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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562화 (562/1,277)

##  562화

에르네스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타티아나와 바기트가 이야기하고 있고 매장 밖은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몇 명이나 뒷짐을 지고 대기하고 있었다. 당연히 매장 주인은 물론이고 손님인 사람들도 이쪽을 피하려고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타티아나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그녀가 지닌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오자마자 바로 VIP로 안내되었고, 곧바로 이사에게 보고가 들어갔다.

심지어 돌고래 쇼를 보다가 물벼락을 맞았다고 해서 이사가 직접 달려올 정도였다.

타티아나가 바라건 바라지 않건 그건 그녀가 속해 있는 환경이었다. 이런 상황을 가끔 볼 때면,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생각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 환경에 대해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이젠 어느 정도 안다.

타티아나는 모든 것에 조심스럽고 생각 없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황 역시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평소엔 물론이고 이렇게 밖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베르체노프의 이름값을 마음껏 쓰고 다니는 아이였다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해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미스테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타티아나와 바기트는 살짝 떨어진 곳에서 그간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굳이 이야기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다 들리도록 이야기하는 걸 피할 순 없었다.

“유리는 얼마 전에 봤고…… 루슬란은…….”

“오빠도 잘 있어요. 놀러 갈 곳으로 여기를 추천해 준 것도 오빠인걸요.”

“……루슬란이 추천했다고?”

“예.”

“하하…… 그렇구나. 잘됐구나.”

바기트는 가볍게 헛웃음을 터뜨리며 안도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은 약간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가 아는 한 타티아나는 루슬란과 놀러갈 곳을 추천받는 정도는 얼마든지 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바기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지금 이야기에 참가하진 못하고 있었다.

“…….”

그는 사실 아나스타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의문들은 어느 하나 진의여부가 확인이 안 된 추측들뿐이니 마치 퍼즐이 다 흩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퍼즐들이 어지럽게 되어 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하나 쉽게 물어볼 수 없었고, 만약 물어보더라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오늘 세 명이 있는 시간에 충실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건 그녀의 완전한 진심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거기에서 엇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가 오늘 이 시간 자체에 충실하길 바란다면, 그 역시 그러할 뿐이다.

“아나스타샤.”

“응.”

“옷은 그걸로 하려고?”

“응.”

“잘 어울리네.”

“뭐니? 그 진심이 하나도 안 느껴지는 칭찬은.”

조금 뜬금없었던 모양이다. 아나스타샤가 무슨 수작이냐는 듯 눈을 흘겼다. 에르네스트는 이래도 모르겠냐는 듯한 투로 말했다.

“뭐긴 뭐야. 입발림이지.”

“죽을래?”

아나스타샤는 낮게 중얼거렸지만 화를 내고 있진 않았다. 그냥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지금 제일 낫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사실 아나스타샤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타티아나와 바기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저 사이에서도 충분히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타티아나가 가장 신뢰하는 친한 친구였고, 바기트는 타티아나의 평상시 생활에도 상당히 걱정과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 같은 학교 친구로서 이야기를 한다면 할 이야기가 많겠지.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잠시 이야기가 따로 오갔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적당선에서 이야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아, 바기트 아라조비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녀는 누군가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늘 신경을 쓰는 사람이지만,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 그렇지. 이야기가 길어졌군.”

바기트도 처음 이야기했던 것처럼 타티아나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는 나지막이 웃으며 물어보았다.

“다른 문제는 없고?”

“전혀 없어요. 좋은 곳이라 만끽하고 있어요.”

“하하, 고맙구나.”

바기트는 타티아나와 잠깐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훨씬 더 안도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전부터 타티아나를 알아 온 사람이겠지. 에르네스트는 바기트가 하는 말들에서 거의 태반을 이해하지 못했다. 타티아나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많이 아팠다거나, 그녀의 앞에서 루슬란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해야 한다거나.

하지만 괜히 궁금해지거나 물어볼 생각이 들진 않았다. 타티아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깊게 알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표면적인 부분에 있지 않았다. 몇 가지 사건들을 전해 듣는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었다. 중요한 건 그녀가 직접 이야기하는 말들이었다.

적어도 지금 그녀는 바기트보다는 친구들을 우선시하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충분했다.

“그럼 오늘 있었던 일은…….”

바기트도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는지 팔짱을 끼고는 주변 매장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매장에서, 아니지. 크로커스 시티 안의 어디라도 오늘은 아무 신경 쓰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내가 처리해 둘 테니, 가져가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 가지고 가려무나. 네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고.”

“예? 바기트 아라조비치, 그건 너무 실례가…….”

“실례라니, 전혀. 네게도 그리고 유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최소한의 할 일이지.”

비즈니스 관계로 아는 사람의 딸이 놀러 왔다가 돌고래에게 물벼락을 맞았다면 이 정도 서비스는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바기트의 목소리에선 그보다 조금 더 진지한 감정이 느껴졌다.

타티아나도 처음엔 당혹스러워하며 몇 번이나 사양 의사를 밝혔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호의를 받아들임을 확인한 바기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도록 하마. 나중에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예…… 저도 그래요.”

“즐거운 하루가 되길.”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바기트는 다시 수행원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매장 전체가 꽉 붙잡혀 있는 느낌이었는데, 순식간에 축 풀어졌다.

바기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타티아나는 다시 에르네스트 쪽으로 돌아왔다.

그녀도 조금 놀라고, 어떻게 다시 이야기를 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모습이었다.

“놀라셨죠?”

“약간. 그런데 티켓을 보고 예상하긴 했었어.”

“그런가요……?”

VIP티켓이라는 걸 타티아나가 가지고 왔을 때부터 이곳의 높은 사람과 연관성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지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타티아나는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한 번쯤 인사를 드렸어야 할 분이었어요. 잘 되었네요. 이렇게 짧게 만나서 괜찮을진 모르겠는데…….”

“상당히 반가워하시던걸.”

“그렇네요. 약간…… 죄스러워요.”

아마 어릴 때 보고는 그간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타티아나가 느끼는 죄책감은 그런 데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가 보기엔 참 이해하기 어려운 죄책감이었다. 그녀와 직접 친분이 있다기보단 아버지와 연관이 있는 분 같은데,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면서 아무 말이나 할 순 없었다. 에르네스트 대신 옆에서 가만히 있던 아나스타샤가 토닥이듯 말을 꺼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정말 반가운 게 아니라면 가져가고 싶은 건 다 가져가라는 말 같은 건 쉽게 하지 않으셨을걸. 이렇게 큰 쇼핑몰에서.”

“아하하…….”

바기트가 딱히 섭섭해하거나 하는 모습은 없었다. 직접 달려와 걱정하고, 백지수표를 던져 주듯 마음껏 하라고 한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도 없었다.

타티아나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눈을 마주했다.

“이래도 될까 싶지만 그래도 너무 거절하진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겠죠?”

그냥 돌아가 버린다거나 비용에 대한 고집을 부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실례되는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이 크로커스 시티를 조금 더 즐길 필요가 있었다.

너무 무겁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마음대로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도 타티아나가 정말 마음대로 할 리 없었고, 크로커스 그룹의 이사쯤 되는 사람이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리 없었다.

아나스타샤도 킥킥 웃으며 말했다.

“쥬얼리숍을 통째로 턴다거나, 그런 식만 아니라면 뭘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조금 심하네요.”

“네가 그렇게 못 할 애라는 건 알아.”

타티아나는 그 말에 반박할 생각은 별로 없어 보였다. 옅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옷 한 벌은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응.”

“아나스타샤는 그걸로 괜찮나요?”

“당연하지.”

“에르네스트는요?”

이것저것 보긴 했지만 그는 괜히 의류매장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거나 집는 건 타티아나의 호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였고.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일단 다음으로 넘기기로 했다.

“난…… 됐어. 그냥 다음에 보지 뭐.”

“그래도…….”

“아냐, 썩 마음에 드는 게 보이질 않네.”

꼭 이 매장에서만 옷을 사 줘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타티아나도 무작정 억지로 그의 손에 무언가 쥐여 줄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시나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아나스타샤와 함께 두 사람분의 옷만 그대로 입은 채로 가기로 했다.

매장 주인은 태그만 찍어 가고는 결제를 받진 않았다. 나중에 그 영수증을 바기트가 결제해 준다면 문제는 없을 테니 대수롭잖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매장에서 나온 세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제안했다.

“일단…… 식사를 하러 갈까요? 어떠신가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좋아. 그러자.”

“벌써 점심이긴 하네.”

매장 배치도를 보고 안내를 따라가니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나왔다. 큰 쇼핑몰이니만큼 푸드코트가 아니라 레스토랑들이 잔뜩 입점해 있었다.

그중 한 레스토랑에 이미 타티아나가 세 명분의 예약을 해 둔 상태였다. 그녀가 얼마나 고심 끝에 골랐을지 안 봐도 훤했다.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 않고 타티아나를 따라갔다.

“와, 이런 걸 쇼핑몰 레스토랑에서 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세팅된 좌석에 앉자마자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캐비어와 체리가 올라간 빵이 먼저 에피타이저로 나왔고, 그다음으론 코코넛 무스와 전복 요리가 올라왔다.

보기엔 평범한 레스토랑 같은데, 나오는 요리들을 보니 파인다이닝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곳의 드레스코드가 없는지 다시 확인했을 정도였다.

메인 디쉬로는 훈제 사슴 요리와 라끌렛이 선사되었다. 파인 다이닝에 오면 사실 맛은 둘째치고 양에서 부족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이곳은 양도 상당했다. 에르네스트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할 수 있었다.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비우니, 웨이터가 와서 식사가 어떠했는지 묻고는 타티아나의 이름으로 예약된 영수증을 내려놓았다. 청구된 금액은 없었다. 그래도 타티아나는 팁을 잊고 지나치진 않았다. 적절한 금액을 팁으로 내려놓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으셨나요?”

밖으로 나온 타티아나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열심히 감탄해 가면서 식사하는 걸 다 봤으면서 이제 와서 뭘 묻는 건지 모르겠다.

그녀도 불필요한 질문이었다는 걸 느꼈는지 배시시 웃었다.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이에요. 그러면…… 이번엔 어디로 가 볼까요? 시간이 조금 비었네요.”

계획한 스케줄에 여유가 있는지 타티아나가 느긋하게 말했다. 딱히 어렵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당장 가까운 어디든 가 볼 곳이 수두룩했다.

“발 닿는 대로 가 보지 뭐.”

“그럴까요?”

특별한 의견 없이 세 사람은 무작정 쇼핑몰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식의 목적 없는 배회를 즐기지 않는 성격이지만,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를 보고 있자면 어떤 장소든 어떤 시간이든 괜찮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두 사람이 좋다면, 에르네스트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길 몇 분.

무언가 발견한 타티아나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 저기.”

“?”

그녀가 가리키는 곳엔 음향 전문 매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은 바로 저기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순간 웃어 버릴 뻔했다. 아무렴 그렇지,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음악가들이 결국 이끌리는 곳은 음악을 다루는 곳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 타티아나에겐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에르네스트, 이어폰 필요하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어?”

“가 보죠.”

“지금?”

“물론이죠.”

타티아나는 지금 아니면 언제 가겠냐는 듯 앞장섰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알면서도 말리지 못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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