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5화
자도 자도 졸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난 늘 잠을 깊게 자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연습이나 공부 등에 시간을 투자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만에 정말 기분 좋은 졸음이 쏟아졌고, 난 거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대충 잘 만큼 잤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마 해가 중천에 떠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 보니 이상했다. 왜 당연하다는 듯 해가 중천에 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눈뜰 생각이 안 드는 거지. 학교는? 그냥 지각할 수밖에 없나?
아니, 잠깐만…… 생각이 이상하게 마구 꼬이는 것 같은데.
이상하다…… 이상하다……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떴다.
“……으.”
몸에 아무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난 간신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확인했다. 맙소사, 정말로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찬란한 햇살이 얇은 커튼을 넘어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비췄다.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다가 꿈틀거리며 팔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스마트폰으로 찾는 동작이었는데,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어디 갔어? 내 스마트폰?
“……?”
비몽사몽인 가운데에서도 신경질이 나서 상체를 일으켰다. 귀찮네…… 난 그리고 침대 옆의 선반 위에 스마트폰이 올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난 그것을 집어 들고도 한참이나 돌려보았다. 이거 내 거 맞나? 왜 이렇게 어색하게 생겼지.
잘 모르겠지만 내 방에 있으니까 내 거겠지.
일단 화면을 켜 봤다. 하지만 한 번에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가만 보니 전원이 아예 꺼져 있었다.
이러니까 알람도 울지 않고 지금 이 시간까지 잘 수밖에 없지. 난 알람이 울어도 원래 잘 일어나지 못하는…… 아니지, 새벽 3시면 자동으로 눈이 떠져야 하는데.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마트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금요일 11시. 확실하게 망했다. 날짜는 3월 1일.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어제 며칠이었지? 그리고 년도는……
왜 3년이나 시간이 안 맞지?
멍청하게 앉아 있는데, 갑자기 두통이 엄습해 왔다.
“아윽…….”
머리가 깨어질 것 같았다. 난 옆머리를 짚으며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폭신한 베개가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흡수해 주면 좋겠지만, 당연히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고통은 그런 식으로 줄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이 상황을 이해해야 했다. 난 그렇게 확신하고는 뒷머리가 찌를 듯 아파 오는데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애썼다.
“…….”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돌아다녔다.
코시기나 거리의 주소, 전화번호, 몇몇 사람의 이름과 얼굴들, 비밀번호,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 비명 소리, 우울하게 혼자 앉아 있었던 시간들. 노랫소리.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던 나는 이 기억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알 수 없었던, 14년간의 기억이었다.
“왜…….”
베개가 젖어들어 갔다. 난 중얼거리며 머리를 더 깊게 파묻었다.
일어나기 직전까지 꿈속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생각났다. 검은 새와 바라보고 있었던 시간은 고요했지만 생각보다 즐거웠다. 늘 악몽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은 사실 악몽이 아니었다.
난 검은 새가 황당해한다는 걸 알았고, 또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새가 한 걸음 더 물러서 주었다는 걸 느꼈다.
한 걸음 뒤엔 검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내가 한 거야?
결국 내가 이 애를……
“…….”
죽고 싶을 정도의 죄책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주먹은 곧 스르르 풀렸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서로 간에 뭘 원했고, 어떤 생각이었고, 또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내 마음에 가득 찬 감정은 분노나 원망 등이 아니라 포근한 감사와 안도감이었다.
“아…….”
고개를 들었다. 난 여전히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지만, 이전처럼 불안감에 떨지 않았다.
잠깐 긴장을 푸니 오래된 습관처럼 몸이 기우뚱하니 늘어졌다. 난 신경 써서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약간,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바로 앉은 채로 난 상념에 잠겼다. 너무 복잡한 것들이 많아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리도 없이 방문이 열리더니 빅토르가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매너가 없네?
그렇게 예의도 없이 들어온 빅토르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그대로 몇 초간 굳었다.
숙련된 경호원인 그를 눈빛만으로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즐거워졌다. 난 생긋 웃으며 인사를 전했다.
“안녕, 빅토르.”
“아, 아…… 아, 아가씨?”
빅토르는 말까지 더듬었다. 난 약간 샐쭉해졌다. 지금 일주일 넘게 기절해 있었으니 순수하게 기뻐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난, 한참이나 지나서야 위화감을 느꼈다.
나 지금 빅토르에게 평대한 거야?
“어…… 많이 놀라셨나요?”
거꾸로 당황해서 이번엔 경어로 물었다.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 보니 난 한참이나 어릴 적에도 빅토르를 편하게 부르곤 했었다. 그때의 습관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았다.
물론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겠나 싶지만…… 그래도 난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을 갑자기 모조리 바꿔 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녀 또한 그런 걸 바라지 않았고.
“그…….”
빅토르는 여전히 평정심을 찾지 못했는지 허둥지둥했다.
“놀라…… 아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당장 유리 님과 루슬란 님을 불러 올…….”
“아뇨, 그러지 마시고. 잠깐 제 옆에 와 주시겠어요.”
“……예?”
“여기요.”
난 그의 말을 끊고 침대 옆을 팡팡 쳤다. 빅토르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 그는 프로답게 진정하고는 내 말대로 옆에 와 앉았다.
“…….”
잠시 말없이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빅토르 이바노비치 키셀로프. 내 기억들의 교집합에 존재하는 이름 중 하나였다.
올해로 7년째 내 곁을 지켜 주고 있는 고마운 사람.
난 조용히 그 이름을 불렀다.
“빅토르.”
“예, 아가씨.”
“미안해요. 정말로.”
나도 모르게 나온 건 사과였다.
빅토르는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내가 왜 이러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무슨 말입니까? 갑자기.”
그는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와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시치미를 뚝 뗐다. 하지만 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몇 번이나 걱정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어기고, 약속하고 어기고…… 빅토르도 지겹죠. 저 같은 애를 맡아서 피곤하고.”
“아닙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미안해요.”
다시 한 번 사과하니 빅토르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마 내가 쓰러진 일로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그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가 일어나기만을 바랐을 사람.
그렇다면 전해 줄 말은 사과뿐만이 아니다. 난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해 주고 싶었어요. 그간 쭉.”
“……늘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건 당연한 거고요.”
내가 피식 웃자 빅토르가 약간 의아해했다. 눈치 빠르게도 뭔가 묘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낀 모양이다.
그는 약간 더 내 쪽으로 돌아앉으며 물었다.
“아가씨……?”
“저기, 있잖아요. 모두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러니 아버지와 루슬란을 불러 주시겠어요? 미안하지만 부탁이에요.”
“그…… 알겠습니다.”
빅토르는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내 부탁에 두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난 다시 혼자 남아선 아직 엉망진창인 머릿속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이번에도 그냥 루슬란이라고 불러 버렸다.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겨우 30분 정도 기다렸을 뿐인데 복도에서 바쁜 발소리가 들리더니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니, 노크를 하는 분이 없으시네?
하지만 각각 직장과 학교에 있었을 분들이 이렇게 빨리 와 주셨는데 불평을 할 순 없었다. 난 작게 미소를 지었다.
루슬란 오빠가 급히 다가왔다.
“타티아나!”
“오빠.”
“내가 누군지 알겠어?”
세상에, 얼마나 마음이 급한지 모르겠다. 다짜고짜 저렇게 물어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루슬란 오빠의 목소리엔 나름대로 절박함이 실려 있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을 두 번 겪긴 싫다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난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루슬란 오빠와 공유하는 그간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갔던 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여행했던 일…… 그리고 그 전으로 가면 소리를 지르고 싸웠던 일.
어두운 추억과 행복했던 추억들이 어지럽게 섞였다. 난 그것들을 똑바로 받아들이는 게 헷갈렸지만, 현실을 마주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난 걱정할 필요 없다는 뜻으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하하, 제 오빠 얼굴도 못 알아볼 것 같나요?”
말이 끝나자마자 루슬란 오빠는 날 와락 끌어안았다. 아직 난 환자라서 몸을 가누기 힘든데, 이렇게 졸라 버리면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바로 놓아 달라고 할 순 없어서 참을 수 있는 만큼 참았다가 투덜거렸다.
“숨 막혀요.”
“일어날 줄 알았어.”
이 사람, 이러다 울겠다. 난 고마우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라서 이만 놓아 달라고 요청했다.
루슬란 오빠는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 팔팔해요.”
“팔팔……? 그럼 왜 못 일어났던 건데?”
약간 기이하다는 듯 오빠가 물었다. 하지만 나한테 물은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지어 난 눈을 떠서 날짜를 확인하기 전까지 그냥 하룻밤 정도 푹 잔 걸로 인식하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해 줄 순 없다. 그렇지만 뒤섞이는 기억들과 그간 알게 된 것들, 그리고 직감적으로 파악한 부분들을 종합해서 천천히 이야기했다.
“글쎄요…… 뱀들은 먹이를 삼키고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있으면서 소화시킨다고 들었어요.”
“뱀……?”
“네.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키려면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하겠죠?”
굳이 누군가를 뱀이나 코끼리에 비유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쩐지 바로 생각나는 게 어린왕자였다.
생경한 기억을 자연스럽게 꺼내어 이야기하는 감각은 상당히 기묘했다. 그래도 크게 불쾌하거나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아마 2년 전 눈을 떴을 때 곧바로 기억이 섞였다면 지금처럼 태연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수년의 시간차와 기억의 혼동. 이런 건 그냥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피아노를 고집할 수도 없었을 테고,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지도 못했겠지.
지금도 혼란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충분한 시간을 거쳐 새로운 기억을 쌓고 숙고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그때, 뒤편에서 가만히 계시던 아버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린왕자…… 네가 좋아하던 동화책이었지.”
“예. 맞아요.”
“타티아나.”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아버지의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기억이 돌아왔구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경악했다. 루슬란 오빠와 빅토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나를 바라보다가 서로를 바라보기에 이르렀고, 그 뒤에 있던 고용인분들도 입을 가리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 그래요.”
난 가볍게 대답했다. 아버지의 표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런 상황을 마주치지라 예상하시고 계셨던 것 같았다.
아버지와의 추억도 많았다. 연주회 때마다 와 주시고, 한 번은 마카로프 프로듀서를 전화로 혼내 주시기도 했고, 늘 열심히 해서 내가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길 바란다고 응원하고 지원해 주셨다.
그리고 조금 더 옛날로 가면 그보다 엄격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 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자선 연주회 때 아버지 앞에서 맹세했던 것을 깨뜨릴 생각은 없었다.
갑자기 가족이 되어 준 아버지이지만,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에게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다.
약간은 어깨의 긴장을 풀어 놓고, 난 조금 더 편안한 미소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