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7화
수백, 수천 번 연습했던 곡이 손에 달라붙어 자연스레 건반 위로 손가락을 인도했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감은 채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곡을 연주하고는 손을 멈추며 동시에 눈을 떴다.
“…….”
콩쿠르 준비는 마무리되었다.
곡의 완성도는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놓았다. 여기에서 더 연습을 한다고 해도 테크닉적으로 좋아질 부분은 없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 이끌어 낼 수 있는 디테일과 음악성들이 여전히 남아 있음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건 단기간에 끄집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지금은 여기에서 더더욱 단단하게 굳혀서 콩쿠르 회장에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번 콩쿠르에서 아나스타샤는 반드시 입상할 생각이었다.
다시 한 번 더 손에 맺혀 있는 음악들을 되새긴 아나스타샤는 주먹을 꼭 쥐어 그것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놓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어디니?]
메시지를 보내니 엉뚱한 답장이 날아왔다.
[어디신가요?]
타티아나는 종종 이런 식으로 답장하곤 했다. 아나스타샤는 입가에 웃음을 매달고 지금 있는 장소를 적어 보냈다.
[늘 있는 연습실.]
[제가 갈게요.]
건반 덮개를 덮고, 의자 아래로 다리를 흔들거리며 잠시 기다리자 곧 빠른 구두 소리와 함께 연습실 문이 반쯤 열렸다.
타티아나가 열린 문 너머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나스타샤?”
“응.”
아나스타샤는 손을 흔들었다. 타티아나가 환하게 웃으며 연습실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연습은 일찍 마치셨네요?”
“응. 내일은 가야 하니까.”
“음…… 그랬죠.”
문가에 선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의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나스타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일은 콩쿠르 건으로 해외로 출국하는 날이다. 타티아나에게 거기까진 말해 두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며칠간 학교에서 사라져버리는 건 말도 안 되니까.
이것도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잘 안다.
이미 날짜를 알려 준 것이니 타티아나가 마음먹고 국제 청소년 콩쿠르들을 모조리 조사한다면 모레 아나스타샤가 참가할 콩쿠르의 이름을 찾아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렇게 찾아내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에게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잔잔한 눈으로 바라봐 주고 있을 뿐이다.
친구로서 관심이 없어서가 아닌, 존중하고 신뢰하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타티아나의 진지하고 착실한 태도가 늘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저 애는 어떻게 저런 차분한 태도를 할 수 있는 걸까.
기억을 잃었을 때에도 저랬었지. 타티아나는 늘 참을성 있게 존중하는 모습으로 있어 준다. 그리고 그 모습은 기억을 되찾은 지금도 여전했다.
묘한 기분으로 타티아나와 마주하고 있자 그녀가 어색한 분위기는 싫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실 건가요?”
“글쎄, 어떻게 할까.”
“스터디룸에 가 보죠. 어때요?”
“그러지 뭐.”
연습도 이만할 생각이었고, 뭘 하든 상관없었다.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계속 바빴었는데 출국을 앞둔 지금이 가장 여유롭다는 게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연습실을 나섰다. 타티아나가 살짝 앞서 걸었다. 아나스타샤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또각거리는 타티아나의 뒷모습을 말없이 좇았다.
앞서가던 타티아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가 제대로 거기에 있는지 확인하는 듯한 눈빛이다.
“…….”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웃는다. 복도 창문을 통해 비치는 햇빛이 타티아나를 아스라이 비추었다.
아나스타샤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타티아나의 팔을 끌어안았다. 한참이나 큰 아나스타샤가 장난스레 달라붙자 타티아나가 휘청거리면서도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은 복잡한 이야기 없이도 웃으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복도를 거닐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자 스터디룸까진 금방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막 타티아나에게 무어라 대답을 하면서 문을 열었다. 거기엔 에르네스트가 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살짝 놀랐다. 종종 스터디룸에 오더니 근래 또 잘 오지 않던 에르네스트가 이렇게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다른 애들은?”
“몰라.”
에르네스트가 짧게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는 반응이다.
아나스타샤는 그 시큰둥한 반응에 약간 안도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저 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단 기분이 든다.
공책에 무언가 쓰고 있는 에르네스트에게 아나스타샤가 다가가 물었다.
“뭐 해?”
“곡 써.”
정말 간결한 대답. 그래도 공책만 보고 있지 말고 이쪽도 좀 봐 주었으면 좋겠는데.
아나스타샤는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다시 말을 걸었다.
“열심히 하네.”
“내가 하겠다고 한 거니까…… 그런데 아나스타샤, 너 왜 아직도 학교에 있는 건데?”
그제야 고개를 든 에르네스트의 첫마디는 뒤편에 있던 타티아나를 새파랗게 질리게 할 정도였다.
아나스타샤도 황당해져서 물었다.
“……뭐라고?”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태연하게 펜을 휙 돌리며 마저 물었다.
“콩쿠르 때문에 내일 출국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오늘 오후엔 준비하는 줄 알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굳이 할 일도 없으면서 학교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꼭 말을 그렇게 해야 했어? 아나스타샤는 조금 기분이 상해서 신랄하게 말했다.
“아, 그래 괜히 왔네. 미안, 꺼져 줄게.”
“그럴 필욘 없고.”
장난치는 건지, 아니면 모든 반응을 예상하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에르네스트는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테이블 위를 펜으로 툭툭 쳤다.
“기왕 왔으니까 이야기나 좀 하다가 가. 준비할 것도 별로 없잖아? 어차피 혼자 휙 갔다 휙 올 거면서.”
“내가 혼자 가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럴 생각 아니었어?”
지금까지 한 마디 한 마디 전부 완전히 놀아나는 기분이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바로 긍정하기 싫어서 입을 다물고 에르네스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번엔 타티아나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아나스타샤, 부모님은요?”
“……그냥 나 혼자 갔다 오겠다고 했어.”
“…….”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다. 국내도 아니고, 해외에서 하는 콩쿠르에 보호자도 없이 혼자 참가한다는 게 타티아나 입장에선 걱정되어 죽을 지경인 모양이다.
열여섯 살쯤 되면 그 정돈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타티아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가능하다면 따라가도 되냐고 묻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평일에 학교를 쉬면서 다른 친구의 콩쿠르를 따라가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나스타샤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괜찮아. 한참이나 어릴 때도 그랬었으니까.”
“어릴 때요……?”
“어, 음…… 그때가 몇 살이었지. 기억이 잘 안 나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나스타샤가 처음 혼자서 콩쿠르에 참가했던 건 열두 살 때 일이다. 저 애가 듣는다면 기겁할지도 모르겠다.
말을 하다가 말고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는 알고 있는 내용이 많다. 아나스타샤는 그가 쓸데없는 소리라도 하려고 하면 당장 뒤에서 목을 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뭘 그렇게 보냐는 듯 마주 인상을 쓰더니 아예 고개를 돌려 다시 공책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타티아나에게 말했다.
“아무튼 걱정할 필요 없어. 주말에 돌아올게.”
“……예.”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것 같지만 그래도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여 준다.
만약 반대 입장이었어도 이렇게 선선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물론 타티아나는 늘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다니니까 세상 어디를 가든 큰 문제는 없겠지만……. 만약 정말 아무도 없이 홀로 나다니는 생각을 하니,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심정이 이렇겠구나 싶어졌다.
하지만 이젠 그런 생각도 굉장한 실례였다. 타티아나는 잃었던 기억들을 모두 되찾은 상태였고 이젠 상식이 많이 부족하던 그때의 그 애가 아니었다. 똑같은 나이의 친구일 뿐이다.
아나스타샤가 예전 타티아나를 보던 시선으로 자꾸만 바라보고 대하려 한다면, 결국 어느 순간 타티아나가 참지 못하게 될 순간이 오고 말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런 순간이 오면 낫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참을성이 강한 편이라 끝끝내 싫은 내색 않고 받아 줄지도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상황이 오는 건 절대 원치 않았다.
기억을 되찾은 것 때문에 바뀌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존중하고 싶었다.
타티아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늘 그러했던 것처럼.
“…….”
그렇게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에르네스트가 펜을 내려놓곤 공책을 덮어 버렸다.
“그럼 우리 건배나 할까.”
“건배요?”
“아나스타샤의 성공적인 콩쿠르를 위한 건배.”
지금까진 콩쿠르 준비를 하든 변호사 시험 준비를 하든 관심 없다는 듯 굴던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니 조금 어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에르네스트는 처음부터 이렇게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았다. 그저 솔직하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을 뿐이지.
거기에 맞춰 아나스타샤는 솔직하게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한 번 더 비틀어 장난을 쳐야 할지 궁리하고 있는데, 타티아나는 순수한 의문을 표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사 오면 되지. 누가 사는 걸로 할까.”
“어떻게 정하면 될까요?”
당연한 듯이 에르네스트가 내기를 제안했고, 타티아나는 피하지 않았다.
평소 하는 내기엔 그 종류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타티아나는 보통 실력이 필요한 내기에 상당히 약한 편이었다. 기억과 함께 운동 신경 등도 돌아오지 않았을까 살짝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온 후에도 여전했다.
때문에 내기는 순전히 운을 따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에르네스트는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책을 들었다. 그리고 그 책을 덮어 놓은 채로 무작위로 한 페이지를 골라 나오는 숫자에 가장 가까운 숫자를 뽑은 사람을 당첨자로 정하기로 했다. 물론 당첨자가 사 오는 내기였다.
페이지를 고르는 사람이 유리한지 아닌지에 대해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사이에서 또 한바탕 설전이 오갔고, 결국 가장 공정할 것 같은 타티아나가 책 한복판에 무작위로 지폐를 한 장 꽂아 넣고, 지폐의 앞면이 바라보는 쪽으로 모든 걸 정하기로 했다.
타티아나가 책 사이에 지폐를 밀어 넣었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에르네스트가 가장 먼저 숫자를 말했다.
“난 중간 값인 5.”
“그럼 난 6.”
“전…… 1로 할게요.”
숫자 3이 나오지 않는 이상 한 번에 승패가 정해지는 상황이 되었다.
아나스타샤가 천천히 책을 펼쳤다. 그리고 결과를 발표했다.
“1이네.”
어떻게 이렇게 딱 걸릴 수가 있지.
타티아나는 실력이 필요한 내기에 약하지만 그렇다고 운이 강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기를 하면 안 된다. 이 애는.
하지만 승부를 피하지 않고 결과에 승복함을 미덕으로 아는 타티아나는 이번에도 신념대로 임했고, 몇 번이나 겪었던 상황을 다시 맞이했다.
“……사 올게요.”
“같이 갈까?”
“아녜요. 저 혼자 갈래요…….”
별말 않고 일어섰지만 역시 조금 시무룩해져 있는 게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막 나가려는 타티아나를 그래도 뒤따라가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디까지 애처럼 대하면 안 되는지 확실하게 정해진 건 없지만, 일단 지금은 따라가지 않는 게 답인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도 괜히 나서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대신 그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가끔 보면 저 애가 일부러 걸려 주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어.”
“이걸 어떻게 일부러 걸리니?”
“그러니까 신기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책을 팔락팔락 넘겼다.
그러던 그는 무심한 투로 말했다.
“아나스타샤. 미국 콩쿠르는 너한테 유리할지도 모르겠네.”
“……?”
언제 알아본 거야?
아나스타샤가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마주 보더니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