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22화 (622/1,277)

##  622화

난 연주자의 입장으로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하지만, 청중 된 입장으로 청중석에 앉는 것 또한 좋아한다.

이 거대한 건축물 가운데에 앉아서 음악에 집중하면 음악이 가져오는 근원적인 숭고를 하염없이 만끽할 수 있다. 왜 사람은 공기의 떨림에 감동하는가. 그 이유를 알 필요 없이 그저 주어진 선물에 감탄할 수 있는 자리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깊게 들여다보면, 한 연주자의 목소리이자 개성 그리고 철학까지 한꺼번에 느껴진다.

음악 애호가로서 나는 그러한 부분 역시 굉장히 흥미롭고 맛있게 즐길 수 있었다.

잘 모르는 연주자라 할지라도 두어 시간에 달하는 무대를 한 번 보고 나면 어쩐지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 들고, 밖에서 인사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들곤 한다. 사람들을 사귀는 데에 그리 능숙하지 못한 내게 있어서 그렇게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는 마음이 든다는 건 꽤 고무적이고 흡족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친한 연주자가 무대에 선다면 말할 것도 없다.

이미 서로 많은 음악적 대화를 나누어서 그 음악이 어떤 색인지 어떤 감촉인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흥미가 줄어들진 않는다. 되레 다른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만족했었던 대화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인다.

때문에 내 마음은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다가도 긴장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직접 무대에 설 때보다 더했다. 내가 연주자라면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겠지만, 청중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고 응원하는 일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

물론 연주가 시작되기 전이라면 조금쯤은 할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난 객석에 허리를 붙이지도 못하고 무대 쪽으로 집중했다. 스테이지 매니저라도 된 기분으로, 혹시나 무대에 조금이라도 트러블이 있을까 긴장된 눈으로 살핀다.

머릿속엔 루카스가 겪을 뻔했던 일이 맴돌고 있었다. 물론, 예카테리나가 소통에 문제를 겪을 일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세상에 절대라는 건 절대 없다는 걸 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타티아나. 편하게 봐. 편하게.”

“…….”

옆자리의 아나스타샤는 내가 무슨 생각인지 머릿속이 훤하다는 듯 작게 소곤거렸다.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난 일부러 온몸의 힘을 늘어뜨렸다.

절대에 가깝도록 희박한 일들을 걱정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는 어디 하나 모자란 곳 없이 이 자리에 서기에 충분한 연주자였다. 그녀의 운명에도 온전한 한 번의 기회가 분명히 허락되리라. 난 그리 믿었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잠시 기다리자, 연주자를 소개하는 안내와 함께 예카테리나가 무대 뒤에서부터 걸어 나왔다.

“!!”

천둥 같은 박수가 일었다. 그 엄청난 환영 속에서 예카테리나는 조금도 위축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곧은 자세로 당당히 무대 정 가운데에 섰다.

지휘자, 악장과 인사하고 객석으로 인사를 보내는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예카테리나는 사람들에게서 기대감을 이끌어냈다.

난 아무 위화감 없이 한 덩어리로 얽혀 있는 것 같은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연주자를 보면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같은 곡…….’

갑작스레 홀 전체를 높게 던져 올리는 듯한 음향.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면, 오보에가 그리는 풍경이 눈앞에 선하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예카테리나가 파이널 무대에 준비한 두 곡 중 한 곡이었다.

이 곡은 루카스가 앞서 연주했던 곡이기도 했다.

피아노 부문 파이널 레퍼토리인 피아노 협주곡 두 곡 중에 한 곡은 차이코프스키로 고정되어 있고 다른 한 곡은 자유곡이다. 수백 곡도 넘는 피아노 협주곡 중 한 곡을 골라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단 7명밖에 안 되는 파이널리스트들 사이에서 이 자유곡이 겹치는 일은 확률적으로 굉장히 낮은 일이지만, 생각보다 자주 벌어지기도 한다. 콩쿠르 자체가 지니는 테마와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음악적 흐름을 고려하다 보면 추려낼 수 있는 곡들은 한정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카테리나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골랐다. 난 그녀의 협주곡 연습을 도와주면서 이 곡에 꽤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고, 그 덕분에 루카스에게 벌어질 뻔했던 사태를 막아낼 수도 있었다.

어떠한 인과나 필연 등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난 내 판단으로 루카스가 공정하게 자신의 기회를 활용해 이 곡을 무대에서 온전히 연주하길 바랐고, 예카테리나는 그런 날 자랑스럽다고 칭찬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예카테리나는 같은 곡으로 경쟁자와 정당히 마주할 수 있는 이 상황에, 굉장히 기뻐하고 있었다.

“…….”

루카스가 보여 주었던 음악을 완전히 덮어 버리겠다는 듯 예카테리나는 양손에 음악을 쥐고 흩뿌렸다.

콩쿠르 심사는 되도록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심사를 하기 때문에 악보와 레퍼런스 해석에 충실한 연주를 잘 하는 것이 점수 따기에 좋지만, 이 또한 사람이 듣는 음악. 결국 본질적인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뒤흔드는 음악이 더 깊게 각인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오케스트라와 조화롭게, 그리고 다채롭고 선명하게. 예카테리나라는 연주자가 지닌 음악이 여실히 드러난다.

첫 악장을 몇 분간 들으면서 난 느꼈다. 가끔 무대를 보면서 느끼곤 하는 확신이었다.

루카스도 파이널리스트에 걸맞은 정말 훌륭한 연주자였지.

하지만 적어도 슈만에 있어서는 예카테리나가 이겼다.

친애가 아닌 순수한 감탄으로, 난 정면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휩쓸렸다.

***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의 음악전문기자 에민은 머릿속으로 바쁘게 오늘 기사들을 써 내렸다.

모스크바 음악원 영재 클래스의 탁월한 선택. 예카테리나 발레예브나 브류하노바.

어려서부터 큰 두각을 보여 아르카디 세르게예비치 교수의 눈에 들었으며 러시아는 물론 유럽 등 국제적인 활동.

이제 청소년기의 그 화려한 이력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성인 피아니스트로서…….

“…….”

물론 이러한 문장들은 다른 6명의 연주자들에게도 모두 준비되어 있었다. 최종 결과 발표는 오늘 밤 10시가 넘어서야 나오겠지만, 기자들은 그 모든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를 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0년 가까운 긴 음악전문기자 생활로 생긴 직감이 에민에게 말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의 기사가 내일 지면에 가장 크게 실릴 것 같다고.

“……음.”

에민은 다리를 바꿔 꼬면서 다시 무대를 바라보았다. 지금 연주되는 곡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이틀 전 미국의 루카스 맥케이가 연주했던 것과 같은 곡이었지만, 같지 않은 곡이었다.

조금 더 화려하면서도 차이코프스키적이고, 따뜻함과 동시에 열정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멋진 음색이었다.

지휘자 레프 역시 그녀의 열정에 취해 버린 것처럼 지휘봉을 흔든다. 레프의 평소 지휘법에 대해 잘 아는 에민은 지금 그가 굉장히 심취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당연히 오케스트라 역시 지휘자를 따라 움직였다. 무대 위의 수십 명이 하나로 조화된다.

예카테리나가 그야말로 낭만적인 몸짓으로 건반을 누른다. 멀리서 보면 마치 피아노를 휘두르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소리를 높여 나가는 오케스트라.

“…….”

멍하니 떠오르는 문장들을 주워 담으면서 음악을 감상하던 에민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동료 기자가 앉아 있었다. 흡족한 미소가 입 끝에 걸려 있는 걸 보니 그 역시 이 무대를 어떻게 찬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여러 명의 음악전문기자들을 고용하고 있었고, 때문에 4년에 한 번 열리는 이 거대한 콩쿠르에 그 모든 기자들을 보냈다.

피아노 부문엔 특별히 두 명이 할당되어 있었다. 물론 두 명의 기사가 모두 지면에 실리지 않는다. 편집장의 선택을 받은 한 명만이 이 엄청난 무대를 묘사할 영광을 누리게 될 예정이었다.

지금 경쟁 중인 것은 무대에 오른 피아니스트들뿐만이 아닌 것이다.

‘좋아…….’

동료 기자를 힐끔 바라본 에민은 그냥 똑같은 리뷰를 써선 승패가 어찌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기사에 쓸 문장들을 더 추가했다.

베르체노프가의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와의 친분.

타티아나 역시 몇 년 사이 갑자기 유명세를 타게 된 천재 피아니스트였다. 그녀가 예카테리나에게 어떠한 흥미를 보였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있을 호사가들이 많았다.

콩쿠르가 진행되는 도중 예카테리나가 주어진 호텔에 머물지 않고 베르체노프가로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미리 취재하면서 알아뒀었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베르체노프인지라 쉽게 기사로 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아껴 놓고만 있었는데, 만약에 정말 예카테리나가 우승을 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면 그녀와 타티아나의 관계는 언제라도 드러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먼저 터뜨리는 게 임자인 기사거리이기도 하다.

예카테리나의 파이널 무대에 대한 기사와 타티아나와의 이야기만 잘 섞고, 운 좋게 사진이라도 함께 한 장 찍을 수 있다면 편집장은 무조건 에민의 손을 들어 줄 것이 분명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는 사이 예카테리나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가 끝났다. 박수갈채가 그녀에게로 쏟아진다. 에민은 진심을 담아 박수를 보탰다.

곧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이번 곡도 기대해 볼 만하겠군.”

말로는 그렇게 말하면서 에민은 머릿속으론 예카테리나를 어떻게 더 잘 포장해서 내놓을지 생각 중이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가 다음 협주곡의 시작을 알릴 때까지 에민은 음악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 에민을 꾸짖기라도 하듯, 예카테리나가 건반을 내리눌렀다.

“……!”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사장조.

자주 연주되는 협주곡 1번에 비해 보다 기교적이고 복잡한 곡이다.

이 곡을 처음 들어 보면 차이코프스키가 이런 협주곡을 작곡했음에 놀라고, 두 번째 들어 보면 고난도 협주곡을 작곡하기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조차 차이코프스키에게 분명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몇몇 연주자들은 보다 욕심을 부려 이 곡을 쥐고 무대에 올랐다가 쓰디쓴 실패와 교훈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예카테리나의 터치엔 거침이 없었다.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거대한 음량.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오케스트라도 놀랐는지 멈춰 있다. 곧 예카테리나는 장난이라도 치듯 가볍게 음악을 좌우로 흔든다.

파도와 바람을 부려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떠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허…….’

에민은 소름이 돋은 팔을 쓰다듬으면서 눈살을 찡그렸다. 조금 더 집중하며 음악과 홀의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사람은 인위적으로 자신의 피부를 조종할 수 없지만 타인의 인위적인 조종엔 쉽게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에민은 음악전문기자로서 객관성을 유지하지 위해 지난 20년간 분석적으로 무대를 보고 리뷰하려 노력해 왔다.

하지만 결국 음악 애호가의 한 명에 불과한 그의 가슴을 찌르는 음색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이걸 들려주고 싶군.’

곡이 시작되기 전까지 머릿속에 차 있던 기사는 모조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오로지 예카테리나가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를 보다 선명하게 옮겨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뿐이다.

에민은 방금 전까지의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다.

피아니스트들은 저 자리에 서면서 다른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 무대 밖에서 네거티브를 하거나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쓰지 않겠지. 오로지 자신의 음악 단 하나에 영혼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이런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민은 그런 연주자들에 대해 너무나 잘 안다.

그렇다면 그런 연주자들을 취재하는 기자들이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주워 담아 기사를 꾸미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가치 있는 것을 퇴색시키는 건 음악인 전부에 대한 배신행위다.

에민은 잡생각들을 떨쳐내며 이 음악을 제대로 기억하는 데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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