먹을 맞더라도 아프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다른 친구들은 모두 강하게 처신하고 있는 것 같다. 매정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 가장 불안에 떠는 이유는 뭘까. 믿음이 없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타티아나가 이 학교에 오기 전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심각한 기억상실에 걸렸었다는 걸 친구들 중 아나스타샤만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랬었다면, 지금 또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타티아나가 그간의 모든 추억을 잃고 그저 피아노에 대한 기억만 가지고 다시 눈을 뜬다면…… 아나스타샤는 그래도 상관없이 그 애의 친구가 되어 줄 테지만, 타티아나가 어떻게 생각할진 자신할 수 없었다.

“…….”

“그러니까…….”

“…….”

“에휴.”

생각에 빠진 아나스타샤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던 발렌티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연습할 생각이 안 드네. 오늘은 그럼 같이 가자.”

“어딜?”

“뭐가 어디야? 병문안 간다며.”

지금까지 말렸던 건 뭐야? 아나스타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발렌티나가 쏘아붙였다.

“나라고 그 애가 걱정되지 않는 줄 알아?”

“……미안해.”

아나스타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 약한 모습을 본 발렌티나는 다시 한 번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곧장 택시를 잡았다. 베르체노프가로 가 달라는 말에 택시 기사가 깜짝 놀라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겪은 일이라 이젠 당황스럽지도 않다.

“…….”

아나스타샤는 창문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았다.

막 내린 눈 때문에 도로는 엉망이었고 차들은 거의 기어가고 있었다. 빨리 좀 가 줬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서야 두 사람은 저택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문 옆의 벨을 누르니 카메라가 빙 돌아 두 사람을 확인하고는 곧장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십여 분 정도 걸으면 커다란 저택이 보인다.

아나스타샤는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깨를 떨었다. 돌아다니는 고용인들의 표정엔 아무런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마치 얼음처럼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보다 훨씬 따뜻하고 활발했었던 분위기를 떠올리니 가슴이 옥죄이듯 아팠다.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는 조심스레 복도를 걸어 타티아나의 방문 앞에 다다랐다.

그곳엔 새카만 그림자가 서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인기척을 내자 그림자가 스르륵 돌며 목소리를 냈다.

“매일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나스타샤 양.”

“아니에요, 빅토르.”

“오늘은 발렌티나 양도 오셨군요.”

“네. 타티아나는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빅토르는 소리를 내지 않고 방문을 열었고, 세 사람은 그 안으로 들어섰다.

“…….”

타티아나의 방은 언제나처럼 황량했다. 책상도 침대도 옷장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어울리는 묘한 느낌의 방.

하지만 이곳에 놓인 침대 위에는 타티아나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다가가서 타티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며칠은 이러저런 병원 장비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유리 아저씨의 명령으로 전부 치워 버렸다고 한다.

아나스타샤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지시였지만 이전에 타티아나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도 그녀는 지금처럼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방에서 홀로 있다가 깨어났었다고 한다.

왜 타티아나는 큰 병원에 입원해 있지 않고 이런 방에 누워 있는 걸까.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타티아나가 정신이 있더라도 아마 병원보다는 이 방을 원할 것 같았다. 이 애는 그런 애였다.

가만히 타티아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뒤편에서 빅토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에르네스트 군도 왔었는데, 같이 오시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예? 그 애가 왔었어요? 언제요?”

“방금 전에 돌아갔습니다. 5분 정도 짧게 있다 간 것 같군요.”

아나스타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어이가 없었다. 올 거면 같이 오지, 왜 혼자 와?

하지만 굳이 한꺼번에 같이 와야 한다는 법도 없었고, 5분 정도라면 정말 그냥 잠깐 들렀다 간 것뿐일 수도 있었다.

왠지 모를 짜증이 났지만 아나스타샤는 꾹꾹 눌러 참으며 중얼거렸다.

“걔도 참 성격 희한해…… 그래서 타티아나 얼굴만 보고 간 거예요?”

“예. 슬슬 일어날 때가 되었다고 하긴 했습니다.”

“슬슬? 그걸 걔가 어떻게 아는데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보자보자 하니 정말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지금 이 저택의 사람들이 타티아나의 상태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면서도 그런 말이 쉽게 나와? 나중에 심하게 한 소리 해야 할 것 같다.

좋게 좀 봐주려 하면 가끔 이렇게 사람 미치게 하고, 아무튼 에르네스트에 대해선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냥 그런 애는 생각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타티아나에게나 신경을 쏟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점심 식사를 하던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깨어났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는 곧장 식사를 그만두고 반으로 달려가 가방을 들고 뛰쳐나왔고, 그 뒤로 같은 메시지를 받은 친구들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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