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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34화 (534/1,277)

##  534화

세 명이 참가하는 연주회를 준비하면서 나올 수 있는 기획은 수십 종류도 넘는다. 거기엔 주연과 조연을 나누지 않고 모두 각자의 연주를 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하나의 스토리텔링과 흐름을 만들려면 누군가는 서두를 열어야 하고 누군가는 중간 다리를 맡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몇 개의 곡들을 적절히 배치했고, 마지막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부분엔 라흐마니노프를 두었다. 이 연주회에선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바로 주연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 렌스키는 자연스럽게 라흐마니노프를 자신이 하겠다 했었다.

무료 연주회이니 대충 하겠다고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눈에 띌 주연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간단하게 주도권을 놓아 버릴 줄은 생각지 못했다.

“…….”

그 이유는 쉽게 파악할 수 없었지만, 내게 라흐마니노프를 추천하는 모습에서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는 이 연주회를 아예 나 때문에 기획된 것으로 만드려는 것 같았다.

난 그 이유가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한 현실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연주회 밖의 이유나 어떠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조금 난감했다.

속단할 순 없어서 그의 의향을 살피기 위해 말없이 지켜보았다. 발레리와 아나스타샤 역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입을 연 건 발레리였다.

“렌스키…….”

“전 베토벤으로 하죠. 원래 이쪽을 하려 하기도 했었고.”

“…….”

렌스키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회 회의에 임하는 사람의 태도로 말했다. 그 말 자체엔 문제가 없었지만 난 굉장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요? 타티아나. 괜찮겠어요?”

생각이 복잡해졌다.

렌스키는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해 버린 상태다. 여기에서 어떻게든 해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해서 무대에 세운다고 해 봐야 렌스키에게서 제대로 된 연주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기업의 후원을 받기 때문에 이런 메세나 협회의 요청에 응할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무료 연주회에서 큰 동기나 의욕을 얻는 스타일의 사람도 아니었고.

이미 그가 안 한다면 나나 아나스타샤가 해야 할 상황이다. 그리고 난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원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녀에게 다시 한 번 패스할 생각이 없었다.

잠시 고민이 들었다.

다른 의도를 따지지 않고 좋게 생각하면 렌스키가 내게 주역 자리를 양보한 것이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기분이 좋지 않다. 자연스럽지 않고 비정상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화를 낸다면 그건 그것대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다.

대신 난 나지막이 물었다.

“저야말로 묻고 싶어요. 괜찮으시나요?”

“중간 미팅 중이니까 이런 조정은 있어야죠. 그거 알아보려고 3일이 필요했던 거잖아요?”

렌스키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초벌 기획은 몇 번이나 수정되면서 바뀌기 마련이니 그의 말엔 틀린 점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아예 서류를 덮어 버리더니 덧붙여 말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빼고 조금 더 무난하게 갈까요?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

아예 기획을 새로 하잔 말이었다. 방법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난 라흐마니노프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렌스키가 연주회에 최선을 다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이 되었다.

일단은 주어진 것에 대해 짤막히 대답했다.

“제가 해 볼게요.”

렌스키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발레리를 돌아보았다.

“잘 되었네요. 어때요, 역시 이런 그림이 좋겠죠? 발레리.”

그 물음은 마치 베르체노프의 후원 연주자가 주연이 되는 쪽이 낫지 않겠냐는 것처럼 들렸다.

렌스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콘서트 디렉터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발레리였지만, 그는 우리 연주자 세 명이 자유롭게 연주회를 기획할 수 있도록 돕기만 했다.

그런데 렌스키는 그림 운운하면서 있지도 않은 발레리의 의도를 넘겨짚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는 투였다. 물론 발레리는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원하는 그림은 원하시는 대로 그리면 됩니다. 렌스키.”

“그게 이거라면요?”

“…….”

발레리는 렌스키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할 것 같단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전 타티아나의 실력을 알지만 그래도 이건…….”

“괜찮아요.”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한다면, 상관없었다. 굳이 말을 해서 설득하고 서로를 이해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우리가 여기에 모인 목적은 딱 하나. 연주회를 잘 하는 것뿐이었다. 필요한 주연 자리에 렌스키가 날 올려놓고 싶어 한다면, 거기에 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렌스키가 그렇게 한 발자국 물러서는 것 같은 스탠스로 연주자로서의 역할 또한 그리하겠다는 의도라면, 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똑바로 요구했다.

“대신, 렌스키 로마노비치에게 요청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뭐죠?”

“지난 3일 동안 라흐마니노프만 보다가 결정을 하신 건 아니겠지요? 그러면 다른 레퍼토리를 한 곡 보여 주셨으면 해요.”

렌스키는 잠자코 내 말을 듣더니 손을 펼쳐 보였다.

“아, 제 실력에 의심이 들 수밖에 없겠네요.”

“그런 이유는 아니에요.”

“…….”

말에선 제대로 된 의도를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는 자기주장을 말하는 데엔 거침이 없었으나, 그 속에 있는 생각을 진지하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하지만 연주자라면 분명 음악에서 드러난다. 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음악으로 들어 볼 심산이었다.

렌스키는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지금까지도 몇 번이고 보였던 그 특유의 눈빛이었다. 그는 손목을 스트레칭하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안 될 것 없죠. 발레리. 밑의 스튜디오 써도 되죠?”

발레리가 전화 한 통으로 스튜디오 피아노의 사용권을 얻었고, 그렇게 우리는 밑층으로 내려갔다.

아나스타샤가 연주를 보여 주었던 바로 그 공간이었다.

렌스키는 이곳에 몇 번 와 봤는지 익숙한 걸음으로 부스에 들어가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며칠 전에 아나스타샤가 연주했다는 체르니에 대해 다시 좀 공부해 봤는데……. 나름 재미있더군요. 그러니 한 곡 쳐 보도록 하죠.”

렌스키는 주저 없이 곡을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곡은 체르니의 연습곡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선택했던 op.299 그중에서도 39번 곡.

“…….”

기교적인 부분은 그야말로 흠잡을 곳 없었다. 전문 연주자답게 화려한 기교로 건반 위를 뛰논다.

아나스타샤와 같은 곡에 같은 템포. 정말 똑같은 연주였다.

그러나 난 결정적인 결여를 느꼈다.

아나스타샤는 발레리에게 보이는 시험이라 생각하며 연주에 임했다. 반드시 하고 싶다는 그 마음은 음악에 묻어 나왔고, 발레리는 그 점을 굉장히 높게 평했다.

그러나 렌스키의 음악에선 그런 것들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기계처럼 건반을 순서대로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다.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를 어떻게 하면 자극할 수 있을까. 의욕을 내게 할 수 있을까. 그가 성의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연주회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 방법이 없을까.

방법은 다양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자신의 가치관을 갖추고 있는 렌스키에겐 어떤 방법도 무용할 것 같았다.

연주가 끝나고, 난 짧게 평했다.

“잘 들었어요. 훌륭한 연주였어요. 렌스키 로마노비치.”

“고맙습니다.”

“베토벤도 어떻게 연주해 주실지 기대가 되네요.”

내 희망이 담긴 말에 그는 고개만 까딱이며 별다른 답변을 돌려주지 않았다.

***

이틀 후. 연주회에 대한 세 번째 회의가 있었다.

각각 준비해야 할 곡들은 정해 놓았다. 오늘은 그렇게 고른 곡들을 각자 어느 정도 준비했는지 확인하는 날이었다.

난 맡은 곡들을 어느 정도 완성해 왔다. 이미 레퍼토리에 있는 곡이라 다시 악보를 외우고 준비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앞으로 일주일 남짓. 시간은 촉박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준비한 곡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리허설로 선보였다.

“……이대로 나가도 되겠는데요. 이틀 걸린 거 맞습니까?”

발레리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일단 한시름 놓았다는 듯 팔을 늘어뜨렸다. 일단 리허설만 봐서는 괜찮아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연주회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난 옆을 돌아보았다. 박수를 치고 있던 렌스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난 그에게 말했다.

“리허설하시는 것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렌스키 로마노비치.”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을 저었다.

“전 다음에.”

연주회 전의 회의에서 각 독주자들이 자신이 준비해 온 것을 꼭 리허설로 보일 필요는 없었다. 준비가 조금 더 필요하다면 다음에 하면 된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기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앞으로 일주일 남짓. 회의를 한 번 정도 더 한 뒤엔 연주회 전날 총 리허설을 하고 그대로 본무대의 시작이다. 난 할 수 있다면 지금 렌스키의 음악을 들어 보고 싶었다.

“조금만이라도 안 될까요.”

“악보를 봐야 해서요.”

“제 태블릿을 악보로 쓰세요. 빌려 드릴게요.”

“…….”

모든 무대에 오를 때 반드시 암보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니 곡만 완성되어 있다면 상관없었다. 내가 다시 한 번 제안하자 렌스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렌스키가 준비하는 사이 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번 회의 때, 렌스키가 내게 라흐마니노프를 맡으라 한 후에도 그녀는 별말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주는 거라면 잘 하라고 한마디 해 줄 법도 한데, 그런 말도 없었다.

그녀가 은연중에 보이는 감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아마 렌스키가 마음에 들지 않는 탓일 테지. 하지만 연주회는 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언제나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무대에 설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난 그렇게 마음을 다시 정리하며 피아노 옆에 섰다.

태블릿 컴퓨터에 악보를 띄워 보면대 위에 올려 주니 렌스키가 고개를 들었다.

“3악장만 할게요.”

“그렇게 하세요.”

“악보는 어떻게 넘기죠? 화면을 누르면 됩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넘겨 드릴게요.”

렌스키는 기묘한 시선으로 날 올려다본다.

태블릿 악보를 넘기는 건 손가락 하나로 가능한 쉬운 일이지만, 내가 페이지 터너를 자처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연주자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선과 호흡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건반을 연주하면서 숨을 어떻게 쉬고 눈동자가 어디를 바라보는지만 보더라도 곡에 익숙해져 있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난 유심히 렌스키를 바라보았고, 그는 힐끔 날 살피더니 곧장 연주를 시작했다.

“…….”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3악장.

강렬한 화음이 울리고, 곧 오른손이 살짝 건반을 스치며 간지럽히다가 주르륵 내려온다.

균형 잡힌 아르페지오를 한 소절만 들어 봐도 그가 얼마나 원숙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열정이라는 부제를 지닌 소나타는 그의 손에서 전혀 열정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난 렌스키가 연주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악보를 살핀다.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악보를 읽어 내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 시선은 손이 도약하는 시점에서 건반으로 잠깐 내려왔다가 다시 화면으로 향했다.

기교적인 부분에선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난 그가 곡을 바로바로 읽어 내리면서 연주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레퍼토리로 꺼낸 곡이니 이미 연주해 본 적이 있긴 할 테고 그래서 이렇게 악보를 보고는 기억을 되살리며 자연스럽게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최근엔 연습을 안 한 게 분명하다.

어느 정도 암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악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저렇게 집중력을 다하여 음표를 읽을 이유가 없었다.

난 그가 연주회에 시간을 쏟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맥이 풀렸다.

“……?”

화면을 넘기지 않자 바로 연주가 멈추었다. 렌스키가 날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실망? 애초에 그렇게 많이 기대를 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공허한 기분이 드는 걸까. 프로 연주자인 그에게 당연하게 바랐던 부분이 있어서?

난 힘없이 말했다.

“물…… 마시고 올게요.”

혼자 생각을 할 시간과 바깥 공기가 필요했다. 난 사람들을 남겨 두고 복도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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