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3화
한동안 집에서 홀로 피아노로 솔리스트 레퍼토리와 협주곡 등을 연습한 나는 레슨 날짜에 맞추어 다시 미하일 선생님을 뵈러 갔다.
선생님은 두말없이 바로 레슨용 피아노에 앉으시더니 오케스트라 반주를 맡아 주셨다. 선생님의 반주는 진짜 오케스트라만큼이나 화려하고 풍성해서 내가 피아노에 집중하기에 편했다. 난 감사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반주에 맞추어 내 연주를 해나갔다.
오케스트라 한가운데 서는 연주자는 존재감이 없으면 그대로 삼켜져 버린다. 숨기거나 머뭇거리는 일 없이 확실하게 주장하고, 끌어내고, 뒤흔들었다.
내 마음 속 음악은 조금 더 선명해지고, 그에 따라 분명하게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왔다.
짤막한 3악장 연주를 마치고, 선생님이 날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타티아나. 피아노 반주로는 안 되겠는데.”
“과찬이세요.”
굉장한 칭찬이었다. 난 감사의 뜻으로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은 바로 다음 곡을 시작하지 않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이어 말했다.
“정말 연습용 오케스트라 미디 음원이라도 구해 봐야겠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고려하시는 것 같았다.
난 과거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 오케스트라 음원은 협주곡을 연습해야 하는 솔리스트들이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종종 쓰는 것이기도 했다.
“예전에 그런 걸 써 본 적 있긴 해요.”
“그래? 어땠니.”
“연주에 문제가 있진 않았어요. 스피커로 나오는 음악에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
협주곡 연주자를 위한 연습용 오케스트라 음원은 컴퓨터로 만든 미디 음원과 실황 녹음으로 된 두 종류가 있는데, 후자는 구하기가 정말로 어렵고 전자는 그보다 구하긴 쉬워도 한계점이 크게 두드러진다.
미디 음원은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박자로 흘러간다. 그 정도면 지휘자도 필요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음악적으로는 부족함이 되어 버리고 만다.
난 솔직하게 느꼈던 감상을 말했다.
“하지만 일단 소리가 너무 다르기도 하고, 어떻게 잘 해야 할지에 대한 감각이 옅어지곤 했어요……. 제가 느끼기엔 단순 연습 이상의 의미로 사용하기엔 어려운 것 같았어요.”
단점들이 여럿 있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결정적으로 음원의 음악성이 떨어지다 보니 이미지가 쉽게 연상되지 않고 어떻게 흐름을 잡아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움직이는 음악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진다.
때문에 난 미디 음원을 사용한 연습은 테크닉 연습에 국한시키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미하일 선생님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미디 음악에선 구조적인 음악성 정도를 느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연습을 하려면 오케스트라 음원이라도 구하는 편이 좋겠지.”
당연히 잘 아실 텐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셨는지 모르겠다.
내가 약간 의아해하자 선생님은 악보를 휙휙 넘기며 말씀하셨다.
“아무튼…… 네가 어느 정도 결실을 얻었는진 알겠다. 콩쿠르 무대에 올릴 레퍼토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슬슬 정해야 할 것 같고.”
“그래야겠죠?”
“그래…… 그럼 다음 곡도 들어 볼까.”
“알겠습니다. 선생님.”
난 그다음 협주곡도 한 악장만을 선생님과 함께 협연했다.
곡 전체를 하지 않고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악장들만 집중적으로 연주해 보고 레슨을 받으니 그만큼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짧은 시간 안에 곡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2시간 만에 협주곡 레퍼토리들을 훑어보고, 중점적으로 연구해 와야 할 부분들을 짚어 주신 미하일 선생님은 다음 레슨일을 정하고는 날 돌려보내셨다.
마음 같아선 몇 시간 정도 더 있고 싶었지만, 다음에 볼 때 훨씬 더 좋아진 실력을 보여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
그렇게 레슨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방학에도 나처럼 레슨을 받거나 연습실을 빌리는 학생들은 있었으므로 그리 이상할 건 없었지만, 난 이유 모를 끌림을 느끼며 그 소리를 따라가 보았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면서 난 여러 가지를 알아냈다.
일단 연습실만 쭉 늘어선 복도에서 나는 걸 보니 레슨은 아니었다. 그리고 혼자 협주곡 연습을 하는 중이다. 곡명은 모차르트의 협주곡 12번.
적당한 난이도의 협주곡을 연습하면서 중간중간 실수를 하는 모습도 보니 아마 6학년 이하가 아닐까 싶었다.
거기까지 추리해낸 나는 그 추리가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를 학생이 연습 중인데 그걸 확인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단순히 내 흥미 외엔 아무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데, 연습 소리가 멈추더니 곧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내가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섰을 때,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연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키의 연주자는 날 보자마자 깜짝 놀란 눈을 했다.
“!?”
“사샤?”
나 역시 방학에 학교에서 보리라곤 상상도 못한 만남에 무척이나 놀랐다.
“누나 왜 여기 있어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소리가 들려서…….”
“듣고…… 있었어요?”
“예. 조금.”
사샤는 처음엔 약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같았으나 내가 연주를 듣고 있었다고 하자 곧장 물어왔다.
“어땠어요?”
“그냥 지나치진 못했죠.”
정말 그뿐인 이유여서 짧게 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사샤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 기분은 좋아진 것 같아 보이지만, 어쩐지 방금 전까지 연습실에선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연습이 잘 안 되시나요?”
“그렇진 않은데 혼자 하니까 맞는지 틀리는지도 잘 모르겠어서요. 내일 레슨이니 그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지금에야 난 성악을 덧붙이기도 하고 총보 연주를 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협주곡을 혼자 연습하고 있지만, 다른 도움 아무것도 없이 혼자서만 연습하다 보면 그냥 손가락 연습만 계속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샤도 협주곡 연주가 아직은 서툴러 보인다. 사샤의 나이대엔 당연한 일이니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연습 결과 때문에 레슨을 하면서 혼날 생각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달래는 게 우선일 것 같아서 제안했다.
“무언가 마실까요? 제가 사 드릴게요.”
사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는 함께 휴게실로 가선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씩 뽑았다. 사샤도 나도 똑같은 주스였다. 아직 콜라를 마시면 안 되나 보다.
사샤는 허리를 숙여 캔을 꺼내더니 먼저 톡 따선 내게 건네주었다. 난 감사를 표하며 받았다.
“고마워요.”
“저야말로요.”
사샤가 키득거리며 답했다.
근처 벤치에 앉아서 음료수를 홀짝이고 있자니 주변이 고요하게 느껴진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8월의 햇살은 따사롭기만 했다.
사샤도 이런 날씨엔 나가 놀고 싶을 텐데. 연습하러 학교에 온 걸 보니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덥죠?”
“괜찮아요.”
“방학인데도 나와서 연습하는 걸 보니 열심이네요. 기쁘네요.”
“……누나가 기뻐요?”
“어…….”
왜 기쁘냐고 물어본다면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그런 마음이 드는데 왜 그런지 설명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었다.
“기뻐하면 안 되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할 말을 못 찾고 바보처럼 되물은 나에 비해 사샤는 훨씬 더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서요.”
이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난 반쯤 마신 음료수를 내려다보다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당장 나도 그리 편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샤를 위해 시간을 내어 주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열심히 하시는 것 도와드릴까요?”
“……?”
“제가 오케스트라를 맡아 줄게요. 그럼 연습이 더 잘 되겠죠?”
사샤는 당황해했지만 그래도 거절하진 않았다. 오케스트라 반주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굉장히 크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지체할 것 없었다.
우린 연습실을 바꿨다. 사샤가 쓰던 개인 연습실은 협주곡 연습을 제대로 하기엔 비좁았다.
피아노 두 대가 있는 듀엣 연습실로 온 나는 그중 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해 볼까요? 괜찮나요?”
사샤는 지금 바로 하냐는 둥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 있는 피아노에 앉아서 내 준비를 기다릴 뿐이다.
난 태블릿 컴퓨터를 꺼내어 보면대 위에 놓고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2번의 악보를 불러냈다. 예전 같았으면 악보를 빌려와야 했을 텐데, 참 편하긴 하다.
그렇게 악보를 본 나는 약간 생소함을 느끼기도 했다. 기존 보던 부분은 늘 피아노 부분이었지 오케스트라 부분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로 듣던 것이 많이 있어서인지 총보를 읽어내는 데에 그다지 어려움은 없었다. 몇 페이지 정도 읽어보니 그 뒤로도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시작할게요.”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고 난 먼저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템포는 알레그로allegro. 지금 이 화창한 여름 날씨를 그리는 것 같은 맑고 높은 선율로 음악이 시작된다.
한참 동안 피아노는 등장하지 않고 오케스트라만이 연주를 지속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건 피아노 두 대뿐이었다. 길게 이어지는 음악을 피아노 솔로 연주로만 듣고 혼동할 여지도 있었다.
때문에 난 특별히 신경 써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넓게 펼쳤다. 개별적인 선율은 위에 띄워 두고 바닥에 낮게 깔리듯 퍼지는 소리였다.
사샤는 내가 준비해 놓은 소리 위에 가볍게 따라와 주었다.
첫 시작은 약간 따로 노는 것처럼 느껴진다. 혼자 연습한 것만을 혼자 연주하는 느낌. 하지만 내가 그 옆에 오케스트라를 덧붙이자 사샤의 음악도 조금씩 달라붙어온다.
혼자서 연습하느라 협주곡에 대한 감을 잡지 못하던 연주가 점점 모양을 갖춰 나간다.
사샤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음악성도 좋은데다가 영민하고 이해력이 좋아서 바로바로 적응도 잘 하는 편이었다. 난 즐겁게 사샤의 오케스트라가 되어 줄 수 있었다.
10분 정도의 1악장 연주가 끝나자 손을 멈춘 사샤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사샤가 오늘 본 것 중에 가장 환하게 웃었다.
“너무 좋았어요.”
“정말인가요?”
“예. 일주일 내내 연습한 것보다 방금 10분이 더 잘 됐던 것 같아요.”
나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일주일이 있었기에 가능한 연주였어요.”
“그런 건가요?”
“예. 일주일 동안 열심히 했다는 걸 알 수도 있었고요. 잘 했어요. 사샤.”
내 칭찬에 사샤는 정말 기뻐했다. 이런 칭찬이라면 얼마든지 더 해 주고 싶었다.
난 그다음 이 분위기를 이어나가 더 연습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3악장까지 하더라도 25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그런데 사샤는 바로 다음 연주를 생각하지 않고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 듯했다. 난 잠시 기다리다가 사샤를 불렀다.
“사샤?”
“아…….”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나요?”
당연히 이 협주곡에 대한 생각이겠거니 했는데, 예상외의 답변이 나왔다.
“형도 요즘 협주곡 작곡하고 있거든요.”
“에르네스트가요?”
“예. 악보는 종이에 쓴 다음에 컴퓨터로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음에 안 드는지 맨날 인상만 쓰고 다니고요.”
난 계속 에르네스트가 작곡과 피아노 연습 등으로 바쁘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곡을 썼는지에 대해 굳이 하나하나 묻진 않았다. 그 자체로도 스트레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냥 독주곡이 아니라 협주곡을 쓰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컴퓨터로 오케스트라를 만들면서.
에르네스트도 상당히 뛰어난 연주자이니 조금만 시간을 들이면 총보 연주로 편곡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아마 작곡가로서의 어떤 방법인 것 같으니 따로 낼 의견은 없었다.
하지만 사샤가 마지막에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잘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건 무슨 의미지? 혹시 일이 잘 안 되고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샤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난 옅게 웃으며 물었다.
“일단 우리…… 2악장도 해 볼까요?”
“예.”
지금은 사샤에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난 그렇게 1시간 정도 시간을 들여 사샤의 협주곡 연습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연습을 마치고 나니, 이제 사샤 다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