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1화
파이널 이튿날의 막심 선배와 니콜라이 선배의 무대는 정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난 두 사람이 모두 각 부문에서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럴 확률은 굉장히 낮겠지만, 각각 최고로 인정받는 두 사람이 모두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건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한 명 더. 내가 전문으로 하는 피아노 부문에서 응원하는 친구의 마지막 무대가 남아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서 정말 기쁘구나. 처음엔 저번 연말 연주회 때 봤었지…… 그 후로도 정말 이야기 많이 들었단다. 이 애가 네 이야기라면 얼마나…….”
“엄마, 제발.”
마지막 날은 예카테리나의 무대가 있는 날이었다. 미리 관람을 약속했었던 예카테리나의 부모님들도 멀리서 비행기를 타고 오셔선 이미 함께 계셨다.
때문에 예카테리나를 만나러 온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부모님과도 인사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어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들은 굉장히 편하게 우릴 대해 주셨다.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고 우리가 어떻게 예카테리나와 친해졌는지 말씀드리고 나자, 예카테리나의 어머니는 굉장히 기뻐하시며 적극적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셨다.
대부분 예카테리나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당사자는 질색을 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상당히 장난기가 짙은 분이셨다. 난 그 장난기에 약간 물들어 살짝 거들었다.
“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나요?”
“그렇고말고? 이번에도 며칠이나 집에 초대해 주었다고 들었는데…… 정말 고맙구나. 이 애가 늘 씩씩하게 지낸다는 건 알지만 사실 생각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서 말이지…….”
“아 진짜!”
내가 반대 입장이었어도 창피해서 어디론가 도망쳤을 것 같은데, 예카테리나는 바락 소리를 쳤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왜 화를 내냐는 표정으로 예카테리나의 어머니가 돌아보자, 그녀는 다시 한 번 벌컥 화를 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제발 살려 달라는 것처럼 보이기만 했다.
“이 애는 나보다 어리다고.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하니? 저번엔 네가 분명…….”
“악!”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진 모르겠지만 예카테리나는 그 이야기가 다 나오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궁금하긴 했지만 예카테리나가 죽을 정도의 일이라면 안 듣는 게 낫겠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어머니의 입을 막으려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엔 휙 뒤돌더니 내 손목을 잡곤 사납게 말했다.
“타티아나! 얘들아! 이리 와. 우리 다른데 가서 이야기 해. 도저히 안 되겠어.”
“얘 좀 봐? 와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이렇게 내팽개치…….”
“그렇게 만들잖아.”
“알았어. 알았어. 안 할게. 안 하면 되지? 예카테리나. 우리 착한 딸.”
“진짜…….”
하지만 결국 이길 순 없었는지 우울하게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옆을 살짝 보니 아나스타샤와 눈이 마주쳤다. 안쓰럽다는 표정과 동시에 나도 저렇게 보였을까 하는 걱정이 함께 엇비친다. 그녀도 집에선 장난을 당하는 입장에 처하는 경우가 많은지라 이 상황에 굉장히 몰입이 되는 것 같았다.
난 말없이 웃기만 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기분이 든다. 장난이 많이 오가긴 해도 그만큼 정말 화목하고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가족이었다.
예카테리나가 솔직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잘 내는 건 그녀의 가족들에게서 좋은 영향을 잘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피아노 연주자 예카테리나를 이루는 일부분을 살짝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모녀간의 소란이 지나가고, 이번엔 예카테리나의 아버지가 나와 에르네스트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난 저번 연주가 기억이 나는군. 두 사람이 듀엣 연주도 했었지?”
당시 우린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를 연주한 적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참 인상적인 곡이라 기억하고 있지. 그런 친구들이 예카테리나를 응원하고 있다니 안심이 되는구나.”
직접 들은 음악으로부터 우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신 듯한 말이었다. 이전에 듣기로 음악가는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는 확신을 갖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딸의 친구뿐만 아니라 연주자로서도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난 감사를 표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그래.”
호탕한 웃음소리에 또 한 번 미소가 번진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에선 거의 나와 예카테리나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주로 말했다. 그런데 그런 흐름을 어머니도 곧 아셨는지 반걸음 정도 물러서며 시간을 확인하셨다. 곧 예카테리나가 자신의 무대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어머님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전부 우리에게 주셨다.
“그럼 가서 친구들과 이야기하렴.”
“그럴 거야. 그리고 아마 대기실에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울 테니 두 분은 요 앞에서 기다리시다가 안내 나오면…… 알죠?”
“알다마다?”
딸이 연주자인데 그것도 모르겠냐는 듯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하시던 예카테리나의 어머니는, 곧 팔을 뻗어 예카테리나를 끌어안았다. 축복과 응원이 따뜻한 목소리를 타고 흐른다.
“우리 멋진 딸. 잘 할 수 있을 거야.”
“…….”
“걱정 말고.”
“네.”
아까까지만 해도 창피한 건 싫다고 하던 예카테리나도 지금만큼은 조용했다.
우린 예카테리나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마치길 기다렸다가, 우리도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는 다 함께 배정받은 연습실로 향했다.
평소 혼자 있을 땐 그렇게 당차고 멋졌던 예카테리나는 어딘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다. 난 그녀의 옆에서 웃으며 물었다.
“좋은 분들이네요.”
“아, 창피해 진짜…….”
“후후.”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전혀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한동안 난 그녀의 부모님들의 첫인상이 너무 좋았음을 예카테리나에게 말해 주었다.
배정받은 연습실에 도착한 우리는 저마다 앉을 만한 곳에 앉았다. 오래 이야기할 틈은 없었다. 예카테리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지고 온 봉투에서 캔음료를 꺼냈다.
“이거 마실래? 아까 사 주셨던 건데. 난 마셔서.”
“그래도 되나요?”
“응, 너희들도.”
“고마워.”
음료수는 딱 네 캔이어서 각자 한 캔씩 돌아갔다. 발렌티나가 건배를 제안했고 아나스타샤 역시 동의했다. 예카테리나는 자긴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건배냐고 말했지만, 에르네스트가 그럼 주먹이라도 가져다 대면 되지 않냐며 해결책을 제시하자 별수 없이 건배에 응했다.
그렇게 네 개의 캔과 한 사람의 손이 맞닿는 묘한 건배가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느낌이 이상한지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연신 웃는 모습이 기분 좋아 보인다.
난 한 모금 마신 음료수 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모님도 와 주셨고…… 오늘 잘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큰 무대이지만 잘 해 볼려고.”
그녀에게서 긴장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평온한 분위기가 목소리에 묻어나오고 있어서, 난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젠 혼자 있게 해 줄 때였다.
“저희도 이것만 마시고 갈게요. 준비하셔야죠?”
“응…… 그건 그렇지.”
슬슬 가 보려고 하는데 예카테리나는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가 용건이 있으면 말하란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있잖아, 에르네스트.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나한테?”
“응.”
지금 콩쿠르 당사자는 예카테리나다. 때문에 우리가 그녀에게 궁금한 게 있다면 모를까, 그 반대는 잘 없을 텐데. 에르네스트도 비슷하게 생각하는지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뭔데?”
“그…… 루카스 맥케이라는 피아니스트 있잖아. 파이널 첫째 날에 연주했었던.”
그리고 예카테리나는 뜻밖의 질문을 꺼내들었다.
물론 이미 해결된 일이니 아무 문제 없지만, 어떤 경로로 그녀가 알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에르네스트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아예 대놓고 한발 더 나가기도 했다.
“알지. 내가 벨소리를 울려서 피해를 끼치기도 했거든.”
“그랬었다며?”
“맞아. 중계 봤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아까 대기하는데 직원이 와서 프로그램 확인하면서 이야기해 주더라고. 루카스 맥케이가 자신의 프로그램이 잘못되었음을 전혀 모르고 무대에 오르는 일이 벌어져서, 나머지 파이널리스트들도 모두 확인 중이라고.”
막심 선배가 그냥 프로그램 확인만 했던 것에 비해 예카테리나를 상대했던 직원은 왜 다시 확인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준 것 같다.
예카테리나는 다시 생각해 봐도 황당한 일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네가 연주를 중단시킨 덕분에 루카스 맥케이도 피해를 보지 않고 다른 관계자들도 간신히 살았다고 하더라.”
에르네스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행이네.”
“그런데 그거 네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니?”
기습적인 질문이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똑같은 질문을 받네. 왜, 그런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 같은 완벽주의자가 그런 실수를 할 것 같진 않아서.”
“내가 왜 완벽주의자야? 나도 실수 많이 해.”
“지금 말하는 걸 들으니까 더 의심 가는데?”
루카스는 행운의 여신을 언급하며 가볍게 넘어갔지만, 예카테리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이 운 좋게 정확한 타이밍으로 벌어질 순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무작정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쪽으로 초점을 좁히는 정도로 정리하려는 것 같다.
대신 그는 날카로운 칼날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가만있을 걸 그랬나?”
그냥 망치게 놔두지 그랬냐는 둥 말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태세였다.
난 덜컥 불안감이 들었다. 예카테리나가 그렇게 말하지 않으리라 믿지만, 그래도 지금 어떤 말이 나올지 완벽하게 확신할 순 없었다.
그렇게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윽고 예카테리나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태연히 말했다.
“아니? 잘 했다고 말해 주려고.”
불안은 그저 불안일 뿐이었다. 내가 본 그녀는 틀리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도 예리한 눈빛을 거두더니 피식 웃었다.
“난 지금 네가 말하는 걸 들으니까 제대로 말해야겠단 생각이 드네.”
“응?”
“사실 타티아나가 했어.”
갑자기 이렇게 밝혀 버릴 줄은 몰랐는데?
난 예카테리나의 시선을 받고는 조금 당황했다. 그녀는 미리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듣고 왔으니 더 상세한 이야기를 들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갑자기 이야기하려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당황해하는 나 대신 예카테리나가 먼저 말했다.
“네가 그 상황을 알아차리고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건 거였어?”
“……맞아요.”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자 예카테리나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타티아나.”
그리고 갑자기 와락 껴안아 버렸다.
“난 너랑 친구라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러워.”
이런 말까지 듣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나는 잠시 굳어 있다가, 조심스레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예카테리나는 잠시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곧 천천히 물었다.
“벨소리를 일부러 울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니? 단순히 루카스 맥케이를 반드시 도와야겠다는 생각? 혹시, 혹시 내 생각이 들진 않았어?”
“……들었어요.”
난 딱히 부정하지 않고 인정했다. 어제 발렌티나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예카테리나를 위해서 가만히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대답을 들은 예카테리나는 더 기뻐했다.
“네가 만약 조금이라도 내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난 네 긍지를 망가뜨렸단 생각 때문에 정말 슬펐을 거야.”
“……!”
“그렇게 하지 않아서, 그리고 날 믿어 줘서 고마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난 그녀가 그렇게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나 또한 해 줄 말이 많았다. 내가 의지와 긍지를 관철할 수 있었던 건 예카테리나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말보다 더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루카스의 연주를 보셨죠.”
“응. 대단하던걸.”
지금만큼은 친구로서 당연한 애정을 담아, 명예로운 그녀에게 전했다.
“이기고 오세요.”
“알았어. 타티아나.”
예카테리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