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3화
메세나 협회에서 주최하는 연주회까지 남은 기한은 그리 길지 않았다. 때문에 난 3일간 거의 피아노와 함께 살다시피 했다.
아직 어떤 곡을 올릴지 확실하게 정해진 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레퍼토리를 다시 되새기고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
여러 곡이 지나간다. 난 쇼팽의 에튀드를 연습한 뒤에 리스트의 소품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모차르트의 소나타로 넘어왔다.
정말 대책 없이 막 연습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모든 곡들에 공통적으로 있는 흐름을 붙잡고 이어 붙여 나가는 중이었다.
어떨 땐 형식이 비슷했고 어떨 땐 조성과 화성이, 아예 가끔은 설명하기 어려운 뉘앙스가 비슷한 곡들이 앞뒤로 달라붙는다.
이런 식으로 형식을 무시하고 계속하다 보면 한 번의 연습 사이클에 2시간도 넘게 들어갔다. 서너 번만 반복하면 반나절도 순식간이다.
작정하고 이어 나간다면 며칠은 족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세프 선생님과 전화로 상담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님은 한숨부터 푹 쉬었다.
‘타티아나. 네 레퍼토리가 워낙 넓으니 그런 방법도 가능하다는 건 알겠지만. 모든 곡들을 이어 붙이다 보면 정작 무대에서 큰 실수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우려는 일리가 있었다. 실제로도 가끔 연습을 하다 보면 다른 비슷한 음악과 헷갈리는 기분을 느끼기도 하곤 했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여쭈어 보니 선생님은 의식적으로 곡들의 장르를 계속 바꾸면서 연습해 보라 하셨다. 기교 연습을 할 때도 스타카토와 레가토 연습을 번갈아 가면서 하듯, 연습에는 항상 균형이 중요하다는 이유였다.
난 그 조언을 받아들여서 다양한 곡들을 뒤섞어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의 경험과 노하우 그리고 조언이 내 연습의 체계를 이루었다.
3일이 지났을 땐, 이전 회의에서 적어 냈던 모든 곡들을 리허설로 곧장 연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
약속한 회의 날 아침.
난 혹시 악보가 필요할지 몰라 태블릿 컴퓨터도 준비해서 저택을 나섰다.
아나스타샤는 정확한 시간에 맞춰서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차 문을 열고 맞이하자 그녀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좋은 아침이에요.”
그녀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서로 눈이 마주치니 웃음이 난다. 요 며칠 얼굴을 못 봤을 뿐인데도 이렇게나 반갑다.
우리는 못 본 사이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내내 피아노 앞에 있었던 건 나나 그녀나 똑같았고, 결국 이야기는 한 점으로 수렴되었다.
“연습은 어땠나요? 아나스타샤.”
“문제없도록 무난하게 해 왔어. 걱정 마.”
아나스타샤는 허공에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답했다. 어투로만 들어선 별로 연습하지 않았다는 것 같지만, 난 그녀가 나와 비슷할 정도로 열심히 준비해 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늘 곡들을 제대로 선정해서 남은 열흘 동안 완성시키면 된다. 아나스타샤에 대해서만큼은 그리 큰 걱정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팔짱을 탁 끼더니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내가 걱정하는 건 다른 쪽인데.”
“예?”
“렌스키 말야.”
“아…….”
그 말을 듣자마자 평화롭던 연주회 스케줄에 먹구름이 끼는 기분이 들었다.
중대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종종 이런 불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기분에 잠식당하면 안 된다.
난 부정적인 생각들을 치워 버리려는 심산으로 일부러 긍정적인 말을 꺼냈다.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해?”
“예. 제가 진지하게 말씀드리니 알았다고 해 주시는 것 같고…….”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무표정하게 답한다. 그러나 팔짱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녀도 렌스키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나도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불신한다면 연주회에 지장이 생길지도 모른다. 난 조심스레 말을 꺼내 보았다.
“아나스타샤는 그를 믿지 않나요?”
“어떤 면에서?”
내 질문에 아나스타샤는 삐딱하게 답했다.
정말 기분이 안 좋은 건가 싶어서 가만히 바라보는데, 그녀는 조금 더 진중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실력 쪽이라면 믿지. 유럽 쪽에선 꽤 잘나가던걸.”
이후에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본 모양이다. 잘나간다는 말엔 나 역시 동의했다.
렌스키 로마노비치 비소츠키는 아주 어려서부터 카즈호프 인터내셔널의 지원과 교육을 받은 엘리트 연주자였다. 그 실력은 이미 많은 국제 콩쿠르 무대에서 드러난 바 있고, 그 스타일이나 외모 덕에 팬층도 두터웠다.
미처 내가 몰랐을 뿐, 젊은 프로 중에서도 유명한 연주자였다. 그런 사람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걱정은 단순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데 협회에서 그런 연주자를 데려왔을 땐, 그만한 무언가를 제시했다고 생각해. 그는 메리트를 따지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든.”
“…….”
난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약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아나스타샤가 단지 기분이 상했을 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나스타샤의 예리한 통찰력은 기분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녀는 훨씬 더 넓은 시각을 가지고 상황을 보고 있었다.
렌스키는 발레리가 꽤 힘을 써서 데려온 사람이었다. 이 연주회의 주요 인사인 것이다.
“이번 연주회의 주연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 동시에 대충 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하지만 렌스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그에겐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다. 도무지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이유이긴 했지만.
주연이 되고 싶다면 더더욱 최선을 다해야 할 텐데, 왜 대충 하자는 말이 입에서 나오는 거야?
오만인지 뭔지 모를 그 생각을 굳이 이해해 줄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벌어지게 된 상황.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이후의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 모순을 타티아나 네가 짚었지. 렌스키는 결정을 해야 할 거야.”
“결정이요?”
“응.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결정.”
어떤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되진 않는다. 단지 아나스타샤가 조금 부정적으로 상황을 보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난 그간의 경험으로 이럴 때의 아나스타샤의 예감이 틀리는 법이 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으로 말했다.
“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나도 그래.”
아나스타샤도 방금까지 한 말이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 뒤로 우리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며칠간 연습했던 곡들, 참고했던 음반이나 레퍼런스 등 나눌 정보는 정말 많았다.
미처 이야기를 다 끝내기도 전에 차량은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의 건물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어 주며 깍듯하게 인사하는 빅토르에게 감사를 표하고,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약속했던 사무실로 올라가니 발레리는 자리에 없고 렌스키만 소파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번 첫인상이 마냥 좋지만은 않아서 그런지 약간 어색하다. 아나스타샤가 한 이야기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레리가 올 때까지 어색하게 말도 없이 못 본 척 앉아 있을 순 없었다. 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렌스키 로마노비치.”
“왔어요?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렌스키는 내 풀네임을 불렀다.
처음 보자마자 친밀하게 이름만 부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리고 난 그가 나에 대해 이전보단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왜 그렇게 봐요? 그날 예사롭지 않은 성격은 다 보여 줬으면서.”
렌스키는 가볍게 이야기했다.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인데 뭐가 성격을 보여 줬단 건지 모르겠다. 살짝 반감이 들었지만 이런 말도 저 사람 성격이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실 거란 생각은 했었어요. 저도 렌스키 로마노비치에 대해 알아보았죠. 소개하셨던 것보다 더 대단하시던걸요.”
“반어법 아니죠?”
“……?”
지금 진심으로 그와 친해지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칭찬은 그냥 칭찬으로 들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그런 것 할 줄 몰라요.”
“하하, 그래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렌스키는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무튼, 갑자기 왜 베르체노프가 음악계에 발을 내디뎠나 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네요. 타티아나가 하자고 한 건가요? 피아노는 몇 살부터 시작했어요? 중앙음악학교에도 편입했다고만 하고 그 전에 대해선 알 수가 없으니 분명 내부적으로…….”
“렌스키 로마노비치. 제 이야기에 대해선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렌스키는 내 성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아 보인다.
어지간해선 물어보는 대로 대답해 주고 싶지만, 말해 주다 보면 끝도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그는 날 베르체노프의 후원 연주자로 봤었고, 지금은 베르체노프의 메세나 활동에 대한 실권자라 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일진 알고 있다. 그래도 난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이야기했다.
“궁금하신 점은 많겠지만, 중요한 건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제 수준이라 생각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물어봐 주신다면 기쁘게 답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단호하시네. 가문 이야기는 하기 싫어요?”
“…….”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무거운 이름에 대해 내가 한 한마디로 무언가가 결정되거나 이러쿵저러쿵하게 되는 것이 무서울 뿐이었다.
난 아버지와 오빠의 선물을 감사히 생각하지만, 내가 이루지 않은 것을 전부 내 것인 양 평가받는 건 달갑지 않았다.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는데, 렌스키는 미안하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실력이야……. 이미 영상도 몇 개 봤거든요. 저보다 낫겠던데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어떤 영상인진 모르겠지만 그냥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러니…… 음, 발레리가 오면 이야기하죠.”
렌스키는 곧바로 무언가 말하려다가 얼버무리더니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기도 잠시,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연이어 빠른 걸음 소리가 사무실 쪽으로 다가왔다. 문이 열리고 등장한 것은 발레리였다.
“안녕하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3일 만이군요. 차부터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해 볼까요?”
발레리가 빠르게 차를 타선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내겐 허브티를 준 것을 보니 이미 우리 취향 정도는 금방 파악한 모습이었다.
자잘한 안부를 묻고, 지체 없이 곧바로 연주회 회의에 들어갔다. 발레리가 관련 서류들을 살피며 물었다.
“이전에 기획했던 구조에서 크게 벗어날 이유는 없겠죠? 그러니 오늘은 준비해 오셨을 곡들을 맞춰 보고 결정을 할…….”
“그래서 말인데요, 발레리.”
도중에 렌스키가 말을 끊었다. 발레리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렌스키는 기획 중인 프로그램 리스트를 손가락으로 쿡 찍으며 말했다.
“제가 하기로 되어 있었던 라흐마니노프를 타티아나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발레리는 물론이고 나와 아나스타샤도 깜짝 놀랐다.
렌스키는 이 연주회의 메인이 될 곡들을 맡을 예정이었다. 이전에도 자신 있게 메인을 맡을 테니 우리는 편하게 따라오기만 하라고 했었고.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말을 확 바꿔 버릴 줄은 몰랐다.
발레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연주를 해 본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곡이 가물가물하더라고요. 이제 열흘 정도 남았는데 제가 완성하자니 촉박할 것 같아서.”
“……그럼 타티아나라고 이야기가 다릅니까?”
열흘이라는 시간이 촉박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발레리는 태연하게 말했다.
“연주하는 거 봤는데, 잘할 것 같던데요. 이번 연주회 메인은 타티아나로 세우는 게 맞겠어요.”
눈을 마주친 렌스키는 그냥 웃기만 했다.
난 아나스타샤가 말했던 그의 결정이 이런 부분을 의미한 것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