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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37화 (537/1,277)

##  537화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에게 미리 메시지를 보냈다.

용건을 미리 말할 수도 있었지만, 아예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그냥 집에 가겠다고만 전했다.

에르네스트의 답장은 매우 간결했다.

[와.]

좀 일부러라도 용건이 궁금하다는 티를 내 주면 안 되나? 제발 메시지 좀 길게 써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나스타샤는 한숨을 내쉬며 타티아나에게 가자고 말했다. 타티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나스타샤에 이어 에르네스트에게까지 도움을 구한다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사실 친구로서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 가볍게 생각해도 될 텐데, 타티아나는 정말 중요한 부탁을 하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은 베샤스트니흐가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문간의 초인종을 눌렀다. 에르네스트의 어머니인 이자벨라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어머나……. 어쩐 일이니?”

“갑자기 죄송해요.”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아나스타샤가 살갑게 인사했다. 이젠 키가 170cm도 훌쩍 넘어서 이 중 가장 컸지만, 이자벨라는 어려서부터 봐 온 아나스타샤를 굉장히 귀여워했다.

어찌 할 줄 몰라 하며 이자벨라가 말했다.

“놀러 온다는 말은 듣지 못해서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괜찮아요. 놀러 온 건 아니에요. 에르네스트에게 전할 일이 있어 왔어요.”

“두 사람이 직접 말이니? 중요한 일인가 보네.”

“중요한 일이에요.”

“어서 들어오렴. 에르네스트는 방에 있단다.”

이자벨라가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하고는 간식을 준비해 주겠다 말했다.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는 금방 돌아갈 것이라 하며 사양했지만 이자벨라는 그 사양을 다시 사양했다. 어쩔 수 없이 조금 앉아 있다가 가야 할 것 같았다.

집 안의 풍경은 얼마 전 생일 파티 때 보았던 광경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대충 거실을 쭉 둘러보곤 에르네스트의 방 쪽으로 향했다.

“열려 있어.”

문을 노크하니 에르네스트의 답이 바로 있었다. 두 사람은 에르네스트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얼마 전 풍경과 굉장히 달라져 있었다.

피아니스트답게 방 안의 대부분의 공간을 그랜드 피아노가 차지하고 있는 점은 그대로였지만, 대낮인데도 커튼을 쳐 놔서 그런지 방 곳곳이 그림자로 어둑어둑했다.

책상 위에는 책과 오선지 등이 두서없이 펼쳐져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그 앞에 앉아서 만년필로 무언가 휘갈겨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

거의 작곡에 미친 사람처럼 하고 있긴 한데 그래도 씻지도 않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멀쩡한 얼굴에 다크서클만 조금 내려앉아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메세지로는 아나스타샤가 혼자 오는 것처럼 되어 있었으니 타티아나가 함께 온 것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그는 재빠르게 셔츠 단추 등을 확인했다.

에르네스트는 곧 태연하게 두 사람을 반겼다.

“오랜만이야. 아나스타샤, 타티아나.”

“희한한 일이네. 네가 그런 말도 다 하고.”

에르네스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방학 내내 한 번 안 봐도 오랜만이란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아……. 그랬나?”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만년필 위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눌렀다. 왜 오랜만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는지 이유를 찾는 듯하다.

잠시 그러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곧 가볍게 웃더니 책상 위를 가리켰다.

“몰라. 이거 붙잡고 있었더니 시간 감각이 없네.”

“그거 일부러 흩트려 놓은 거야?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일려고?”

“내가 그렇게 할 짓 없는 사람처럼 보여? 지금 이거 하나 하는 것도…….”

갑자기 왜 시비냐는 투로 인상을 쓰며 오선지 한 장을 들어 올린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다시 유심히 보더니 중얼거렸다.

“잘됐다.”

“응?”

“이리 와 봐. 와서 앉아 봐.”

“으……응?”

그는 아나스타샤에게 손짓했다.

영문도 모르고 아나스타샤는 그의 손짓에 따라 피아노 앞에 앉았다. 에르네스트는 대뜸 들고 있던 오선지를 보면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난데없이 초견 시험이 시작되었다.

“이것 쳐 봐.”

“갑자기 뭐야? 설명을 좀 해 줘.”

“그냥 하면 돼. 느낌대로.”

“……?”

아나스타샤는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주어진 악보를 확인했다.

뭔가 집중하는 것도 민망할 정도로 쉬운 단선율 악보였다. 그냥 하나의 흐름으로 된 긴 선율이 악보를 네 줄 정도 채우고 있었다. 굉장히 길다.

박자도 템포도 그 어떤 정보도 나타나 있지 않고 오로지 음표들만이 불친절하게 이어져 있었다. 있는 대로 그냥 치자면 별것 아니었지만, 이게 에르네스트의 작곡에 무언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니 쉽게 손을 뻗기 어려웠다.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 번 악보를 유심히 살펴 모든 음들을 시창하여 마음속으로 쭉 불러 보고, 그 음색 그대로 피아노 위로 옮겨 냈다.

무턱대고 바로 건반부터 누르기 시작하는 것보단 훨씬 더 음악 같은 소리가 나왔다. 아나스타샤는 이 단선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 더 살을 덧붙인다면 상당히 좋아질 것 같단 기분을 느꼈다.

짧은 연주가 끝나고,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자 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구나. 됐어.”

“끝이야?”

“타티아나.”

“예?”

“너한테도 부탁할게.”

한 번으로 끝나진 않는 모양이었다. 교차 검증이 필요한 건가?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피아노에서 일어났고, 그 자리에 타티아나가 앉았다.

타티아나는 악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연주하면 되나요?”

“편하게 해 줘. 방금 들었던 건 잊고.”

아나스타샤가 했던 것과 다른 것을 원한다는 말이었다. 타티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뻗었다.

같은 선율인데도 확연히 다른 음색. 타티아나의 음악이었다.

복잡한 화성이 아님에도 연주자의 개성과 해석이 묻어난다. 특히 타티아나처럼 음색에 대한 개성이 탁월한 연주자인 경우엔 그런 느낌이 더더욱 강했다.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이 단선율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연주는 그리 길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아쉬운 듯 여운을 남기며 손을 뗐고, 에르네스트는 옆에 다가오더니 악보 위에다가 선율을 자르는 것처럼 펜으로 휙휙 그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에 굉장히 만족하는 것 같았다.

“됐어. 두 사람 다 고마워.”

“뭐냐고.”

“그냥 이 선율을 어떻게 나누어야 자연스러울지 며칠 전부터 고민이었거든. 난 노래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사람이 노래를 하면 자연스럽게 끊어 부르는 것처럼 음악에도 똑같이 프레이징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에르네스트는 이 선율의 프레이징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오랜 고민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겨우 몇 분 만에 그 해답을 찾아냈다고 한다. 아나스타샤는 조금 황당했다. 피아노로 하는 노래는 에르네스트도 여기 중 누구 못지않게 잘한다.

“피아노로 하는 건데 그냥 하면 되잖아.”

“그거랑은 달라. 노래를 해 본 적 있는 사람이 있어야 호흡에 생기가 실리거든.”

“무슨 말이니 그게?”

“직접 해 보면 알아.”

설명하기 귀찮다는 어투에 아나스타샤는 발끈했으나, 곧 이어진 말에 다시 누그러졌다.

“아무튼, 무슨 일이야?”

일단 들어 보겠다는 태도는 반가웠다. 바쁘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면 말도 꺼내기 어려웠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살짝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냥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에르네스트. 일주일 정도 뒤에 연주회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참가해 달라 하면 화낼 거야?”

“……저거 안 보여?”

에르네스트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곡가의 전쟁터가 펼쳐져 있었다.

바쁘다는 건 알아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아나스타샤가 쏘아붙이려는 찰나,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화낼 건 없긴 하지.”

“……어?”

“너희가 내 연구를 엄청나게 앞당겨 줬으니까. 괜찮아. 시간 내 줄게.”

이렇게 흔쾌히?

아나스타샤는 눈을 깜빡이며 타티아나를 돌아보았다. 타티아나 역시 약간 놀란 것 같았다. 방금 뭔가 도와준 것 같긴 하지만, 겨우 그걸로 돼?

에르네스트는 주저하지 말고 말해 보라는 듯 의자 위에 털썩 앉더니 말했다.

“무슨 연주회인데? 자세히 이야기해 줘.”

요 며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타티아나가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의 연주회에 나가게 되었고, 연주자가 부족해서 아나스타샤와 또 한 사람이 추가되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그만두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정말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그 한 사람의 이름을 듣더니 알은척을 했다.

“렌스키……? 그 사람이 그만두었다고?”

“아는 사람이야?”

“그냥 인사 정도는 했었지.”

아나스타샤는 약간 에르네스트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이 친하다면 말을 함부로 하기도 어려웠다. 그 사람 미친 사람 같다고 이야기했다가 에르네스트가 기분이 상하기라도 하면 낭패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해 에르네스트가 먼저 물어보았다.

“왜 그만두었는지 물어봐도 되나?”

“……물어봐도 우리도 몰라. 그 사람 태도는 계속 이상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아나스타샤가 답했다. 에르네스트는 별 반응 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타티아나가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그냥…… 어딘가에 소속을 두면 안 될 연주자인 것 같았어요.”

아나스타샤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타티아나는 이어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소속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 염증을 느끼기도 하는…… 그런 분 같았죠.”

피상적으로 느꼈던 무언가 이상으로 타티아나는 렌스키라는 사람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도 확신할 수 없다는 듯 속삭이고 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말이 굉장히 실체에 근접해 있다는 직감을 느꼈다.

에르네스트는 기억을 되짚는 듯 인상을 살짝 쓰더니 이야기했다.

“실력은 괜찮은 편인데, 주연이 되는 게 아니라면 아예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는 스타일이긴 했어. 극단적일 정도로.”

그가 보기에도 렌스키는 쉬운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기적이라는 말로 표현하자면 쉽겠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짧게나마 에르네스트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글쎄. 나라면 그 사람 포함해서 주연을 여러 명 세웠을 것 같은데.”

에르네스트는 긴 고민 없이 툭 내뱉었다.

“콩쿠르처럼 자연스럽게 경쟁하게 만들었다면 아마 최선을 다했을걸.”

“……그래?”

“나도 몰라. 그 사람이랑 안 친해.”

실컷 이야기해 놓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에르네스트는 정말 이 이상 말 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조금 더 후회했다.

적어도 에르네스트는 그 사람이랑 같이하면 피곤하니까 일찍 그만두는 쪽이 낫다고 하지 않았다. 가급적 같이하는 쪽으로 고려의 방향을 놓았다. 그 점은 타티아나가 평소 생각하는 방식이나 행동과 정말 닮아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에르네스트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무튼 떠난 사람 신경 쓰지 말자고. 내가 그 사람보다 잘하면 되는 일이잖아.”

“뭐? 아하핫.”

“왜 웃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 아나스타샤의 모습에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비웃음이라 착각했는지 눈썹을 치켜세웠으나, 아나스타샤의 웃음은 순수한 감탄의 웃음이었다.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타티아나도 나지막하게 따라 웃기 시작했고, 에르네스트는 혼자서 영문을 모른 채 인상을 쓰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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