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6화
그렇게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곡을 손에 쥐고 무대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꼭 이 곡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속에 약간 불안한 기분이 잠들어 있었는데, 미하일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 기분도 깔끔하게 날아갔다.
최선을 다해 준비한 다음 무대에서 보이고 세상의 평가를 받을 생각이다. 사실 연주자란 늘 이런 도전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아직 경력이 일천한 내가 도전만 했다간 텅텅 빈 홀에서 혼자 연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론 큰 기둥이 되어 줄 메인 곡들이 필요했다.
“방금 그 곡은 2부 중간쯤에 연주해도 괜찮을 것 같고…… 그보다 다른 곡들은 정해 놓은 게 있는지 궁금하구나. 타티아나.”
그런데 난 선생님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없어요…….”
에르네스트가 준 곡에 신경이 팔린 나머지 독주회 프로그램에 대해선 생각해 놓은 게 없었다.
연주자로서 이건 조금 잘못된 태도가 아닐까 싶어 시선을 피하고 있자, 미하일 선생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앞으로 차차 정하면 되겠지……. 하지만 시간이 그리 많진 않다. 알지?”
“예. 모두 동시에 진행해 봐야 할 것 같아요.”
2부 정도로 나누어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지 계획을 짜고 그와 동시에 날짜를 정하고 홀을 대관하고 티켓 판매까지 생각해야 한다. 난 아직 에이전시가 없기 때문에 여러모로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구해야 할 것 같았다.
선생님 역시 그리 생각하시는지 차분하게 일정을 정해 주셨다.
“그렇다면…… 다음 레슨 시간까지 무대에 올릴 곡들은 추려서 가지고 오너라.”
“넉넉하게 준비해 올게요.”
“나도 그때까지 연주회 시기를 적당히 알아봐 올 테니…… 그럼 그때 이야기하자꾸나.”
“예, 선생님.”
이제 3월 중순이니 앞으로 몇 주 정도 곡을 정하고 준비를 한다면 5월이나 6월 즈음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땐 학교 기말시험 기간이기도 했다. 학교생활도 생각한다면 아예 앞당기거나 조금 늦춰서 방학 즈음을 생각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손가락을 꼽아 보고 있자 선생님이 넌지시 날 불렀다.
“타티아나.”
“예……?”
손가락을 쥔 채로 고개를 들었다. 미하일 선생님의 얼굴이 날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넌…… 아니, 너희는. 내 기대보다도 앞서나가는구나. 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선생님이 손사래를 쳤다.
“칭찬으로 들으면 된단다.”
“아…… 감사합니다.”
“그래…… 가 보렴.”
나만큼이나 선생님께서도 생각이 많으신 것 같아 보인다.
난 다음 레슨 시간에 뵙겠다고 인사를 드리곤 외투를 걸쳐 입고 레슨실 밖으로 나왔다.
“…….”
복도에 서서 옆을 보니 다른 학생들도 몇 명 있었다. 각자 일로 바빠 보인다. 모두들 어제의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연주자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인 아이들이다.
저 애들이 보기에 나도 그렇게 보일까?
나도 저렇게 하고 있는 걸까?
난 침체되지 않고 하루하루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도달한 끝에 뭐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또 이런 생각.”
난 머리를 도리질하며 막 차오른 생각들을 날려 버렸다.
당장 앞에 놓인 것들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이다. 난 이 집중력을 놓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미하일 선생님에게 허락도 받아 낸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곧장 스마트폰을 들고 메시지를 입력했다.
[에르네스트. 지금 학교라면 혹시 볼 수 있나요?]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니었고, 레슨이 없더라도 혼자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는 그의 생활 패턴상 지금은 학교에 있을 확률이 꽤 높았다.
그런데 의외의 답장이 날아왔다.
[아니. 집이야.]
학생이 이 시간에 학교에 있어야지 왜 집이냐고 물어보자니 느낌이 이상해서 답장하지 못하고 있는데, 연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무슨 일이야?]
그냥 메시지로 말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중요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예의일 것 같은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놀래라…….”
내가 아무 답장도 않고 가만히 있자 에르네스트가 궁금했는지 전화를 걸어 왔다.
마침 잘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메시지보단 전화가 낫겠지.
난 전화벨이 두어 번 울리는 짧은 순간에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에르네스트.”
- 말이 없길래 전화했어. 왜?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부터 물어보지만 난 곧장 답해 주지 않고 유연하게 화두를 틀었다.
“음…… 이야기할 게 있는데, 직접 보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 나 오늘 레슨 없어서 집에 일찍 왔는데.
“급한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개인적인 사정이 있나 싶었지만, 에르네스트의 대답은 정말 음악가다웠다.
- 아니, 곡 쓰고 있어.
“아…….”
- 그런데 지금 중요하게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꼭 봐야 한다면 내가 다시 학교로 갈까?
말은 중요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난 그가 요즈음 작곡 공부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잘 안다. 필요 이상으로 방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진 마세요. 괜찮아요.”
- 직접 봐야 한다며?
“전화로 말해도 되겠죠.”
- ?
에르네스트는 지금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난 살짝 웃으며 천천히 이야기했다.
“저 이번에 독주회를 하려고 해요. 작게.”
전화 너머로도 놀란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 빠르게 내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 그것도 좋지. 작년엔 바빴지만 올해는 지금 1분기가 다 지나가도록 별 활동을 못 하고 있었으니까.
난 해가 바뀌고 지금까지 쭉 과거의 곡에 매달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걸 전부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내가 슬슬 움직여 주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말 잘되었다는 듯 활기차게 이야기했다.
- 콩쿠르 준비는 애매하고…… 독주회 괜찮네. 상반기엔 그렇게 하고 하반기엔 합주도 한 번 해. 어때?”
“어…… 하반기엔 내년 콩쿠르 준비를 하려고 해요.”
- 길게 잡네. 그것도 괜찮고.
연주회를 더 해도 좋고 콩쿠르 준비를 해도 좋고. 그냥 뭐든 간에 다 좋다는 태도다. 난 그 반응이 조금 재미있어서 쿡쿡 웃었다.
내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에르네스트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피식하는 웃음소리를 담아 말했다.
- 그래서, 뭘 도와주면 될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바보같이 대꾸했다.
“무엇을요……?”
- 그것 때문에 이야기 시작한 거 아니었나.
에르네스트는 내가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독주회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틀리진 않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도와줄 건 없었다.
난 이번에 할 독주회에서 그가 허락해 주어야 할 부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냥 하나만 승낙해 주시면 되어요.”
- 뭔데?
“저번에 주신 곡 있잖아요? 그 곡을 제가 초연해도 될까요.”
- ……뭐?
에르네스트가 멀거니 되묻더니 순간 말이 없어졌다. 많이 놀란 모양이다. 이럴 것 같아서 조금 더 천천히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그가 말했다.
- 왜 만나자고 했는지 알겠네.
“놀라셨나요?”
- 어…… 약간. 앙코르로 하겠다고?
“아뇨, 메인 프로그램에 넣을 생각이에요.”
놀라는 건 놀라는 것이지만 난 지금 하는 이야기를 장난처럼 하는 게 아니었다.
곡에 대한 내 평가는 나름대로 내린 상태였고 미하일 선생님에게 확인도 받았다. 굳이 초연을 앙코르로 뺄 이유가 전혀 없었다.
- 전혀 타협이 없네.
에르네스트는 킥킥거렸다. 난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을까요?”
- 괜찮냐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듯 그렇게 다시 되묻더니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그 곡은 아직 안 되니까 연주하지 말거나 아니면 앙코르로 살그머니 빼자고 할 줄 알았어?
그럴 리 없다.
이 곡을 읽어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감을 가지고 음악을 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연주자이면서도 작곡가 역시 지망했던 건 자신 있어 하는 곡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게 넘겨줬을 때도 그는 단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음악을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어도 언제나 당당할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그도 살짝 기대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 사실 조금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그 곡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연주할지.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말이 없더라고.
그랬었나……?
기억을 돌이켜 보니 지난 며칠간 이 곡을 연습하면서도 에르네스트에게 어떠했는지 말해 준 적은 없었다.
어느 정도 완성시켜서 미하일 선생님에게 보이고 초연을 할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내가 알아서 악보를 읽고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에르네스트에게 최소한의 짧은 평 정도는 해 줬어야 하는 게 옳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런데 바로 지금 최고의 찬사를 보내 줬네. 타티아나.
곡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어떻게 여기고 있는진 충분히 전해진 듯하다.
그가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 초연을 맡아 주겠다고 해 줘서 고마워.
“그…… 좋은 곡을 받은 제가 감사하죠.”
- 사실 나름대로 자신은 있었지만, 그게 정말 좋은 곡이 된 건 네 덕분이야.
헌정받은 내가 무대에서 연주하지 않고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더라면 에르네스트도 지금처럼 자신 있게 말하진 못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난 그가 작곡가로서 시작한 첫 단추를 제대로 된 자리에 꿰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약간 들뜨면서도 무거운 책임감이 다시 한 번 자리한다. 이 곡을 믿고, 또 연주자로서 내 안목과 실력을 믿기에 독주회 프로그램으로 밀어붙일 생각이지만…… 잘하지 못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걱정이 든 나와 달리 에르네스트는 한결 편안해진 어투로 이야기했다.
- 그러니 마음대로 해.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 설령 망치더라도 잘못은 모두 그 곡을 쓴 내게 돌리면 되니까 부담 가질 것도 없고. 안 그래?
아마 초연에 실패한다면 화살은 나보단 에르네스트 쪽으로 조금 더 많이 향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처음 나오는 곡이니까.
하지만 난 그런 결과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도박을 하듯 무대에 서려는 게 아니다.
보다 뚜렷한 확신과 믿음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에르네스트는 내 단호함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 내가 직접 초연하는 것보다 더 안심되네.
“……정말이신가요?”
- 응.
에르네스트가 내 계획을 듣고 최고의 찬사라고 말해 준 것처럼, 나 역시 작곡가인 에르네스트가 저런 말을 해 주는 것이 연주자로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 생각했다.
안심하는 그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정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잠시간의 적막. 전화기 너머로 무언가 툭툭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에르네스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아무튼…… 미하일 선생님 허락 구하는 게 또 난관이겠네. 아마 쉽게 허락해 주시진 않을 텐데.
“허락은 이미 받았어요.”
- ……뭐라고? 어떻게?
“연습해 와서 연주했지요.”
에르네스트는 지금까지도 여러 번 놀랐지만 이번에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 정말 빠르네. 타티아나…… 그런데 이제 겨우 며칠 지났다고 그걸 선생님 앞에서 연주했어? 어설프게 준비해서 하진 않았을 것 아냐?
“당연하죠.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어요.”
- 그래도 시간이…… 그게 그렇게 쉬운 곡이 아닐 텐데.
“할 만하던걸요?”
- 오…… 그래?
에르네스트는 무언가 자극받은 듯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난 백여 년 전 있었던 일화를 떠올렸다.
당시 가장 어려운 피아노 독주곡 중 하나였던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를 듣고 라벨은 더 어려운 곡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작곡을 하기도 했다.
기교적으로 어려운 곡을 쓰고 싶다는 생각 또한 작곡가에겐 강렬한 동기가 되어 준다.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여기서 더 어렵게 작곡하면 정말 못 치게 될 것 같아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