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8화
렌스키가 나가면서 생긴 빈자리는 에르네스트가 맡아 주었다. 연주회까지 일주일 남짓 남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압박감으로 다가오지만, 이전처럼 불안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제야 우리는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방학 동안 있었던 일들이라고 해 봐야 뻔했지만.
그는 내내 곡만 쓰고 있었고, 나와 아나스타샤는 연주회 건으로 바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밖으로 흘렀다.
“사샤는요?”
“놀러 나갔어.”
“그런가요? 보고 싶었는데.”
다행히 사샤는 우리와 달리 즐거운 방학생활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데, 에르네스트의 어머니가 살며시 문을 열며 들어오셨다.
“얘들아. 이것 먹으면서 이야기하렴.”
“아, 감사합니다.”
가지고 오신 쟁반 위엔 예쁘게 깎은 과일들과 디저트, 음료들이 올라가 있었다. 난 연주회 생각만 하느라 빈손으로 온 것에 대해 죄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머님은 쟁반을 놓고, 방을 휙 둘러보시더니 내가 걱정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인상을 찡그리셨다.
“에르네스트. 친구들이 왔으면 책상 위는 좀 치우지 그러니?”
방 자체는 크게 어질러진 것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책상만큼은 전쟁터였다.
하지만 제삼자가 보기엔 그냥 어질러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에르네스트의 입장에선 나름의 정리 방법으로 체계가 있는 책상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일이에요, 일.”
“……어쩜 자기 아빠랑 하는 말이 이리 똑같을까?”
반쯤은 한숨. 나머지 반은 감탄이 섞인 그 말에 아나스타샤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네스트는 제발 괜한 이야기 좀 하지 말아 달란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에르네스트의 어머니는 방 밖을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좁고 어수선하지 않니? 거실에서 이야기해도 되는데.”
“아니에요, 저희는 괜찮아요.”
“그래? 아…… 피아노가 있어야 하나 보는구나?”
방금 전 짧게 쳤었던 피아노 소리도 다 들으신 것 같았다. 어머님은 우리가 하는 일들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시곤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나가기 직전에 다시 물어보신다.
“아, 혹시 이따가 저녁도 먹니?”
아무래도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였지만,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저었다.
“금방 가려고요.”
“그렇구나. 편히 놀다 가렴.”
어머니가 나가자마자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일이라니까…….”
그러면서도 어질러져 있다고 꾸중을 들은 것이 신경 쓰이는지 주섬주섬 책상 위의 종이들을 종이뭉치로 만들기 시작했다. 난 웃으며 그를 말렸다.
“괜찮아요. 그냥 두셔도.”
“……고마워.”
그는 사실 책상 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듯 이리저리 밀어 두고는 다시 우리 쪽으로 돌아섰다.
잠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다가,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하는 것들을 일이라 칭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 직업에서 오는 업무로서의 일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를 지닌 말이겠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조금 신경이 쓰였다.
“에르네스트도 연주회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말을 해 놓고 나서야 실수했다는 걸 느꼈다. 말 자체에서 이미 내가 렌스키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이 다 드러나 버렸다.
이런 식으로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뭔가 뉘앙스가 이상하게 전달될 것 같아 걱정되었다.
“…….”
에르네스트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미 다 들었으니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전부 이해했을 것이다.
이윽고 그가 대답했다.
“아니.”
난 그렇게 부정하는 말을 두고 깊게 생각했다. 지금 아니라고 답하는 건 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은 렌스키와 다르다는 뜻으로 일단 부정하고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대답이라면 난 아마 그의 진의를 알 수 없…….
“나나 아나스타샤는 열 살도 전부터 연주회를 했었는데, 그게 일이면 아동 노동 금지법 위반이잖아.”
“…….”
“그냥 농담으로 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니 그가 투덜거렸다.
생각도 못 한 지점을 지적하는 그의 농담은 단순한 우스갯소리라기엔 상식적이고 뼈가 있었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던 내 스스로가 정말 바보 같아졌다.
멍하니 지켜보니 에르네스트가 내 옆을 보며 물었다.
“아나스타샤. 넌 피아노 안 쳤으면 뭐 했을 것 같아?”
“……?”
내게 하는 질문이 아닌데도 괜히 내 심장이 다 두근거렸다. 지금 여기에 있는 두 아이가 음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하는 나로선, 둘 모두에게 음악을 그만둘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었단 사실이 종종 섬뜩하게 느껴지곤 했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선 전혀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난데없는 질문이 이상한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 피아노 계속할 거거든?”
“만약에 말야. 피아노를 시작조차 안 해서 이걸 할 생각조차 못 했다면.”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피아노 건반을 하나 쳤다. 가볍게 건반을 눌러서 내는 소리만으로도 그가 피아노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피아노 소리를 듣고서야 아나스타샤도 지금 에르네스트가 진지하게 묻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대답은 짧았다.
“글쎄, 뭐라도 했겠지. 에르네스트 너는?”
에르네스트의 대답 역시 짧았다.
“나도 뭐라도 했겠지.”
정말 무성의한 답변들이었지만 난 그게 두 사람에게 아무 생각이 없어서 하는 말들이 아니라 생각한다.
아나스타샤나 에르네스트나 둘 다 피아노 말고도 재능이 정말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묻는 것처럼 만약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어서 다른 걸 먼저 접했다 하더라도, 그 분야에서 재능을 맘껏 펼쳤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다시 건반을 누를 뿐이었다. 그 소리는 한 번 더, 그가 무엇과 함께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 준다.
“그런데 그 뭐라도를 안 하고 이걸 치고 있는 건, 단순히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은 아닐 거야.”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겠지. 이 건반을 누를 수 없게 될 때까지.”
의심은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일이란 단순한 기술이나 노동이 아닌 사명에 가깝게 닿아 있었다.
언뜻 그의 생각이 내 생각과 닮아 있음을 느낀다. 내게 영향을 받은 걸까. 어느 정도는 그런 부분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만큼 그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그는 날 만나기 전부터 피아니즘에 대한 자신과 확신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던 음악가였다. 음악 자체에 대한 경외와 사명감은 나보다 더 높았으면 높았지 낮을 것 같지 않다.
렌스키 때문에 이상한 의심을 한 것에 대해 정말 미안해졌다.
“괜한 걸 물었네요. 미안해요.”
“별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뭘.”
그는 대수롭잖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런데 조용히 듣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한마디 붙였다.
“별 이야기 맞아. 에르네스트.”
“……?”
“아무것도 아냐.”
아나스타샤 역시 렌스키로 인해 꽤 상처를 받고 있었다. 그가 직접적으로 그녀를 공격한 건 아닐 테지만, 프로 연주자가 보인 방종한 태도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상처가 되었다.
나 역시 조금 우울했었는데 에르네스트와 이야기를 하면서 기분이 나아진 것처럼,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 말은 안 하고 있지만 그녀가 지금 감사해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묘한 분위기가 어색한지 에르네스트는 헛기침을 하더니 이야기를 돌렸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일주일 남았다고 했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건 꽤 기분 좋게 들린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음료가 든 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마시지 않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진 명백했다.
난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잔을 들었지만, 아나스타샤는 거기에 그냥 따라 주지 않고 물었다.
“뭐야, 건배하자고?”
“그래. 원래 같이 일 하기 전엔 이런 거 하는 거야.”
“지금까진 안 했었잖아?”
“그냥 좀 하면 안 되냐……?”
“웃겨 진짜.”
괜한 장난에 에르네스트는 김이 빠진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고, 아나스타샤는 깔깔 웃었다. 그러나 잠시 뒤, 그녀 역시 잔을 들었다.
“자.”
“…….”
“뭐 해? 건배사 안 하고.”
“……성공적인 연주회를 위하여.”
먼저 건배를 제안했던 에르네스트는 세상 하기 싫다는 얼굴로 건배사를 읊었다. 상황이 뭔가 재미있어서 난 숨죽여 웃었다.
뭔가 그가 원하던 분위기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같이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잠시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에르네스트. 그럼 내일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내일?”
“예. 빠르게 회의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바로 이렇게 급하게 이야기를 하는 건 미안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 미룰 순 없었다.
발레리에게 연락해서 에르네스트에게 승낙을 받아 냈다고 하고 곧바로 내일 연주회 회의를 할 생각이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에르네스트의 생각 역시 같았다.
“빨리 해야 하는데 왜 내일까지 기다려?”
그리고 조금 더 적극적이었다.
“지금 하면 되잖아.”
그 말대로였다. 어차피 연주회에 필요한 연주자들은 여기에 다 모여 있다. 이야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 해도 상관없었다.
에르네스트는 더 시간 끌 것 없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연주회에 관련된 자료들 다 나한테 줘 봐. 읽어 볼게.”
“아…… 잠시만요.”
난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지금까지 회의를 하면서 그 내용을 기록해 두었던 노트였다.
연주회 일정과 규모, 예상되는 대상들과 주제 선정 등에 대한 기록. 그리고 나열해 놓은 레퍼토리들과 프로그램이 상세히 나와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자료들을 받아 보더니 물었다.
“다 직접 쓴 거네?”
“예, 정리하다 보니까…….”
“……이렇게 상세하게 해 놨을 줄은 몰랐네. 덕분에 보기 편해.”
“다행이에요.”
에르네스트는 빠르게 글자들을 읽어 내렸다. 내용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어서 그가 다 읽는 데엔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다시 노트를 첫 페이지로 되돌리고는 중얼거렸다.
“만만찮은 기획인데. 렌스키는 이걸 하다가 나갔단 말이지……?”
무언가 생각하는지 그는 노트를 다시 슥슥 넘긴다.
난 그런 에르네스트를 보며 곡들을 어떻게 변경할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의 레퍼토리에 대해선 이미 상당히 잘 파악하고 있다. 때문에 그가 어떤 곡을 꺼내서 흐름을 정렬해보자고 할지 예상되는 바가 몇 가지 있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내 예상과 달리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타티아나.”
“?”
“우리 이거 조금 더 재미있게 해 보지 않을래.”
조금 당황했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규모를 더 키우거나 무게감을 주자는 말이라면 모를까, 재미있게 하자니? 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기분이 되어선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즐겁게 웃더니 말했다.
“무료 연주회라고 해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무시하는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무엇을요?”
“우리가 따라야 할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그 말은 마법처럼 파고들었다.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 역시 에르네스트의 이야기가 흥미가 잔뜩 생긴 표정이었다.
우리는 그대로 회의에 돌입했다. 의견을 나누고, 결과를 예측하고, 계획을 바꾼다. 수십 개의 곡들과 아이디어들이 쟁반 위로 올라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길 반복했다.
난 두 사람을 따라 기획을 내고 노트에 정리하기도 했다.
음료수를 한 잔 마실 정도만 잠깐 있을 예정이었던 방문은 금방 수 시간을 넘길 정도로 길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샤가 돌아왔고, 사샤는 날 보자마자 매달려선 저녁을 먹고 가라며 칭얼거렸다. 내겐 거부할 방법이 아예 없었다.
결국 저녁도 먹고 나서야 우리는 2시간에 걸친 회의를 정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