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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37화 (637/1,277)

##  637화

여름엔 해가 일찍 뜬다. 눈을 떠 보니 이미 방 안이 커튼 너머에서 비치는 햇빛으로 가득했다.

“…….”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전날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래도 잠이 부족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푹 잔 덕분인 걸까.

옆을 보니 류보비는 아직도 꿈나라였다.

문득 어젯밤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왔다. 류보비는 이불을 덮고 나서도 계속 이야기가 하고 싶은지 이런저런 말들을 꺼내긴 했지만 5분도 안 되어서 곯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피곤할 류보비가 조금 더 잘 수 있도록 두고, 난 침대 밑으로 살짝 내려왔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한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잠기운도 모두 몰아낸 뒤엔 실내복으로 입는 원피스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식당 쪽으로 향하니 이미 아버지와 오빠가 나와 있었다. 방학이 없는 두 분은 평소에도 일찍 식사를 하긴 하지만, 오늘은 일부러 더 빠르게 시간을 잡은 것 같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덕분에.”

“좋은 아침이구나.”

아버지가 신문을 내려놓으며 말씀하셨다. 이미 우리에 대해선 다 보고받으신 게 분명해 보인다. 자연스레 간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젠 늦게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지?”

“예, 어쩌다 보니…….”

“즐거웠나 보구나.”

늦게 잤다고 한마디 하시더라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런 말씀은 일절 없이 가볍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늦게 잔 것, 그리고 늦게 일어나는 것까지 모두 이해하시는 모습이다.

“우린 먼저 식사하고 일어나마. 이후에 드미트리와 이야기해서 네 친구들을 대접하도록 하고.”

“그렇게 할게요.”

배려해 주시는 마음을 느끼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을 내 손님으로 인정하고 가급적 터치를 삼가시려는 것 같았다.

그 후에 아버지가 내게 전한 말씀은 하나뿐이었다.

“좋은 때는 늘 소중히 하도록 하거라.”

“…….”

“이리 말하지 않아도 넌 알아서 잘 하는 편이지만.”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려 한다는 걸 아버지는 잘 안다. 때문에 그리 큰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것 같진 않았다.

아버지는 다시 신문을 펴 들었고, 루슬란 오빠는 말없이 웃더니 다시 스마트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오빠가 어제 왔다 간 것에 대해 말하기보단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주방의 드미트리에게 가서 7인분의 아침식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단 지금은 아버지와 오빠가 먼저이니 그 후에 다시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7인분을 준비한다 할지라도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다면서 적당히 시간을 주면 괜찮다고 말했다. 난 넉넉하게 그와 시간을 약속했다.

남은 건 친구들을 깨우는 일이었다.

“……으흠.”

일단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의 방으로 가 볼까.

만약 계속 자고 있다면 일어날 때까지 노크를 해 보고, 그래도 잔다면 열쇠를 빌려서 들어갈 생각이었다. 깜짝 놀라게 하면 두 사람이 뭐라 할지 궁금해졌다.

복도를 걷는 동안 이미 내 머릿속은 자고 있는 두 사람을 깨우는 일로 가득해져 있었다. 때문에 갑자기 복도에서 이미 깨어 있는 발렌티나와 마주쳤을 때 그녀보단 내 쪽이 훨씬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발렌티나?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그러는 넌……?”

발렌티나가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사람이 되어 버려서 멍하니 섰다.

바보같이 있는 날 두고 발렌티나가 먼저 인사해 왔다.

“좋은 아침이야. 타티아나.”

“좋은 아침이에요.”

반가운 아침인사를 듣고서야 정신이 든다. 난 호스트로서의 자세를 되찾고 그녀에게 물었다.

“잠자리 불편하시진 않았나요?”

“응? 전혀? 우리 집보다 편하던데.”

과장된 표현에 난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까지 말해 주니 다행이었다.

“아나스타샤는요?”

“그 애도 씻고 있는 중. 애들 깨우러 다니는 거야?”

“할 일이 없어졌네요.”

“그냥 자고 있을 걸 그랬네?”

“아하하하.”

자고 있는 두 사람을 깨우는 즐거움이 없어진 건 약간 아쉽긴 했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난 복도 저편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에르네스트도 일어나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요.”

“어떻게?”

“음……. 가서 노크해 보면 되겠죠?”

그 방에 막 들어가는 건 삼가야 할 테니 노크만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세 사람 모두 귀가 좋은 편이니 금방 일어나겠지만……. 안 일어난다면 계속 문만 두드리고 있어야 하는 건가?

그 애들이 자고 있는 방문을 1시간 동안 두드리고 있는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발렌티나가 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타티아나.”

“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마주 보자마자 발렌티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삼켰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보이는데, 지금 말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발렌티나는 이만 들어가서 준비해야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난 그녀에게 아침식사 시간을 알려 주고는 다음 방으로 향했다.

“…….”

에르네스트와 사샤 그리고 아나톨리가 자고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살짝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방음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지 안의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결국 노크를 하는 수밖에 없어서 작게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들려왔다.

“일어나 있어요.”

“타티아나예요, 에르네스트.”

“아, 그래.”

분명 잠이 덜 깬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난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순 없었다. 방 안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어떻든 난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긴 했지만, 문제는 내가 아니라 에르네스트나 다른 아이들이 괜히 어색해할지도 모른다는 점에 있었다.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아서 난 조심스러워졌다.

“들어가도 되나요?”

“문 열려 있어.”

“그러니까…… 들어가도 돼요?”

“……지금 열려 있다니까?”

뭔가 엇갈리는 말들을 주고받다 보니 다 바보 같아졌다. 그냥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새된 목소리가 빽 하고 울렸다.

“잠깐만요!!”

사샤의 목소리였다. 난 사샤가 저렇게 크게 소리치는 건 처음 들었다.

깜짝 놀란 난 멈칫한 그대로 굳었다.

문득 사샤가 유치가 빠진 걸 보여 주기 싫어했던 모습이 기억났다. 사샤도 이제 마냥 아이 취급당하는 건 그리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사샤가 다시 평소대로의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 걸터앉은 사샤와 에르네스트가 보였다.

사샤만 파자마 차림이었다. 그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냥 시간이 조금 필요했던 걸까?

어쨌든 사샤는 묘하게 말이 없었다. 난 일부러 에르네스트를 흘겨보며 말했다.

“바로 들어와도 된다면서요. 에르네스트.”

“상관없잖아.”

“사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내가 잘못한 건가? 안 일어나고 버티고 있던 녀석 잘못이지. 네가 와 줘서 간신히 일어났네. 고마워.”

사샤가 잠투정이라도 부리고 있었던 건지, 에르네스트는 속이 후련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당연히 사샤는 벌컥 화를 냈다.

“형 진짜 미워!”

“그래, 그래.”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대충 말한다.

난 그 광경을 보면서 조금 걱정되었다. 사샤도 많이 크고 유치도 빠졌던 것처럼 천사처럼 착한 성격도 앞으로 바뀌는 걸까……?

“…….”

생각만 해도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뒤늦게 아침인사를 했다.

“잘 주무셨나요.”

“응. 덕분에. 타티아나 너는?”

“저도 잘 잤어요.”

에르네스트는 옆의 사샤에게도 말했다.

“너도 인사해야지. 사샤.”

“……좋은 아침이에요.”

“후후, 아침에도 이렇게 보게 되어 기쁘네요.”

살짝 뾰로통해져 있던 사샤는 기분이 풀렸는지 금방 웃음을 머금었다.

나 역시 그런 사샤를 보며 기분이 좋아졌다.

사샤가 늘 어린애처럼 있을 거란 기대는 당연히 하지 않는다. 성격도 물론 바뀌겠지.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곁에서 바른 방향을 잘 가르쳐 준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가끔은 장난을 쳐서 내지 않아도 될 화를 내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긴 하지만…….

난 두 사람을 보며 웃다가, 다른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나톨리는 어디에?”

“씻고 있어.”

물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데, 아무튼 다 일어나 있다면 굳이 오래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난 빠르게 일정을 알려 주었다.

“이따가…… 9시쯤 식당으로 오세요. 아침식사 하도록 해요.”

“알았어.”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난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류보비는 내가 나갔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더 자게 두고 싶기도 했지만, 슬슬 일어날 수 있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류보비,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으응…….”

평소에도 그녀는 애교가 넘치는 성격이었지만 묘하게 조금 더 어리광부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칭얼거린다. 아무래도 잠이 모자라 보인다.

난 곁에 걸터앉은 채 작게 속삭였다.

“많이 졸리신가요?”

“응……. 엄마, 나 10분만 더…….”

“10분 정도는 괜찮겠네요.”

“…….”

잠결에 착각으로 중얼거리는 류보비를 다독이고 있는데, 10분이 아니라 10초 만에 류보비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한 말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류보비는 천천히 날 바라보면서 무언가에 대해 확인하고 싶어 했다.

난 류보비를 놀릴 의도는 없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해 줘야만 했다.

“잠결에 말실수 정도는 할 수 있죠.”

“악! 실수였어요!”

“알아요.”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지만 그 후로도 류보비는 한참 동안이나 내게 사과했다.

***

식당에 모여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티가든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어제부터 시작된 긴 파티가 언제 끝나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지만, 곧 헤어져야 할 때라는 걸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오가는 대화 속엔 장난과 웃음이 평소보다 조금 더 많았다.

끝을 연 건 에르네스트였다.

“슬슬 돌아가자.”

모두들 얼굴에 아쉬움이 서렸지만 적당한 때였다.

마시던 찻잔과 접시 등을 치워 놓고, 맡겨 놓았던 짐을 되찾아간다. 난 분명 여기에서 가장 아쉬운 사람이겠지만 친구들이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을 도와주는 건 미적거리지 않았다.

차량은 두 대에 나누어 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차량들이 움직일 동선에 대해선 이미 나나 다른 친구들보단 예고르가 훨씬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상황을 정리해 주고 나니 이젠 정말 돌아갈 일만 남아 있었다.

로비에서 우리는 모여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나중에 학교에서…… 직접 연주하는 거 보여 드릴게요.”

“그래, 그것도 좋겠네.”

아나톨리와 에르네스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1년 넘게 알고 지내면서도 사실 접점이 그리 있다고 할 수 없었는데, 어젯밤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음악에 관련된 두 사람의 대화엔 나도 흥미가 생기긴 했지만 괜히 끼어들진 않았다. 나 없이도 어떠한 교류가 있다는 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일 테니까.

“어제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류보비와 사샤가 내게 인사를 보냈다. 난 웃으며 두 사람을 살짝 안아 주었다. 이런 일이 없더라도 언제든 환영이었다.

“우리 가고 나면 심심하겠다. 그래도 가야 하니까, 심심하면 연락해?”

발렌티나도 가볍게 작별을 고했다. 정말 심심할 것 같다.

그녀와도 포옹했다가 떨어지자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따 도착하면 메시지 할게.”

아나스타샤는 평소엔 모스크바를 떠나 어디론가 잘 놀러 다니기도 했지만 올해는 그럴 예정이 별로 없어 보였다. 가끔 쇼핑이나 하러 가자고 하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를 마친 아나톨리와 에르네스트도 마지막으로 내게 인사해 왔다. 에르네스트는 묘하게 피곤한 표정이었지만 웃고 있었다.

“신경 많이 썼을 텐데. 편히 쉬어.”

“별로요……. 괜찮아요. 에르네스트야말로요.”

“나는 뭐, 괜찮아.”

그는 짧게 웃어넘기고는 뒤돌아 자신이 타고 갈 차량에 올랐다.

작별인사를 나누고 나니 비로소 친구들을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었지만, 그래도 계속 보고 있으니 붙잡고 싶어지는 마음도 꿈틀거린다. 난 그 마음을 꾹 누르면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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