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496화 (496/1,277)

##  496화

야쿠츠크를 돌아다니길 수 시간.

빅토르가 미리 준비한 차량을 타고 움직이기도 하고, 직접 걸어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많이 추울까 싶어 겹쳐 입었던 스웨터는 이미 벗은 지 오래였다.

“…….”

적어도 악명 중 하나는 확실했다. 관광지로서 야쿠츠크는 그리 볼 것이 많은 곳이 아니었다.

애초에 관광을 온 건 아니지만 연구 목적으로라도 돌아다니다 보면 그래도 영감을 얻을 만한 구석이 있을까 기대하게 되곤 하는데, 이곳은 정말 눈 덮인 벌판 말고는 볼만한 게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영하권도 아닌 기온에서 제대로 시베리아를 체험 중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레나 강이네.”

“…….”

레나 강은 야쿠츠크 동쪽으로 흐르는 커다란 강이다.

멍하니 강물을 보고 있자니 서늘한 충동이 엄습한다. 진짜 강에라도 뛰어들어 볼까.

아까 전에 오빠가 걱정된다는 듯 말했던 게 없었더라면 난 정말 강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발만 담그는 것도 안 될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어떻게 아셨나요?”

“눈빛만 보면 알아.”

난 한마디도 변명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말 잘못하면 그대로 집으로 끌려갈 것 같다는 예감이 느껴진다.

“…….”

그런데 이렇게 넋 놓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뭔가 해답이 튀어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정말 돌아가야 하나. 여기에 오면 에르네스트가 쓴 곡에 쓸 만한 음색을 얻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별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다.

사실 크게 기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에르네스트가 시베리아에서 악상을 떠올렸다고 말해 준 것도 아니었고, 그냥 곡을 연구하던 내가 떠올린 것에 불과했으니까.

애초에 내가 찾고 있던 게 뭔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생각처럼 안 된다고 해서 짜증을 낼 순 없었다.

“그냥 돌아갈까요?”

“괜찮겠어?”

“나쁘지 않아요.”

마음에 드는 해답을 얻진 못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계속 건반만 쳐다보고 있다가 이렇게 바람을 쐬러 나오니 좋았다.

먼 곳을 바라보면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루슬란 오빠가 문득 말했다.

“가까이에서 강이나 보고 가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쓸데없는 생각 안 하는 것 같으니까 그래.”

강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면 뭐하러 가까이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가까이에서 좀 보고 싶고.”

“…….”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아쉬워하고 있다는 건 이미 다 들킨 모양이다. 정말 강에 들어가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래도 가까이에서 보면 또 느낌이 다를 것 같아서 오빠 말대로 하기로 했다.

걸어서 5분 정도 가니 강이 가까워져 오면서 공기부터가 달라졌다. 조금 더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다가온다.

그리고 강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도 보였다. 몇 명은 그냥 강을 보고만 있기도 하고,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물고기가 잡힐까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시장에 있던 물고기들이 여기에서 잡은 것 아닐까.”

야쿠츠크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봤던 시장엔 거의 나무토막처럼 꽁꽁 언 물고기들을 파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내륙 한가운데인 여기서 물고기를 잡을 곳이라곤 이 레나 강이 가장 크고 가까웠으니 오빠의 추리가 맞을 것 같다.

“살짝 볼까요.”

낚시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난 물고기를 어떻게 낚는 것인지 궁금해져서, 낚시 중인 남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 보기로 했다.

다들 비슷비슷한 방법으로 낚시 중인 것 같았다. 바로 한 마리쯤 잡나 싶어 잠자코 구경하는데, 생각보다 그리 쉽게 잡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낚시꾼들을 구경하던 나는 갑자기 낯익은 사람을 한 명 발견했다.

“……어?”

난 멍하니 중얼거리며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방한모를 쓰고 두터운 겉옷을 입어서 덩치가 커 보이는 건 다 똑같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사람이었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웅크리고 있는 곰 같다.

거의 근처까지 다다라 얼굴을 보니 중년을 넘어선 노년의 얼굴이었는데, 난 그 얼굴을 보자마자 기억 속에서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스타니슬라프 올레고비치……?”

그 이름을 부르니 남자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근엄한 얼굴에 일순 미소가 감돌았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세상에.”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난 너무 놀라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간신히 말했다.

“어쩐 일이세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스타니슬라프 올레고비치 타라소프.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작년 가을 협연 때 함께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굉장한 지휘 실력과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깊은 인상이 남아 있는데, 그렇게 대단한 분이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야쿠츠크에서 낚시를 하고 계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스타니슬라프는 툭 내던지듯 말했다.

“오케스트라에서 잘린 늙은이는 지휘봉 대신 낚싯대를 잡을 수밖에 없지.”

“예!?”

순간, 저 옆의 강물에 들어간 기분마저 들었다. 심장이 멎은 것 같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불과 몇 개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간에 지휘자를 그만두시게 된 거라면 지금 반갑게 인사할 때가 아니다.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적어도 내 나이의 세 배는 넘게 있었던 오케스트라에서 나오신 분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렇게 패닉에 빠져 있는 내게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농담일세.”

뭔가 말을 들었는데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았다. 농담이 무슨 말이지?

스타니슬라프는 그제야 미안하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휴가를 받아서 와 있지. 좋은 곳이니까.”

“…….”

정말 장난이었다는 걸 깨닫자마자 온몸에 열이 올라왔다. 얼굴이 뜨겁다.

대체 농담도 하실 게 있고 안 하실 게 있지 어떻게 그런……. 하지만 그게 날 완전히 속여 넘겼다는 건 분명했다.

난 원망스럽게 말했다.

“농담이 과하세요…… 스타니슬라프.”

“반응이 과격해서 재밌었다네.”

“…….”

웃으며 말씀하시는데 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 난 스타니슬라프가 내게 농담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기도 했다. 늘 무뚝뚝하게 단원들을 지휘하는 모습만 봐 왔는데, 이런 모습도 있으셨던가.

스타니슬라프도 반가운 마음에 그러셨으리라 생각하며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자, 옆에 있던 다른 분이 스타니슬라프에게 물었다.

“누군가? 손녀딸은 아닌 것 같은데, 스타니슬라프.”

스타니슬라프는 짧게 답했다.

“예전에 협연했었던 피아니스트일세. 대단한 친구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보통 아가씨는 아니겠구먼.”

그 짧은 한마디에 옆의 분은 곧바로 납득했다. 스타니슬라프의 한마디엔 그만한 무게가 있는 듯하다. 그나저나 대단한 친구라니, 조금 부끄럽다.

“그런 아가씨가 이런 시골엔 무슨 일로?”

“아, 그게…….”

난 음악 연구를 위해 왔다고 하려다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찾고 있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지도 않고, 그냥 어영부영 시간만 보낸 셈이다. 자신 있게 내가 뭘 하러 왔는지 말하기 힘들었다.

그런 나 대신 스타니슬라프가 말했다.

“연구 목적이겠지.”

어떻게 아신 거지?

난 순순히 대답하지 않고 다시 되물었다.

“그렇게 보이시나요?”

“어떻게 봐도 모스크바에서 이곳까지 관광하러 온 사람의 눈빛이 아니잖나.”

그렇게 말하며 날 바라보는 스타니슬라프에게선 수십 명의 단원들을 꿰뚫어 보는 지휘자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도무지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스타니슬라프는 손가락을 들어 낚싯대를 가리켰다.

“그렇다고 이렇게 낚시를 하는 사람의 눈빛도 아니고.”

스타니슬라프가 말하는 낚시는 비유로 들렸다. 음악 연구를 하려 하지만 낚시를 하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서 어디선가 답이 물리길 기다리는 게 아니란 뜻이다.

그는 이어 말했다.

“작년에도 그렇지만…… 적극적인 연주자는 언제나 바른 길을 찾기 마련이지. 기대하겠네, 타티아나.”

“…….”

난 잠깐 마주한 한순간에 모든 걸 꿰뚫어 본 스타니슬라프에게 경외심마저 느꼈다. 그리고 담담한 응원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

그런데 난 자신 있게 기대해 주셔도 좋다고 답하지 못했다. 오늘 종일 헛수고를 하고 다닌 탓이었다.

아무 말도 않고 있으면 스타니슬라프가 걱정하실까 싶어 그래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려는데, 스타니슬라프의 친구로 보이는 분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눈만 조금 남아 있는 곳에서 피아니스트가 뭘 찾나?”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걸 찾겠다고 돌아다닌 셈이다.

하지만 스타니슬라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 밑에 숨겨져 있는 다이아몬드의 광채는 그것을 찾으려 하는 사람에게만 보이기 마련이지.”

이전에도 몇 번 들었던 시적인 은유였다. 스타니슬라프는 지휘를 할 때도 종종 이런 은유를 들곤 했다.

눈 밑에 숨겨져 있는 다이아몬드가 뭘 뜻하는 걸까.

찾기 어렵게 감추어져 있는 어떠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긴 한데, 솔직히 선뜻 이해가 가진 않았다.

그간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스타니슬라프의 말을 바로 알아듣고 곧장 연주에 반영해 내곤 해서 놀라움을 자아냈지만, 난 스타니슬라프의 말을 이해하기에 경험도 지혜도 모두 부족했다.

옆의 친구분이 스타니슬라프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아, 그것도 그렇군.”

“……?”

그런데 난 그 말에서 약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스타니슬라프의 말이 음악가로서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식으로 동의한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눈을 마주하자 스타니슬라프의 친구분께서 빙그레 웃었다.

“잘 모르는 이야기인가? 야쿠츠크는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생산지라네. 세계 생산량의 반의 반 정도는 이 땅에서 나오지.”

전혀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스타니슬라프를 돌아보니 그 역시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분께서 장난스럽게 다시 물었다.

“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이었나?”

“…….”

죄송한 말이지만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했다. 애초에 기대했던 것이 세계에서 제일 춥다는 악명 그 자체이기도 했고.

하지만 이곳에 잠들어 있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 밑의 다이아몬드는 어떠한 은유가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눈이 내린 거대한 평원과 그 밑에 잠들어 있는 다이아몬드.

그 이미지를 떠올린 순간, 난 음악에서 정말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제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어설프게 드문드문 돌아다니던 소리들이 한곳으로 모이면서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원했던 건 그저 차갑기만 한 눈이나 바람의 음색이 아니라, 다이아몬드같이 단단하고도 투명하고 반짝이는, 그런 음색이었을 터다.

그건 억지로 만들어 낸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현실 그 자체다.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져서 멍하니 서 있자 스타니슬라프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겉으로 드러난 눈을 찾아 이 먼 곳까지 온 것 같진 않았는데. 어때, 타티아나. 찾았나?”

난 간신히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다행이로군.”

스타니슬라프는 진중한 어투로 그렇게 한 마디 하고는, 다시 낚싯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낚싯대가 거세게 흔들렸고, 스타니슬라프는 곧바로 낚싯대를 확 집어 들었다.

잠시 후, 낚여 올라온 커다란 물고기를 보며 난 다시 한 번 놀랐다.

그 물고기는 이 차가운 강에 살고 있다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고, 생명력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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