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36화 (636/1,277)

##  636화

잠자리가 바뀐 탓일까. 아나톨리는 평소 안 꾸던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아나톨리는 이름 모를 콩쿠르의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있었다.

멍한 기분이 든다. 이리저리 밀고 밀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하다 보니 이 자리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땅에 발이 닿지 않는다. 아나톨리는 불안정하게 붕 뜬 느낌이 싫어서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 하려 했다. 하지만 양손에 바이올린과 활을 쥐고 있는 상태라 멋대로 움직이기도 불편했다.

아나톨리는 손에 들려 있는 바이올린을 내려다보았다.

타티아나가 데리고 와서 건네준 바이올린. 나중에 알아보니 아나톨리로선 정말 상상도 못할 가격의 바이올린이었다. 심지어 타티아나는 아나톨리의 부모님에게도 이 바이올린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 없다고 했다. 때문에 아나톨리의 부모님들은 아직도 아나톨리가 적당한 가격의 바이올린을 선물 받은 줄 안다.

물론 언제까지고 입 다물고 있을 순 없었다. 언젠가 나중에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때가 되면 분명하게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아나톨리는 그 부분에 대해선 자기 생각이 확실했다.

바이올린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어느새 바닥에 발이 닿아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잠에서 깼다.

“…….”

이상한 꿈이네.

큰 무대를 자꾸 봐서 그런가 요즘 유독 콩쿠르에 관련된 생각이 많아졌었는데, 그게 꿈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물론 아나톨리가 그런 큰 무대에 나가기까진 아직 시작이 많이 남았지만, 그렇게까지 멀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타티아나나 에르네스트 같은 사람들이 가까이 있기 때문일까.

“으.”

그제야 이 푹신한 침대도 자기 방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나톨리는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평소 같았으면 더 늦게까지 뒹굴거렸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제대로 해야 한다는 묘한 의무감으로 눈을 뜬 아나톨리는 정면에 있는 침대에 있는 에르네스트를 발견했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일어나 침대의 머리판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화면에 집중하느라 아나톨리가 일어난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나톨리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고개를 든다. 약간 피곤해 보이는 표정. 설마 잠을 설쳤나?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 시선이 간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나톨리는 저 피아노과의 자랑이 밤새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가 잠을 못 잤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아나톨리의 속도 모르고 옅게 웃으며 답인사를 했다.

“좋은 아침.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눈이 떠졌어요.”

“새벽 2시에 잤는데도?”

“그러게요.”

시간으로만 따지면 대충 대여섯 시간 정도 잤나 모르겠다. 아나톨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문제는 에르네스트였다.

“게임 하세요?”

“게임?”

“지금 하고 계시는 거요.”

진짜로 게임 하다가 밤샜다고 하면 약간 실망할 것 같아서 그렇게 물어보았는데,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스마트폰을 돌려서 화면을 보여 주었다. 거기엔 흰 화면만 떠 있었다.

“곡 쓰고 있어.”

“네?”

“스마트폰으로도 간단한 작곡 정도는 할 수 있거든. 그 자리에서 재생해 볼 수도 있고.”

“재생요?”

“어. 들어볼래? 이리 와 봐.”

얼마 전부터 에르네스트가 작곡도 병행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스마트폰으로도 뭔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나톨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지 흥미가 생겨서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그쪽으로 향했다. 손짓하던 에르네스트는 침대 옆을 툭툭 쳤다. 아나톨리가 거기에 걸터앉자 에르네스트가 다시 스마트폰 화면을 조작하더니 아나톨리에게 말했다.

“아까 썼던 바이올린 파트인데. 어떻게 들리나 들어봐.”

그러면서 그는 무선 이어폰을 건넸다. 그냥 써도 되는지 조심스러웠지만,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아나톨리는 이어폰을 받아 귀에 끼웠다.

잠시 후, 나지막한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 퍼졌다.

듣자마자 아나톨리는 이 바이올린 소리가 실제 사람의 연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컴퓨터가 재생하는 미디 음원은 보다 딱딱하고 건조했다.

하지만 선율과 화성이 가져오는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그대로 존재했다. 되레 사람의 감성이 끼어들지 않으니 화성학적인 부분만큼은 더 분석적으로 듣기 좋기도 했다.

천천히 진행되던 바이올린 소리는 순간적으로 빠르게 모습을 바꾸더니 화려하게 음과 음을 넘나들었다. 아나톨리는 집중했다. 이게 미디 음원이라 가능한 건지 아니면 실제로 연주해도 가능한 건지 분간할 수 있어야 했다. 만약 전자라면 클래식 작곡가가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선율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아주 가까스로 연주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극도로 단련된 바이올린 테크닉이 필요하겠지만, 막심의 연주를 들어 본 아나톨리는 이 테크닉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 안다.

현실에서 가능함을 아는 것은 정말 큰 깨달음이다. 아나톨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런저런 음악들을 들으면서 스스로의 지평도 넓혀 나가고 있었다.

“……어.”

2분 남짓한 짧은 선율은 금방 끝났다. 에르네스트는 음악을 정지시키고는 이어폰을 받아 갔다.

이제 작품을 들었으니 답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아나톨리는 머릿속에 뛰도는 수많은 단어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보았다.

그럴싸하게 말하는 건 단지 호사가들의 즐거움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나톨리의 선생님은 음악을 듣고 말로 표현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 가르치곤 했었다. 아나톨리는 이전의 가르침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바이올린 선율을 떠올렸다.

하지만 음악비평을 하려고 생각을 하니 되레 더 머리가 굳는 기분만 들었다. 아직 배움이 일천한 탓인지, 결국 아나톨리는 단순한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조…… 좋은데요?”

“그럼 됐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별로 실망하거나 더 기대하지도 않고 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나톨리는 혹시나 싶어 빠르게 덧붙였다.

“제 의견은 그냥 흘려들으세요. 제대로 평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말을 하는 능력은 물론이고 음악가로서의 수준도 아직 너무 낮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지 않지만, 이런 곡을 썼다는 것만 보더라도 이미 아나톨리보다 음악가로서 훨씬 더 수준 높은 경지에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무언가 의견을 낸다는 것이 아나톨리는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에르네스트는 아나톨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킥 웃으며 말했다.

“너 정도면 충분해.”

“그럴 리가요.”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아나톨리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과다니니 사용자의 귀라면 믿을 수 있지.”

아나톨리는 숨을 삼켰다. 자신의 바이올린에 대해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바이올린엔 피아노처럼 모델명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경험이 풍부한 연주자가 아니라면 바로 알아보지도 못한다. 그 증거로 아나톨리의 친구들은 아직 이 바이올린이 과다니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알았다. 그 앞에서 몇 번 꺼내 연주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그간 아나톨리는 에르네스트와 그렇게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타티아나를 접점으로 만나긴 했지만 학교의 타과 선배 같다는 느낌이 우선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친밀하게 다가오는 스타일이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 멀찍이 느끼고 있었던 것과 달리 에르네스트가 신경 써서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자, 당황스러웠다. 아나톨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건…… 운 좋게 얻은 거라서…….”

“빌린 건지 산 건지 모르겠지만, 전부 네 능력으로 얻어낸 건 아니겠지. 하지만 단지 운만으로 과다니니를 손에 쥐었다는 것도 말이 안 돼.”

과다니니.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넬리와 더불어 최고의 바이올린으로 손꼽히는 악기였다.

에르네스트도 잘 안다. 이제 겨우 열 살짜리가 온전히 자기 능력만으로 과다니니를 소유할 순 없다는 걸.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걸 알면서도 과다니니를 맡긴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나톨리는 이 바이올린을 건네준 타티아나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긴 했다. 그냥 풀 사이즈 바이올린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을 뿐인데, 타티아나는 기다렸다는 듯 아나톨리를 데리고 와선 과다니니를 건네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에르네스트가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땐 자신 있게 해.”

지금까지 누구도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중앙음악학교는 엄격한 클래식 학교였다. 늘 겸손하고 배우려는 자세로 있으라는 가르침뿐이었다. 심지어 아나톨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과다니니라는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난 척을 하며 자신에게 자격이 충분하다고 착각할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분명히 과분한 바이올린과 과분한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걸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아나톨리는 막심에 대해 떠올렸다. 그런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다.

“그래도…… 혹시 그래서 제가 오만해지면요?”

“오만?”

에르네스트가 재미있는 말이라는 듯 되물었고 아나톨리는 했던 말을 주워 담고 싶어졌다.

스스로가 오만해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게 얼마나 웃기는 소리처럼 들리는지 말해 놓고 보니 알겠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은 그야말로 화끈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일 없도록 정진하라며 응원하지도, 괜찮을 거라며 위안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분명하게 장담했다.

“그렇게 까불면 누군가 와서 널 박살내 놓을걸?”

“네!?”

“그런 것도 겪어 보면 괜찮아. 그러니까 그렇게 혼날 걸 걱정해서 미리 조심스럽게 굴지 마.”

까불다가 누군가에게 걸려 박살나는 게 예정되어 있다면 애초에 안 하면 될 일인데, 에르네스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 보길 종용하고 있었다. 마치 이미 겪어 보기라도 한 것 같은 말투였다. 그리고 그렇게 겪은 것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렇게 잠깐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서 아나톨리의 생각이 일변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과다니니를 다룰 것이고 겸손하게 음악을 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슴속 어딘가에 이 대화를 넣어 둔다면, 언젠가 떠오를 날이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나자 에르네스트가 손짓했다.

“일단 세수부터 해. 조금 있으면 아침 식사를 할 것 같으니까.”

“아…… 그럴게요.”

아나톨리는 다시 일어나서 슬리퍼를 신었다.

욕실로 향하면서 보니 에르네스트는 사샤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사샤는 아직 졸린지 칭얼거리며 웅크렸다. 에르네스트는 이불 밖으로 드러난 사샤의 머리를 마구 헝크러뜨렸다.

그 모습을 보던 아나톨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에르네스트가 초인적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피아노과의 살아 있는 전설처럼 대해지고 실제로도 음악적으로 천재성이 넘치다 못해 작곡에까지 손을 뻗고 있는 선배였지만, 사실 다른 누군가에게 혼이 나기도 하고 동생을 깨울 땐 귀찮아하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아나톨리는 타티아나에게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적이 있었음을 생각하며 욕실 거울을 바라보았다.

“…….”

머리가 새 둥지처럼 엉망이었다. 세수가 아니라 머리부터 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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