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52화 (652/1,277)

##  652화

미하일은 짧은 상담을 마치고 타티아나를 돌려보냈다.

어떤 경험이든지 간에 피아니스트는 혼자서 그 경험을 되뇌고 분석하며 자신의 것으로 할 시간이 필요하다. 타티아나는 어제 막 리빈스크에서 돌아왔으므로 홀로 연습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때문에 일부러 피아노 소리는 듣지 않았다.

미하일의 의도를 눈치챈 타티아나는 레슨이 없음에 의아해하지 않고 곧장 돌아갔다. 다음에 보다 확실하게 음악으로 증명하라는 뜻임을 모르지 않을 테니 분명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높은 수준으로 준비해 오겠지. 타티아나는 그런 학생이었다.

다음 레슨 시간을 스케줄에 체크해 놓고, 미하일은 다시 노트북을 폈다. 할 일들이 많았다. 오케스트라와의 일정은 물론이고 아직 정해지지 않은 타티아나의 콩쿠르 레퍼토리나 예선 참가 일정. 그리고 얼마 후면 10학년이 될 테니 그에 따른 커리큘럼까지. 비단 콩쿠르뿐만이 아닌 균형 잡힌 티칭을 준비해야 했다.

화면을 보고, 전화를 걸고, 음악을 걸고, 차를 마시길 몇 분. 타티아나가 떠나간 뒤로 조용했던 레슨실 문이 다시 쿵쿵 울렸다.

“미하일 있나?”

“들어오게.”

익숙한 친구 교사의 목소리에 답하자 곧 문이 벌컥 열렸다. 언제나 그렇듯 호쾌한 방문이었다.

구세프는 폴로셔츠 차림이었다. 셔츠를 입은 곰. 어깨에 힘을 조금 주면 셔츠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겉모습은 피아노 교사보단 레슬러로 보인다.

미하일이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자 구세프가 먼저 물었다.

“시간 되나?”

“물론.”

“이번 입학 실기 시험에 대해 이야기할 게 좀 있어서.”

그가 하는 물음은 지극히 피아노 교사다웠다.

곧 있을 신학기에 입학할 학생들은 이미 학교로 원서를 모두 제출했다. 그 원서에 크게 문제가 없다면 일단 실기 시험 기회는 주어진다.

그리고 각 분야의 기악 교사들은 그 후보들 중에서 중앙음악학교에서 음악을 배우기에 어울리는 학생을 뽑게 된다. 연주해야 하는 곡을 고르는 것에서부터 심사를 보고 합격시키는 것까지 모두 교사들의 몫이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겨우 일곱 살 된 아이의 재능과 정신력 등을 한순간에 파악한다는 건 굉장히 까다롭고 심적 소모도 큰 일이다.

이 엄중한 평가 시스템에 구세프는 늘 빠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편이었다. 어떻게 하면 보다 공정하게 심사하여 좋은 학생들을 입학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고 이렇게 동료 교사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다.

이번에도 거기에 관련된 일이었다. 이번 심사곡에 대한 평가 항목 중에서 수정한 부분이 몇 가지 있다면서 구세프는 리스트를 보여 주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세세한 부분이라서 이렇게 다시 확인받을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도, 구세프는 벽돌처럼 아랑곳 않았다. 엄격하고 단단하다. 중앙음악학교를 지키는 수호신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구세프일지도 모른다.

미하일은 자신도 모르게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뭘 웃나?”

“아니, 아닐세. 예브게니아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무슨 말?”

“음…… 자네가 합격시킨 아이들은 모두 잘 적응한다는 것이지.”

지금도 눈썹을 까딱이며 어깨를 꿈틀거리는 구세프는 늘 어딘가 퉁명스러워 보인다. 그 모습에 지레 겁먹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나이가 지긋한 예브게니아는 늘 구세프를 높게 평가했다. 그가 성공한 피아니스트라서가 아니라, 진정 아이들을 생각하는 뛰어난 교사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구세프는 러시아 예술 교육의 혹독함을 버티어 낼 수 있는 강인한 예술가들을 원했다. 그건 옥석만을 바라는 냉혹함에서 비롯된 기준이 아니라, 되레 못 버티고 깨어져 나간 아이들을 오랫동안 봐 온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합격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그 후로 11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예술을 업으로 삼아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때문에 그는 입학 심사에서 특히 더 신중하고 엄격하게 임했다.

예브게니아를 비롯한 다른 선생들은 구세프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입학시킨 학생들을 얼마나 아끼는지도.

“하.”

하지만 구세프는 늘 그렇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쓸데없는 소리. 지금 있는 녀석들 죄다 마음에 안 드는데.”

“하하, 에르네스트는?”

“그 녀석도.”

“오늘 왜 그러나? 갑자기. 에르네스트가 또 놀랄 이야기라도 했나?”

“아니, 그냥.”

구세프는 바로 말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그의 애제자 에르네스트는 근래 들어 기상천외한 이야기들로 구세프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부쩍 한숨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받아들인 모습이기도 했다.

구세프는 삐딱하게 책상에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뭐, 곧 있으면 음악원으로 떠날 녀석이니 그러려니 해야지.”

곧 돌아오는 1학기면 이제 에르네스트는 10학년. 그리고 2년을 보내면 이 학교를 졸업하여 떠나게 된다.

2년.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구세프나 미하일은 2년이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미하일은 조용히 차를 한 잔 타서 구세프에게 주었다. 구세프는 찻잔을 기울여 한 모금 마시고는 조금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이미 내 영향에서 벗어난 지 오래이기도 하고.”

“음…… 작곡 때문에?”

“다른 계기도 많았겠지. 어쨌든, 건방지긴 하지만 말한 바는 지키더군.”

약간 투덜거리던 구세프의 말은 결국 에르네스트를 인정하는 쪽으로 마무리되었다.

과거 음악가들이 연주회와 작곡을 당연한 듯 병행했음을 증거로 에르네스트는 자신 역시 그렇게 하겠노라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진 그 말을 너무나 잘 지키고 있었다. 깜짝 놀랄 정도의 음악을 벌써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아이인 줄 알았던 제자가 이젠 확고한 자신의 음악관을 가진 음악가가 되어 가고 있었다. 구세프는 그 사실에 대해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휑한 마음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 마음을 일부러 내쳐 버리려는 것처럼 구세프는 다시 한 번 퉁명스레 말했다.

“그 건방진 녀석과 친구들이 떠나더라도 다음을 이어 눈여겨보고 키우는 녀석들이 있긴 한데…… 1학년에서도 찾아둬야지. 그뿐일세.”

학생에게 정이 너무 들 것 같으면 일부러 묘하게 거리를 두는 건 구세프의 버릇 중 하나였다. 구세프는 저번 겨울 타티아나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있었다.

미하일은 살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느낌으로 구세프를 보다가, 타티아나를 떠올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아쉽군.”

“뭐가 아쉽나? 가야 할 녀석들이 가는 거지.”

“난 타티아나를 데려온 지 얼마 안 되었잖나.”

“……그런가.”

구세프는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어려서부터 에르네스트를 가르쳐 온 구세프는 정말로 이젠 가르칠 게 없고 자신의 손을 떠나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하일이 타티아나를 데리고 온 건 아직 2년도 채 안 된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미하일은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자각하곤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시간의 양보단 시간의 질이 더 중요하겠지. 특히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야 그렇지.”

지난 2년을 돌이켜 보면 앞으로의 2년도 기대된다. 물론 학년이 높아질수록 시간은 훨씬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미하일은 그런 생각은 접어 두기로 했다.

여기 있는 두 교사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아무튼, 9학년 녀석들은 2년 후까지 볼 것 없이 현재에 충실할 때이기도 하군. 타티아나는 잘 하고 있나? 얼마 전엔 리빈스크에 보냈다면서. 거기 오케스트라는 괜찮던가?”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스트라와 협연 경험이 부족하다 하여 무작정 일정을 잡고 보낸 건 사실 상당히 무리한 일정이었다. 그래도 타티아나의 실력을 믿고 진행한 일이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진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 전해 들은 바로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미하일은 일단 가볍게 이야기했다.

“그래, 그 애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지휘자로부터 전화가 왔었지. 잘 했나 보던데.”

“레퍼토리는?”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아르투르가 그야말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레퍼토리들에 대해 미하일은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겨우 이틀짜리 일정이었는데 레퍼토리가 네 곡이 넘었다. 거기에 오케스트라의 요청으로 리허설한 곡이 세 곡.

그 곡들의 제목을 듣자 구세프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냥 장난삼아 대충 치고 넘길 수 있는 곡들이 아니다. 각 곡마다 분명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결과물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구세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혹독한 일정. 그리고 그것을 기대 이상으로 수행해낸 타티아나. 이 사제는 가끔 말도 안 되는 것을 보여 주곤 한다.

“그냥 잘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하하하.”

미하일은 들켰다는 듯 크게 웃더니 덧붙여 말했다. 만족스러운 부분은 리허설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쪽 단원의 집에서 묵었다 하더군. 그 집 아이를 레슨해주기도 하고.”

다른 학생이 그랬다는 말을 들었다면 조심스럽지 못하고 건방지다는 생각부터 했을 것 같은데, 구세프는 어쩐지 당연하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는군.”

“자네도 그렇지?”

미하일이 웃으며 되물었다.

이전부터 느끼던 기분이긴 했다. 타티아나는 잘 훈련된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만 갖춘 것이 아니라 모든 음악가들에게 향하는 애정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건 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교수법도 차근차근 가르쳐놓게. 훗날 그 녀석은 분명 마스터클래스 등도 자주 할 것 같으니까.”

연주자들에겐 크게 두 가지 정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나는 무대에 서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후대를 가르치는 일이다.

그것은 비단 교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음악가라면 누구나 의무처럼 생각하며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강제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는 연주자들도 있긴 하지만, 타티아나는 적어도 두 가지 모두 놓치지 않으려는 연주자 부류에 속했다.

게다가 어려서 이론적인 개념을 잘 이해하기도 전부터 건반을 만져 온 여타 연주자들과 달리 타티아나는 어느 정도 이해력이 뒷받침되는 나이에 처음부터 피아노를 배웠기 때문에 이론과 노하우 등에도 상당히 강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어떻게 해낸 것인지 잘 설명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기초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건 미하일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 심화된 교수법을 가르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부량을 더 늘려도 될까 싶지만, 괜찮겠지. 작곡을 병행하는 학생도 있으니까.”

“당연하지. 이쪽은…… 말 말게.”

구세프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말 말라는 것이 정말 묻지 말란 소리처럼 들리진 않아서, 미하일은 한 번 더 물어보았다.

“어떤가? 요즘은.”

“작곡 대회에 내겠다면서 작곡 중인 협주곡이 거의 완성단계지. 나한텐 잘 보여 주지도 않더군. 선생의 의견이 들어가면 안 된다면서.”

“하하, 그렇구먼.”

피아노 소리에도 사사하는 선생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는 것처럼 작곡 역시 그래선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충실하게 임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구세프도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도와줄 수 있는 부분도 도움을 거절하는 건 내심 섭섭한 듯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악보와 음원을 제출해야 한다고 해서…… 그럼 음원은 어떻게 하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하는지 아나?”

“글쎄?”

“작곡 프로그램으로 미디midi를 찍어서 만들겠다 하더군. 말세야 말세.”

“푸하하하.”

보통은 협주곡을 출품할 때 음원을 요구하면 오케스트라 대신 피아노로 반주를 하여 내곤 한다. 하지만 혼자서 모두 해결하려면 정말 작곡 프로그램을 쓰는 수밖에 없긴 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세상이 바뀌다 보니 정말 미디 음악 제출도 허가해 준 모양이었다. 사실 곡의 구조를 객관적으로 뜯어보기엔 미디 음악이 편하긴 하다.

에르네스트는 과거의 음악가들을 말하며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를 추구한다. 때문에 그 음악은 클래식 음악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현대 음악가들처럼 음악을 다룰 줄도 안다. 그건 굉장한 이점이었다.

하지만 구세프는 그런 이점들은 일단 제대로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난 뒤에 알아서 하라는 투였다.

“아무래도 다시 한 번 말해 봐야겠군. 아무리 그래도 제출할 음원은 어쿠스틱 음악으로 하는 게 맞다고.”

인상을 쓰며 말하는 그를 보며 미하일은 그저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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