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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50화 (650/1,277)

##  650화

1시간 정도 달리아의 피아노를 봐 주고, 저녁식사 자리에도 초대받았다.

카밀레가 준비해 준 가정식은 1시간 만에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종류도 많고 훌륭했다.

난 드미트리에게 요리를 많이 배우긴 했지만 정작 평범한 가정식엔 무지한 면이 없잖아 있어서, 식사를 하며 카밀레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요리 쪽에도 관심이 많다는 것에 상당히 흥미진진해했다.

물론 내가 이 집에 온 제일 중요한 이유는 요리가 아니라 피아노였다.

그 후로도 2시간 넘도록 달리아와 함께 디지털 피아노 앞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다 해 보았다.

꼭 가르친다는 생각 보다는 달리아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보고 이 아이가 도달할 수 있는 목표점들을 직접 보여 주여 증명하는 식이었다.

현실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판단하는 일은 상당히 중요하다. 할 수 있음을 안다면 할 수 있게 된다. 난 그 감각을 달리아도 느낄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 그 여정에 필요한 노하우나 기술 등 역시 빼놓지 않고 최대한 상세히 알려주었다.

달리아는 상당히 학구열이 높은 아이였다. 그냥 귀로 듣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곧장 기억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바로 스케치북을 가지고 오더니 내가 말하는 그대로 받아 적거나 자신이 느끼는 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달리아가 그리는 온갖 언어와 그림들을 보면서 나 역시 악보에 기호들을 그려 넣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9시쯤 되어선 레슨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더 하기엔 아이들이 자야 할 시간이기도 하고, 아무리 디지털 피아노의 소리를 이어폰으로 듣는다 하더라도 건반을 누를 때의 압력과 진동이 밑층으로 흘러들어가면 민폐이기 때문이었다.

카밀레가 시간에 맞춰서 달리아와 안드류스, 루타를 씻기곤 잠자리에 들게 했다.

모두들 아쉬워하며 나와 더 놀고 싶어 하는 듯 보였으나 내가 손을 흔들어 주자 그래도 예의바르게 인사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

나도 욕실로 향했다. 거울을 보니 눈이 약간 풀려 있었다. 긴장을 풀어놓았더니 덩달아 온몸의 힘도 같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아침부터 상당히 바쁜 하루였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피곤했다. 하지만 리허설도 굉장히 충실했고, 그 후 호텔로 가서 자버리지 않고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만족스러웠다.

약간 처지는 목에 힘을 주면서 거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잘 했으니까 웃어도 될 것 같다.

“타티아나.”

밖으로 막 나오니 카밀레가 와인을 들고 거실에 앉아선 날 불러들였다.

처음엔 그렇게 좋은 만남이라 할 수 없었다. 카밀레는 날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보자마자 나가 버렸고, 난 그녀가 떠보듯 던진 레슨 조건을 도전적으로 받아들여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불과 몇 시간을 카밀레, 그리고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보내면서 우린 오늘 처음 본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친해져 있었다. 그 증거로 카밀레는 내게 말을 놓은 지 오래였다.

“오늘 정말 고생했어.”

“아니에요. 저야말로 즐거웠는걸요.”

나도 말을 편히 하라는 허락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서른이 넘은 음악가 선배에게 그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누구에게라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카밀레는 신경 쓰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달리아도 정말 기뻐했어.”

“다행이에요.”

“저 애가 올해부터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음악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그래도 피아노는 좀 가르쳐 봐야겠단 생각이 들더라.”

음악을 배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11년 과정의 음악학교를 다니는 것과 7년 과정의 음악학교를 다니는 것, 아니면 개인 레슨을 받는 것까지.

카밀레는 일단 달리아를 예비학교에 다니며 피아노 기초 교습만 받게 하면서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던 것 같았다. 음악적 재능이야 분명 물려받았겠지만 전공을 시킨다는 건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디지털 피아노만 있는 걸 보니 아마 고민이 꽤나 깊었으리라.

그리고 오늘 그녀는 어느 정도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난 빙그레 웃었다.

조건으로 레슨을 이야기했던 건 진지함보단 날 곤란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더 많았겠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딸의 피아노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었다. 카밀레가 이 정도의 관심만 보여준다면 분명 달리아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넓어지리라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 가정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하며 바라보고 있자, 카밀레는 옆에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으라는 의미로 소파 옆을 툭툭 쳤다.

옆에 앉자 그녀가 잔을 내밀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카밀레는 더 권하지 않고 자신의 잔만 따랐다.

잔잔한 텔레비전의 소음과 우리들의 웃음소리 등이 섞여 들린다. 느긋한 저녁 시간이 따뜻하게 흘러간다.

한창 오늘 했었던 리허설이나 레슨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카밀레가 물었다.

“다른 아이들도 가르쳐 본 적 있는 거야? 타티아나 선생님.”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세요. 전 학교 졸업도 못했으니 원래는 레슨을 할 자격도 없어요.”

“아하핫, 무슨 상관이야?”

카밀레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더니 와인으로 목을 축인다. 난 나름대로 진지한 이유가 있다는 뜻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눈을 본 그녀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우리 애들이 타티아나처럼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

난 닮아도 될 정도로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도 피아노 외엔 가당치도 않고, 때문에 이런 말을 들으면 덜컥 겁부터 난다.

하지만 그녀가 친애의 뜻으로 그리 말한다는 건 잘 알기에, 또 안드류스와 루타 그리고 달리아가 잘 커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같기에 속내를 감추고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들이라면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난 진심으로 그렇게 바란다.

카밀레는 가만히 날 보더니 와인을 한 모금 더 머금었다. 그리고 곧 키득거리며 팔을 뻗더니 내 어깨를 감쌌다.

***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 약속 이틀째.

난 카밀레의 아이들을 학교로 배웅하고, 그녀와 함께 집을 나와 리빈스키 드라마 극장으로 향했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난 기다리면서 잠시 단원들과 티타임을 즐겼다.

“어제 정말 카밀레의 집에 묵었어?”

자연스럽게 단원들의 관심사는 내 어제 저녁 일정에 쏠려 있었다. 그렇게 막 흥미를 자아낼 수 있도록 설명할 방법은 딱히 없어서, 난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카밀레는 말없이 가만히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모두들 이 모든 상황이 굉장히 의외라는 듯했다. 카밀레가 사람을 초대하거나, 내가 피아노를 가르친 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

내가 의아해하자 한 단원이 말했다.

“둘 다 그럴 이미지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렇다면 어떤 이미지인데요?”

“어…….”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콜록거리며 헛기침을 하더니 물 좀 마시고 오겠다며 나가 버렸다. 카밀레를 돌아보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평소 이 오케스트라에서 어떤 이미지인진 대충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나도 초면엔 약간 차가워 보인다는 평을 종종 듣곤 했었으니…… 이 사람들이 보기에 어제 있었던 일은 기적 같은 일처럼 느껴지나 보다.

생각해 보면 이 넓은 세상에서 한순간 만나는 일이니 기적이라 해도 무방했다. 물론 그 순간을 붙잡는 건 사람의 일이기도 하고.

“다 왔나?”

“바이올린은 다 왔네.”

“목관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자 곧 나머지 단원들도 리허설룸으로 들어왔다.

웅성거리던 일반인들의 소음은 곧 지휘자와 악장 아래에서 사라져 간다. 아침에 먹을 빵에 버터를 바르냐 잼을 바르냐를 가지고 다투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연주자들이 되었다.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슥 둘러본 지휘자 아르투르는 이어서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오늘 연습도 어제와 똑같이. 타티아나.”

“예.”

“원하는 템포로 적당히 솔로 연주를 해 주면 좋을 것 같군요. 제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알겠습니다.”

아르투르의 지시에 따라 피아노 앞에 앉았다.

준비해 온 협주곡 총보를 보면대 위에 올렸다. 빠르게 곡 전체의 흐름을 악보에서 읽어 내고 내 기억 속 선율과 맞추어 본다. 그리고 완벽하게 일치함을 확인한 후, 건반 위로 손을 뻗었다.

“…….”

화려하게 음악을 펼쳤다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템포로 잇는다. 그간 연습했었던 모든 결과물을 이 자리에서 건반을 이용해 조성한다.

그 연습 중엔 바로 어제 달리아와 했었던 몇 시간 또한 들어가 있었다.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면서 난 기존 알고 있었던 모든 지식들을 다시 해체하고 체감하기 쉽게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련의 행동들은 거꾸로 내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알고 있는 무언가를 풀어서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일은 그 자체로 알고 있는 것의 수준을 더더욱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완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시 분석하고 깨뜨리고 새로 쌓아서 완성도를 더 끌어올린다. 그것이 내가 하는 음악이 추구하는 방향성이었다.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두 페이지도 안 쳤는데 아르투르가 솔로 연주를 중단시켰다.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보고 있는 아르투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제에 비해 확실히 긴장이 좀 풀어진 것 같네요.”

“긴장……. 그런가요?”

사실 잘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휘자님이 지휘봉을 까딱이며 웃었다.

“처음 만나자마자 미스 하나 없이 협주곡 총보 연주를 해내고 리허설도 쭉쭉 해버리는 피아니스트가 무슨 긴장을 했겠냐마는…… 그렇게 철두철미한 연주를 하면서 우리 쪽에 쉽게 섞여들지 않는 느낌 또한 있었거든요.”

난 곧장 아니라고 반론할 수 없었다.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꽤나 높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음악적 독립성을 잃고 말려들면 안 된단 생각 또한 했기 때문이었다.

아르투르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리빈스크에서 하루 자고 난 내가 다른 연주를 하고 있음에 흡족해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주 편안하네요. 카밀레 덕분일까요?”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40명이 넘는 단원들 중 한 명의 집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난 이 전체의 유대에 약간 발을 담근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호텔에서 잤다면 오늘 아침에 단원들이 흥미를 가지고 내게 질문을 던지진 않았으리라.

그러한 인간적 유대가 곧 음악성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건 이전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와 연주회를 했을 때도 느낀 적 있었다. 난 그러한 부분이 굉장히 강력하다는 걸 잘 안다.

잠시 오케스트라 쪽을 바라보자, 아르투르가 지휘봉을 휙 저었다.

“바로 맞춰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아…… 바로요?”

“물론이죠. 오케스트라. 악기 들어.”

단호한 지시에 따라 악기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깨에 올려지기도 하고, 양손 사이에 자리하기도 한다. 2관 편성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준비되었다.

아르투르는 오케스트라가 준비됨을 확인하자마자 내게 눈길을 주었다. 준비되었음을 알리자 그가 지체 없이 지휘봉을 휘두른다. 건반이나 현이 아닌 단지 허공을 저었을 뿐이지만,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악기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지휘봉에 따라 정확하게 음악을 펼쳐 냈다.

나 역시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완벽한 타이밍에 피아노 음을 섞어 넣었다. 수십 개의 악기 사이로 파고 든 피아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갔다. 어제와 같은 방식이었지만, 확실히 훨씬 부드럽게 조화되고 있었다.

때론 연습이나 기술로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실제로 겪어 볼 때 비로소 드러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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