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8화
흡족한 리허설 끝에 극장 밖으로 나오니 건물들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해가 질 것 같다.
난 양팔을 쭉 펴면서 옆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카밀레가 첼로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어딘가 걱정이 굉장히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걱정의 대부분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약간 슬프다. 하지만 그런 카밀레를 배려해서 여기서 헤어져 호텔로 간다면 그녀의 걱정을 일시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진 몰라도 장기적으론 관계에 도움이 전혀 안 된다. 나중에 어디에서 보더라도 어색해하겠지. 그녀는 내게 죄책감마저 약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
난 3시간 내내 카밀레의 첼로에 감탄한 참이었다. 그녀처럼 대단한 첼로 연주자와의 관계를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어디로 가면 되나요? 카밀레. 차를 타나요?”
“……그렇게 멀진 않아요.”
“그럼 걷죠.”
명랑하게 말하자 카밀레가 고개를 흔들흔들하더니 앞장섰다.
횡단보도를 건너 한 블럭, 그리고 건물을 따라 걷는다. 같은 러시아인데도 모스크바와 건축 양식이 약간 다른 것 같았다.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우측을 보니 굉장히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러시아의 기둥이라 불리는 볼가 강이었다. 볼가 강은 유럽에서 가장 긴 강으로 이곳에서 카스피해까지 흐른다.
강변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몇몇 눈에 띈다.
반걸음 정도 앞서 걷던 카밀레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모스크바에 비하면 너무 시골이죠?”
모스크바는 워낙에 큰 도시니 비교한다면 훨씬 한적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리빈스크는 나름의 정취를 분명히 지니고 있는 도시였다.
“멋진 도시예요.”
“좋게 말해 주니 다행이네요.”
카밀레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그녀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리투아니아 출신이라 들었지만 이곳에서 오래 살면서 정이 든 듯 보였다.
난 모스크바를 떠올렸다. 도시에 정을 둔다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의 유대에 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나 또한 모스크바에 애정이 많았다. 곳곳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녹아 있다.
문득 카밀레를 올려다보았다. 난 그녀가 리투아니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면 질문 자체가 실례가 될지도 몰라서, 결국 물어볼 순 없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볼가 강은 건물들 너머로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린 조금 더 도심 안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사람들이 조금 더 북적거린다. 카밀레는 주변을 보더니 그중 한 건물로 향했다. 간판을 보니 식료품을 파는 마트인 것 같다.
그 입구에서 카밀레는 첼로를 내려놓곤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내게 부탁했다.
“잠깐 첼로 여기 둘 테니까 기다릴래요? 장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아…… 그럴게요.”
“오래 안 걸려요.”
그녀는 여전히 걱정이 많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첼로를 들고 마트에 들어가는 것보단 이쪽이 낫다고 생각한 듯했다.
난 카밀레의 첼로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잠시 멍하니 있자니 온몸에 탈력감이 엄습해 왔다. 3시간이나 오케스트라와 집중해서 리허설을 했더니 상당히 피곤했다. 차에서 잠을 자지 않았더라면 정말 얼마나 피로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혹시라도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똑바로 섰다. 지나가던 사람 몇 명이 내 쪽을 보긴 했지만 사람을 기다린다고 생각하는지 그냥 지나갔다. 첼로와 함께 있으니 지금 난 첼로 연주자로 보이는 걸까.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내 쪽으로 똑바로 다가왔다. 당연히 익숙한 사람이었다.
“아가씨.”
“아, 빅토르.”
오케스트라와 합류한 후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겠지. 그런 빅토르가 지금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내 추후 일정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난 일단 그에게 사과부터 했다.
“멋대로 정해서 미안해요.”
원래는 식사 후에 오케스트라 측에서 원하는 연습이 있다면 거기에 따라 주고, 그 후 호텔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난 멋대로 빅토르가 예약한 호텔을 취소하도록 하고는 이렇게 카밀레를 따라가고 있다.
빅토르 입장에선 귀찮은 상황일 것이다. 그는 내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경호에 힘쓴다. 내가 동선을 바꿔 버리면 일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제 계획에 따라 움직이실 필요는 없죠.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정 그러시면 미안해하지 말고 고맙다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자, 여기.”
“?”
그는 어느샌가 가지고 있던 긴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고 보니 고급스러운 와인 상자였다. 난 이게 지금 내게 정확하게 필요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손님으로서 선물이 필요하실 테니 가지고 가시죠.”
“……고마워요.”
“근처에 있겠습니다.”
빅토르는 짧게 인사하고는 다시 사라졌다.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그가 내 경호원이라 다행이었다. 그가 있으면 실수할 일이 없고 실수를 하더라도 큰 걱정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젠 첼로와 와인을 맡아 기다리고 있자 카밀레가 금세 돌아왔다. 정말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내게 물었다.
“최대한 빠르게 한다곤 했는데. 안 늦었죠?”
“예, 전혀.”
“그건 뭔가요?”
“선물이에요.”
“그런 건 언제…….”
카밀레는 내게 그럴 시간이 별로 없었을 것이란 걸 생각하며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깊게 묻진 않았다.
우린 다시 사람이 북적이는 거리에서 벗어나 건물들 사이로 조금 더 깊게 들어갔다.
카밀레는 그리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아직도 어색한 건진 모르겠다. 하지만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난 아까부터 스스로가 조금 신기할 지경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어색한 자리는 내가 알아서 피했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데에 거리낌이 별로 없다. 그것이 선생님이 맡긴 수업의 일환이라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욕심으로도 그런 마음이 든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그 기분에 맡겨 보기로 했다.
10분 정도 걷자 카밀레가 3층 높이의 건물 앞에 섰다. 이전의 상가들과는 달리 비슷하게 생긴 창문이 여럿 있는 모습을 보니 아파트인 것 같았다.
“여기예요.”
카밀레가 먼저 계단을 올랐고 난 그 뒤를 따라갔다. 2층 높이라 계단을 많이 오를 필요는 없었다.
현관 앞에 선 카밀레가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철제문이 열리자 그 안은 아늑한 가정집의 기운이 가득했다. 나무로 된 바닥과 무늬가 들어간 벽지. 그리고 벽 쪽에 늘어선 가전들이 한눈에 모두 들어왔다.
문가에 장식되어 있는 그림과 조형물도 인상적이었다. 무엇을 만들었는진 잘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창의력과 즐거움이 가득 느껴진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거실 쪽에서 마구 뛰어오는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안드류스가 오늘 그림 그린 거…….”
신이 나서 무언가 카밀레에게 말하려던 아이는 날 보더니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 뒤에서 쫓아오던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매로 보이는 두 아이가 거의 동시에 물었다.
“누구야?”
“누구세요?”
스스로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조금 어려웠다. 아직 난 카밀레의 친구라 할 수 없고 피아노 선생님이라 하는 건 더더욱 안 될 말이었다. 내겐 아직 그런 말들로 스스로를 칭할 자격이 없었다.
때문에 그냥 이름만 밝히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타티아나라 해요. 실례지만 오늘 하루 묵어도 괜찮을까요?”
난데없을 만도 한데 두 아이는 생각보다 쉽게 경계를 풀고 받아들였다. 아무래도 카밀레가 옆에 있으니 아는 사람이라고 편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면서 이게 맞나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귀엽다.
카밀레는 첼로를 놓고 앞으로 가더니 두 아이 사이에 서선 왼손 오른손을 차례로 내리며 말했다.
“이 애는 루타, 그리고 여긴 안드류스.”
“반가워요. 루타, 안드류스.”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두 남매에게 다시 한 번 인사하자 금세 웃음꽃이 핀다. 루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그렇게 두 명 중 어떤 아이가 피아노에 관심이 있을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있는데, 카밀레는 지금 여기에 없는 다른 이름을 불렀다.
“달리아는…… 또 어디 갔니? 손님이 오셨는데.”
“피아노 치고 있어. 헤드폰 쓰고.”
“지금?”
“응. 아까부터.”
아마 내가 볼일이 있는 아이는 달리아일지도 모르겠다. 카밀레를 보니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카밀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가 봐도 될까요?”
“……저쪽이에요.”
카밀레는 손을 뻗어 피아노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난 천천히 그 방향을 따라 향했다.
처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규칙적인 리듬을 가지고 툭툭 무언가를 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디지털 피아노의 건반을 치는 소리였다.
난 살그머니 소리가 들려오는 방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일곱 살이라고 했었지. 딱 그 나이대로 보이는 자그마한 아이였다. 헤드폰이 머리를 거의 다 덮어 버릴 것 같을 정도였다. 커다란 피아노도 그렇고 이 방 안의 모든 게 너무나 커서 그저 불리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대하는 모습만큼은 분명 연주자라 해도 될 정도로 진중했다.
작은 손으로 천천히 건반을 누른다. 어떤 음악적 흐름을 잡아채려는 듯 팔이 자연스레 호선을 그리며 춤을 춘다. 난 소리를 듣지 않고 단지 건반을 연주하는 모습만으로도 상당한 감각적 재능을 읽어낼 수 있었다.
“……누구세요?”
한동안 지켜보고 있자 인기척을 느낀 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헤드폰을 벗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 호기심 등이 그 눈에 서린다. 난 아까 했던 것처럼 간단하게 내 이름을 밝히고 웃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나 자신을 소개하려면 보다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 연주자 타티아나라 해요.”
“예……?”
“카밀레의 제안을 받아 오늘 하루 피아노를 가르쳐 드릴까 하는데…… 어떤가요?”
지금까지 사샤나 다른 아이들에게 내가 아는 지식과 노하우 등을 전달하려고 했던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처음 보는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겠단 말을 해 본 건 처음이었다.
선생님들이 이런 느낌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걸까.
하지만 잠깐 들었던 그런 생각을 난 곧바로 지워 버렸다.
위험한 생각이었다. 종종 사람들에게 선생님 같단 말을 듣곤 하지만, 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교수법을 배운 적도 없었고 아직 학생으로서 배워야 할 부분이 훨씬 많다고 생각하니까.
무엇보다 난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인격적으로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날 가르쳤던 분들이 내게 해 주셨던 것처럼, 단순히 기술과 지식을 전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부분에서 난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검은 새 역시 마찬가지였고. 어떻게 보아도 내게선 인간적으로 배울 점이 별로 없다.
때문에 난 내가 누군가의 선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달하는 건 반드시 단순한 지식과 기술에서 그치려 애쓴다. 혹시라도 내 바보 같은 부분을 따라 배우는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하고 멀찍이 치워 놓는다.
다시 한 번 마음을 정돈하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이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내 고민을 꿰뚫고 들어왔다.
“전 달리아예요. 처음 만나서 반갑습니다. 타티아나 선생님.”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반짝이는 저 눈을 보고도 굳이 반론을 하고 말을 고쳐 줄 순 없었다. 그냥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며 한 발자국 더 방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