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561화 (561/1,277)

##  561화

다행히 물에 젖은 사람들을 위한 수건이 곧바로 제공되었다. 우리는 원래 물에 젖어선 안 되는데 공연 중 불상사로 젖은 상황이라 그런지 아예 직원 세 명이 직접 수건을 가지고 왔다.

난 수건을 받아 들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필요하신 거라면 최대한 준비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사람들이 직접 온 데엔 단순히 수건만 주러 온 게 아니라 사과하기 위함도 있는 것 같았다. 한 직원이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 옷이나 가지고 계신 스마트폰 등에 문제가 생겼다면 바로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물에 젖으면 그냥 축축해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옷이나 가방에 따라선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있고, 스마트폰이나 카메라 같은 전자기기는 그대로 고장 나 버리기도 한다. 아예 각오를 하고 스플래쉬 존에 들어가는 것처럼 미리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인 피해를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렇게 조심스러운 건가? 난 혹시나 하면서 직원이 말하는 대로 스마트폰 등을 켜 보았다. 문제없이 잘 작동한다.

“잘 되는 것 같아요.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어떤가요?”

“괜찮아.”

“나도.”

다행히 우리 쪽으로 떨어진 물벼락은 그리 많지 않아서 이 정도로 큰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직원은 조금 안도하는 표정을 보였지만, 다시 한 번 사과해 왔다.

“죄송합니다. 본래 이런 기획은 없었는데…….”

사람에 따라서 불쾌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건 알겠다. 그러나 난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이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괜찮아요. 즐거웠어요.”

“그러시다면 다행이지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된다고 다시 한 번 안심시켜 주었다. 공연은 아직 계속되고 있으니 우리 옆에서 계속 있는 것도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였다.

이만 돌아가도 좋다는 내 의향을 이해했는지 책임자로 보이는 한 직원이 혹시 필요하면 불러 달라며 명함을 건네주고는 돌아갔다.

난 마른 수건으로 다시 한 번 얼굴을 닦았다. 아나스타샤는 젖은 옷을 수건으로 꾹꾹 찍으며 물었다.

“화장을 많이 안 해서 다행이네.”

“그러네요. 아나스타샤도요.”

“난 오늘 액티비티 같은 거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왔거든.”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지 아나스타샤는 거울을 꺼내선 얼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거울을 꺼냈다.

거울 속의 난 마치 물놀이라도 하고 온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히 한 번 웃어 보이고는 거울을 접고 수건을 옆머리에 대었다. 정면에서 딱 한 번 맞은 거라 그리 심하게 젖진 않아서 이렇게 말리면 될 것 같았다.

“머리는 자연스럽게 말려도 되겠죠?”

“응. 그렇게 안 젖어서.”

“그런데 옷이 문제네요.”

“안 비쳐서 다행이네.”

눈으로는 공연을 보면서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옆에 있는 에르네스트의 거리가 조금씩 더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에르네스트는 약간 저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혼자만 젖지 않은 것에 대한 묘한 죄책감과 우리 대화에 낄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복잡한 심리 같은 게 어쩐지 느껴졌다.

그냥 내버려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괜히 한 번 불러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에르네스트.”

“뭐가?”

그는 시치미를 뚝 떼며 반문했다. 난 키득거리며 물었다.

“혹시 이만 집에 가시려는 건 아니죠? 물에 젖은 저도 괜찮은데.”

“가긴 어딜 가? 그런데…… 괜찮겠어?”

“괜찮고말고요.”

난 다시 수면을 뛰어오르기 시작한 돌고래들을 보며 웃었다. 바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방법은 많았다.

아나스타샤에게 곧장 제안했다.

“우선…… 공연 마치고 나면 옷부터 사러 갈까요? 어떤가요?”

“그럴까? 보니까 바로 옆에 쇼핑센터던데.”

“예. 맞아요.”

“이름이 웃기더라. 베가스라니.”

미국에 있는 라스베가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름만 특별해 보일 뿐이지 그냥 더 평범한 쇼핑몰이었다.

“카지노는 없었어요.”

“있어도 못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우린 실없는 소리를 나누었다. 그렇게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원래 계획엔 없었지만 쇼핑을 조금 해야 할 것 같다.

약 30분 정도 되는 돌고래 쇼는 돌고래와 사육사들의 화려한 춤으로 끝났다. 우리는 일어나선 수건을 반납하고 공연장 밖으로 나왔다. 겨우 10여분 만에 젖어 있던 머리칼이나 옷은 어느 정도 마른 상태였다. 그래도 축축하긴 하지만.

이 상태로 움직여도 괜찮을까 싶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우리보다 훨씬 더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럼 쇼핑몰로 가 볼까?”

“좋아요.”

크로커스 시티의 쇼핑몰, 베가스는 이곳 오셔너리움과 바로 붙어 있었다. 우린 건물에서 나갈 필요 없이 곧바로 쇼핑몰로 이동할 수 있었다.

베가스는 굼백화점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1층과 2층은 의류나 신발, 액세서리 등을 판매하는 메이커 매장들이 들어서 있었고 3층과 4층은 영화관과 피트니스 센터 등의 놀이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층수는 그리 높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 크기가 굉장히 넓어서 그냥 걸어서 다 돌아다니려면 하루를 종일 써도 모자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기 어때?”

“가 볼까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당장 갈아입을 옷이 필요했으므로 여기저기 구경하며 돌아다닐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나는 일단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유명 캐쥬얼 매장으로 들어갔다.

“와, 신상 진짜 예쁘게 잘 나왔다. 타티아나,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순식간에 이곳저곳 다니면서 손에 옷들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난 그녀와 있을 때면 늘 그런 것처럼 옆에서 따라다니며 조금씩 의견을 내기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여기서 적어도 옷을 한 벌씩은 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별로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무것도 살 생각이 없는 건 괜찮지만, 저렇게 아예 어디 다른 곳으로 가지고 못하고 서성이는 모습을 보니 그냥 내버려두기도 뭐 했다.

“에르네스트.”

“왜?”

“마음에 드는 옷이 있다면 골라 보세요. 제가 사 드릴게요.”

“……?”

나도 모르게 옷을 사 주겠단 말이 나왔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미리 선수를 쳤다.

“설마 왜냐고 물으실 건 아니죠?”

“아니…… 물어보는 것도 안 돼?”

“당연하죠. 에르네스트는 제게 받을 게 많은 사람이에요. 묻지 마세요.”

이곳에 이 아이들과 함께 온 건 이전에 했던 모스크바 메세나 협회 주최 연주회에 대한 감사의 뜻이었다.

어떠한 계산이나 보상 같은 의미는 아니니 이미 충분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이 애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더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딱딱하게 계산을 한다 하더라도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지고 있는 빚이 훨씬 더 많아서 이 정도로는 청산하지 못할게 분명했다.

이참에 조금식이라도 갚아 나갈 필요가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주고받는 것에 대해 확실한 성격이긴 하지만 살짝 난색을 표했다.

“난 그런 걸 바란 적이 없는데.”

“바라지 않는 것을 얻는 일도 있는 법이죠. 자, 어서요. 이쪽이네요.”

“…….”

“정 그러면 제가 골라 드릴까요?”

“뭐? 아니? 괜찮아.”

그가 깜짝 놀라더니 내 옆에 서선 직접 옷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뭐든 상관없었다. 난 웃으면서 그의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아나스타샤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물었다.

“에르네스트도 산다고 하니?”

“그러네요.”

“음…… 그래?”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살짝 틀며 에르네스트 쪽을 보더니, 히죽 웃으며 손에 든 옷을 들어 보였다.

“이거 입어 보고 올게.”

“전 이것으로 할까요.”

“응. 그게 좋겠다.”

그렇게 나와 아나스타샤는 따로 떨어져 탈의실로 들어갔다. 사실 샤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젖은 옷을 벗어선 차곡차곡 개어 놓고 새 옷을 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거울을 보며 팔을 들어 보기도 하고 옆으로 돌기도 하고 있었다.

“예뻐요. 아나스타샤.”

“그러니? 타티아나 너도 진짜 잘 골랐다.”

짧은 품평회가 있었지만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서로 바로바로 고른 것치고는 꽤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이젠 에르네스트만 남았으니 어떨까 싶어 돌아보는데, 어딘가 낯이 익은 중년의 남자가 저편에 보였다.

“타티아나?”

“?”

그런데 그 남자가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난 깜짝 놀라 어깨를 옹송그렸다.

키도 크고 매서운 인상의 남자였다. 나이는 50대 정도. 주변에 수행원들이 따라다니는 것으로 보아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자, 놀라고 당황스러움 뒤에서 내 머리는 그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기억이지만, 생각해 내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책갈피로 책을 탁 펼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 세상에.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쾌활하게 알은척을 하고 있지만, 그는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난 기억 속에서 펼쳐진 페이지의 가장 위에 있는 이름을 읽어 내고, 입을 열어 말했다.

“바기트 아라조비치?”

“하하하하, 그래! 기억하는구나!”

바기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그가 보였던 안타까움이 조금 옅어졌다.

그는 조금 주저하던 모습을 지워 버리곤 조금 더 다가와선 가볍게 포옹했다. 낯익으면서도 조금 어색한 기분이다. 하지만 그를 밀어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기트 아라조비치 예고로프. 난 그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고,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물론 한참 전 이야기이다.

“저번에 봤을 땐 정말 걱정했었는데…… 건강해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타티아나.”

“아…… 감사합니다.”

재작년경 혼수상태에서 일어났을 때, 바기트는 내 병문안을 오기도 했다. 그러나 난 그때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때였으니 바기트가 얼마나 걱정했을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날 놓아준 바기트는 내 뒤편에 있는 친구들을 보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타티아나의 친구들도 반갑군. 크로커스 그룹의 이사 바기트 아라조비치 예고로프라 하네.”

“처음 뵙겠습니다. 바기트 아라조비치. 이 애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라 해요.”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베샤스트니흐입니다.”

그는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듣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베샤스트니흐라면…… 아, 스테판의 아들이겠군. 타티아나와 친한 것도 당연한가.”

아마 에르네스트의 아버지와 사업적으로도 알고 지내시는 모양이다. 에르네스트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바기트는 가볍게 웃더니 이렇게 날 찾아온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처음에 인사를 할까 생각했는데, 유리와 함께 온 게 아니라 친구들과 있다면 괜히 내가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단다. 그런데 돌고래 공연장에서 사고를 당했단 보고가 들려왔지 뭐냐.”

당황스러웠다. 그걸 사고라고 보고받으셨다고요?

바기트는 이곳에서 굉장히 높은 직위의 사람이었다. 난 혹시나 공연 관계자들에게 불이익이 갈까 싶어서 빠르게 부정했다.

“사고라뇨, 돌고래가 물을 튀겼을 뿐이에요.”

“그게 사고지.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왔단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도, 아나스타샤도 괜찮았어요. 이사님이 직접 이렇게 신경 쓰실 일이 아니에요.”

일단 상황을 가볍게 일축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꺼냈던 건데, 막상 하고 나니 바기트가 듣기엔 그리 좋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말해선 안 되겠다 싶어서 일단 고민을 하고 있자니, 바기트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예전도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타티아나.”

“……예?”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조금 옅어졌던 안타까워하는 눈빛이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난 그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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