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5화
금요일 오후. 여느 때와 같이 나는 별관 연습실에서 피아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주일을 마무리하는 날이지만 연습 중인 곡은 어느 선에서 깔끔하게 매듭지어지는 일이 없었다. 조금 나아지나 싶으면 다시 제자리를 맴돈다. 그럴 때면 난 참고할 만한 음반 등을 듣곤 한다.
하지만 아직 제목이 없는 에르네스트의 곡은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도 없이 홀로 연구해야만 했다.
“……음.”
보다 신경을 집중해서 다시 곡을 연주해 보고, 한 악장만 다시 연주해 보고, 그다음은 한 프레이즈…… 종국엔 음 하나만을 쿡쿡 찍어 보며 음색을 확인한다.
무언가 놓치고 있다.
악보를 근거로 한 기초는 감을 잡았다. 곡 전반의 배경이 되는 테마와 흐름을 이끄는 분위기는 틀리지 않았다. 난 이 곡에서 읽어 낸 해석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보다 세부적인 뉘앙스와 디테일은 아직 살려 내지 못했다. 주어진 곡의 깊이에 비해 실현해 낸 연주의 완성도가 뒤떨어진다는 것 정도는 연주자의 본능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난 초연이라고 해서 부족한 곡을 올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빈 공백을 찾아 연습을 계속했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건반을 누르며 연속해서 더 깊게 파고든다. 원하는 느낌이 날 때까지.
메트로놈은 켜지 않았지만 난 지금의 템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4분의 4박자 아다지오. 1분에 정확하게 60번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속도다. 그렇게 1시간이면 3600번 연습할 수 있……
“타티아나.”
“윽.”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템포를 놓쳤다. 고개를 드니 루슬란 오빠가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직접 말하진 않지만 조금 걱정하는 눈빛이다.
내가 음색에 관해 연구할 때면 인간 메트로놈이 된 것처럼 군다는 걸 오빠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같이 피아노를 연구하는 아나스타샤도 내 연습을 보면 가끔 질겁하곤 할 정도니 오빠가 보기엔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알 만했다.
“네 연습을 방해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차라도 한 잔 마시고 하라고 부르지 않으면 저녁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을 것 같아서.”
정말 많이 참았다가 이야기한다는 게 느껴졌다. 난 허리를 펴고 손을 내렸다. 연습은 잠시 쉬어야겠다.
“그렇네요. 불러 주셔서 고마워요.”
연습실에 있는 포트기에 물을 올렸다. 테이블엔 이미 다과 등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차만 끓여 오면 티타임을 즐길 준비가 모두 완료된다.
루슬란 오빠는 차를 마시면서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다. 내 연습을 잠시 멈추게 하려는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차만 마시고 갈 생각은 없어 보인다.
“…….”
그런데 난 좀처럼 오빠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연습하던 피아노 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아른거렸다. 대화가 잘 안 되고 자꾸만 정신이 멍해진다.
오빠는 몇 번 정도 나와 이야기를 해 보려 하더니 지금 내가 차를 마시면서도 피아노에 신경이 온통 쏠려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실없이 웃었다.
“지금도 머릿속으로 연주 중인 거야?”
“……제가 멍하니 있었나요?”
“계속. 연습이 쉽지 않나 봐?”
난 미안함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이란 언제나 어려웠다.
난 연주자로서 그 어려운 음악을 손에 쥐고 내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고, 심지어 이 음악은 몇 주 후에 있을 독주회 무대에 올려야 하기까지 했다.
시간은 많지 않고 갈 길은 아직 멀게 느껴진다. 적어도 이 음색만큼은 확실히 잡고 갔으면 좋겠는데…… 기간 내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연주자로서 나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지금 무언가 놓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무엇인진 잘 모르겠어요. 제가 느끼기로는 조금 더 투명하고 차가운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은데…….”
“그림?”
“예. 눈 내린 벌판…… 차가운 북풍. 그런 이미지예요. 그런데 도무지 마음에 드는 색이 나오질 않네요. 알록달록한 색보다 흰색이 훨씬 더 만들기 어려운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약간은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오빠에게 이런 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그냥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언어로 만들어서 내뱉는다는 것 자체가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조금 도움이 되기도 했다.
조용히 들어 주는 오빠에게 두서없이 여러 이미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난 결국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정말 시베리아에 한번 가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가 보면 되잖아.”
“……예?”
그냥 체념하듯 한 이야기였는데 루슬란 오빠는 태연하게 답했다.
바보처럼 되묻자 오빠가 손가락을 들어 위로 빙글 돌렸다.
“저번에 오케스트라와 연주회 했을 때도 노르웨이에 갔다 왔었잖아?”
작년 겨울에 있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이야기였다. 우린 그때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었는데, 실제로 노르웨이에 가서 그곳의 풍경과 분위기를 직접 느껴 본 것은 곡의 퀄리티를 끌어 올리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되어 주었다.
오빠는 이번에도 똑같이 하면 되잖냐는 투였다. 이번엔 오케스트라 없이 혼자 완성하면 되니 더 쉬운 일이기도 하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하지만, 난 오빠가 말하기 전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가 보면 되겠네. 야쿠츠크는 어때?”
“야쿠츠크요?”
“전 세계에서 가장 추운 곳이지.”
갑자기 마음이 동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춥다고?
기억 속 어느 부분을 뒤져 보아도 시베리아 쪽에 가 본 기억은 없었다. 막연히 떠오르는 이미지들로 곡을 구상하고 있는데…… 직접 가서 본다면 여기서 훨씬 더 현실감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지금 연구 중인 음색도 더 나아지지 않을까?
“가 봐도 될까요?”
“주말에 갔다 오지 뭐.”
오빠는 집 근처 공원에 갔다 오자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점점 동조되어서 주말 동안에 휙 갔다 오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빠의 말에서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잠시만요,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오빠도 같이 가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럼 시베리아에 너 혼자 보내? 아버지가 날 죽이려고 할걸.”
시베리아에 보낸다고 하니까 뭔가 조금 무섭게 들리기도 했다. 물론 내가 혼자 움직여도 빅토르가 따라붙어 주겠지만 오빠는 그것도 내가 혼자 움직이는 거라 여기는 것 같았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연구 활동의 일환이었으니 혼자 가는 편이 아무래도 조금 더 낫겠지만, 난 딱히 이러쿵저러쿵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 하루 갔다 오늘 걸로 괜찮을까요?”
“갔다 오는 시간 때문에 이틀은 필요할 거야. 아버지에겐 내가 말해 놓을게.”
“고마워요.”
잠깐 미뤄졌던 연습은 아마 주말간 쭉 미뤄 두게 될 것 같다.
***
앞서 걷던 빅토르가 전화를 받더니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가씨, 베르너 위넬입니다. 연주회 건인 것 같은데, 지금 받으시겠습니까?”
“예. 주세요.”
안 받을 이유도 없었다. 난 전화를 건네받아 말했다.
“타티아나입니다. 위넬.”
- 주말인데 일 이야기로 미안합니다. 타티아나.
베르너는 그렇게 사과부터 해 왔다. 하지만 난 주말이 아니라 새벽 2시라도 연주회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상관없었다.
“연주회 이야기는 일 이야기가 아니에요. 아무 때나 괜찮아요.”
- 하하하핫,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는 유쾌하게 웃더니 이러저런 진행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티켓 이야기는 저번에 미하일 선생님에게 들었던 그대로였고, 포스터가 나왔으니 메일로 확인해 달라고도 했다.
사진을 찍을 때 워낙 정신없이 스타일링하고 찍었던지라 뭘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날 정도인데, 제대로 나왔을지 걱정이었다.
포스터가 어쨌건 연주자로서 무대에 올릴 프로그램에나 집중하면 되겠지만, 아무래도 티켓 파워가 부족하니만큼 조금은 신경이 쓰인다. 안 그래도 홀도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큰 걸 빌려 놨는데.
베르너는 내가 홀 사이즈 같은 건 전혀 신경 안 쓴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나도 사람이다. 객석이 텅텅 비어 있지 않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쨌든 베르너는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연주만 잘 해낸다면 모든 것이 완벽하리라 믿는 사람이었다.
- 아, 타티아나. 이번 연주회에서 초연하실 새 곡 있잖습니까?
살짝 긴장된다.
그 곡에 대해선 사실 검증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초연도 하지 않은 곡을 다른 피아니스트들에게 들려줄 수도 없고, 어디까지나 무대에서 처음 선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베르너는 주요 관계자로서 들어 봐야 한다 생각해서 연주를 녹음해 보내 줬었는데,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난 숨도 못 쉬고 조용히 베르너의 말을 기다렸다.
- 그대로면 될 것 같습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작은 한숨이 전화 너머로도 들린 모양이다. 베르너가 웃으며 말했다.
- 녹음본을 저만 듣기 아쉬워서 이번에 지부장 마틸다에게 들려 드렸습니다. 평이 아주 좋더군요.
“그랬나요?”
- 연주회까지 이 정도 연주 퀄리티만 유지하면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음, 제목은 없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냥 소나타 1번으로 나와도 전혀 문제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의 말도 옳았다. 세상 모든 음악에 이름을 지을 필요는 없었다. 음악이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
하지만 이 곡은 사정이 있어서 그냥 소나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난 베르너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작곡가가 부탁을 한지라 제목은 제가 책임져야만 해요.”
- 아…… 그런 거였습니까?
“예, 되도록 이곳에서 지어 갈 수 있다면 좋겠는데…….”
- 이곳이라 하심은……. 타티아나, 모스크바에 계신 것 아닙니까?
난 고개를 돌렸다.
눈 덮인 벌판. 나무도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새하얀 풍경이 눈에 가득 찬다.
“야쿠츠크예요.”
- ……갑자기 거긴 왜?
“시베리아가 보고 싶어서…….”
말하고 보니 이게 무슨 소리가 싶다. 난데없이 주말에 시베리아가 보고 싶어서 비행기를 타고 6시간 넘게 야쿠츠크에 가다니. 베르너는 얼마나 황당해하고 있을까.
그런데 그는 그런 이유를 묻기보다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 그런데 4월이면 이미 그곳도 많이 따뜻할 텐데요.
“……그 말씀대로예요 위넬.”
이렇게 4월의 야쿠츠크에 대해 바로 말해 줄 줄은 몰랐다. 여기 오기 전에 베르너에게 물어볼걸.
겨울엔 영하 60도까지도 떨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도시. 세계 최악의 관광지 중 하나. 시베리아 동부의 야쿠츠크에겐 그런 흉흉한 악명들이 붙어 있다.
난 그 악명에 기대를 품고 온 건데, 여름엔 30도까지도 올라가는 도시라는 건 미처 몰랐다.
4월이 되자 이미 날씨는 영상으로 올라왔고 밤에나 영하로 떨어졌다. 바람은 불고 있긴 하지만 버틸 만했고, 온 곳에 덮인 눈들은 살짝 녹아 있다. 아무리 봐도 내가 바라는 연구에 도움이 될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몰랐어.”
오빠는 그렇게 변명했다. 평생 모스크바에 살면서 이런 동부 내륙의 도시에 올 일이 별로 없는 게 당연하고, 그냥 춥다는 것만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누굴 탓할 순 없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미리 찾아봐야 했는데, 즉흥적으로 기획된 주말여행이라 그냥 아무 생각 없었던 내 잘못이다.
난 실수를 인정했다. 그리고 실수라 하더라도 이 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돌아가는 대로 확인해 달라 하셨던 것들 답변해 드릴게요. 그리고 다음 주 안에 곡도 더 완성도를 높여서 녹음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연주자로서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하겠단 내 말에 베르너가 껄껄 웃었다.
- 기대되는군요. 타티아나. 그러면 다음에 또 연락드리도록 하죠.
“예. 위넬.”
-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인사를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난 빅토르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곤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연구 중인 음색에 부족한 것이 날카로운 냉기라 생각해서 이곳 야쿠츠크까지 왔는데, 야쿠츠크는 내 생각보다 따뜻한 곳이었다. 실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대로 돌아갈 순 없다. 지금부터 뭘 해야 할까.
“어떻게 할 거야? 타티아나.”
루슬란 오빠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인인 마냥 그렇게 물었다. 난 웃으며 대답했다.
“제겐 선택지가 없어요. 최선을 다해 봐야죠.”
정말 무엇이든 해 볼 생각이다.
그런데 내 말에 오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울해하지도 않고 열심히 해 보려 하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오빠가 말했다.
“난 네가 갑자기 레나 강에 뛰어든다고 하진 않을까 걱정돼…….”
4월에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추위를 찾아 강에 뛰어든다는 아이디어는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랬다간 뭔가 느끼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