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4화
점심으로 먹을 것을 사러 밖으로 나온 에르네스트는 계산대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없네…….”
지갑이 없었다. 분명 나올 때까지만 해도 챙긴다고 생각은 했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흐르는 음악들을 붙잡고 기억하는 데에 신경을 쏟다 보니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 참.”
진짜 밥 굶어가면서 음악 하게 생겼네.
어이가 없다 못해 웃겼다. 아무리 음악에 집중하는 게 음악가로서 바람직한 일이라곤 하지만, 일상생활에 이렇게 영향이 생기니 갑자기 허탈감이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계산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온 에르네스트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기도 싫어져서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았다. 돈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다. 멍하니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
하늘은 맑고 따뜻한데 배는 고프고 머리는 어지럽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다 접어두고 어디 한적한 곳에 가서 일주일 정도 쉴까 생각하다가,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자각하고 정신을 붙잡았다.
콩쿠르 연습은 물론이고 당장 작곡 대회에 보낼 협주곡을 마무리 짓고 음원을 만드는 일도 시급하다.
이것저것 신경 쓰지 않는다면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투 피아노로 음원을 만들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번엔 특수한 대회이다 보니 부탁하기가 영 난감했다. 작곡 자체에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타티아나에게 부탁해 볼 생각이라도 했을 텐데……. 이번엔 절대 그녀에겐 부탁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혼자서 작곡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작업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나마 간단해 보여서 택한 방법인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무언가를 굉장히 빠르게 익히는 편이기도 하고 컴퓨터도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았지만, 스마트폰으로 쓰는 어플과는 달리 전문 작곡 프로그램들은 워낙에 복잡하고 어려웠다. 단시간에 독학으로 며칠 공부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혹시나 해서 작곡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물어보기도 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영 신통찮았다. 정통 클래식 음악 작곡을 가르치시는 분에게 컴퓨터 프로그램은 낯선 분야였다.
“……그냥 오케스트라를 구해?”
곡은 이미 거의 다 썼는데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짜증이 났다.
아예 지금이라도 작은 오케스트라를 고용해서 악보를 주고 음원 녹음을 부탁할까 싶었다. 아마 일주일 정도면 할 수 있겠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애당초 돈 같은 걸 써야 한다면 이런 데에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
그런 생각을 하던 에르네스트는 지금 당장 지갑이 없어 50루블짜리 빵도 못 사 먹는 형편이라는 현실을 깨닫곤 힘이 쭉 빠졌다.
그때였다. 망연자실해진 에르네스트의 앞에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렇게 계시다간 까맣게 되실 거예요. 에르네스트.”
“어?”
타티아나와 사샤가 의아한 눈빛으로 에르네스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꿈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르네스트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았다. 햇살을 휘광처럼 등 뒤로 한 타티아나는 절대 환상 같은 게 아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뭐지? 저 애들이 왜 여기에? 무일푼으로 거리 벤치에서 멍때리고 있는 걸 보였으니 대체 어떻게 보일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에르네스트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일부러 시크하게 대답했다.
“잠깐 있었던 거야.”
“그런가요?”
“응, 바람 좀 쐬려고.”
뭔가 그럴싸하게 보였으려나? 전혀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빵 사 먹으러 나왔다가 지갑이 없다는 걸 깨달은 바보천치처럼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
그런 일념으로 태연한 척을 하고 있는데, 타티아나에겐 여전히 궁금증이 많아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귀 부근을 톡톡 치며 물었다.
“전화는 왜 안 받으셨나요?”
“어…… 스마트폰 두고 나왔거든.”
자신이 말하면서도 요즘 세상에 스마트폰을 두고 다니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싶었지만, 피아니스트들에게 스마트폰은 때때로 귀찮은 방해물이기도 하다. 종종 꺼 놓는 일도 잦다 보니 집에 두고 나왔다는 것도 그리 이상하게 보이진 않는 듯했다.
타티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 납득하는 것 같은 눈치를 보이자, 그 사이를 틈타 에르네스트가 파고들었다.
“신경 쓰지 마. 그나저나 이런 곳까진 무슨 일이야? 타티아나.”
“학교에서 사샤와 만났거든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사샤를 돌아보고, 천천히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학교에서 레슨을 마치고 집에 가려던 차에 사샤가 혼자 협주곡 연습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고, 시간을 내어 연습을 도와주고 이렇게 차로 데려다주게 된 것.
그리고 집에 데려다주는 김에 선물을 들고 에르네스트의 얼굴도 보고 가려고 했다고 한다. 그 선물을 사러 마트에 온 것이고.
잠깐 보러 왔다는 말은 물론 기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에르네스트는 괜히 불안감을 느꼈다.
그때 타티아나가 때마침 잘 되었다는 듯 물었다.
“식사는 하셨나요?”
“응. 먹고 나왔어.”
“그래요? 무엇을 드셨는데요? 사샤는 집에 먹을 것이 없다고 했었는데.”
“…….”
반사적으로 먹었다고 답한 에르네스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설마하니 사샤가 그런 말까지 했을 줄은 몰랐다.
그의 좋은 머리도 지금만큼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뭘 먹었다고 해야 하지?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리던 에르네스트는 결국 얼버무리듯 말했다.
“그냥 뭐 대충…….”
“그렇게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넘어가다니?”
“아무것도 안 드셨죠? 제 눈엔 보여요.”
타티아나가 살짝 눈을 흘겼다.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고 했는데 전부 쓸모없었던 건가? 에르네스트는 뜨끔한 마음에 어떻게든 이 대화를 수습해 보려고 하다가, 아무리 변명해 봐야 결국 타티아나를 속일 순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밥 안 먹었다고 친구에게 혼나리라 생각도 하지 못했던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물었다.
“그렇게 티나?”
“글쎄요, 거짓말도 해 본 사람이 잘 알잖아요?”
“……뭐?”
“후후. 요즘 작곡하느라 바쁘신가 보네요.”
하지만 타티아나는 깊게 따지고 들지 않고 그저 에르네스트의 상황을 이해해 주었다.
그녀 역시 음악에 미쳐 있는 피아니스트로서 어떤 상황인지 어느 정도 유추해낸 것 같았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그냥 지갑을 놓고 온 바보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짧게 대답했다.
“그냥 좀.”
“그래도 식사를 거르시면 안 돼요. 이렇게 되었으니 잠깐 식재료를 사 갈까요?”
“……지금?”
“예, 지금. 드시고 싶으신 거라도 있나요?”
타티아나의 물음에 에르네스트는 깜짝 놀랐다.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 그녀의 말은 달리 해석할 여지도 없이 명백했다.
사샤가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와, 누나가 해 주는 거예요?”
“예. 어때요?”
“당연히 좋죠!”
사샤는 아무 생각 없이 기뻐하는 것 같았지만 에르네스트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해 줄 건 없을 텐데, 이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는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냥 고맙다고 하기에도 민망하고, 이렇게 신경 써 주는데 하지 말라고 하기엔 미안하다.
당황한 에르네스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사샤가 재촉했다.
“뭐 해? 형.”
“…….”
“안 갈 거면 지갑이라도 줘. 내가 가서 장 봐올게.”
“……지갑 없어.”
“어?”
손을 내밀고 있던 사샤는 그럼 어떻게 하냐는 듯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야말로 묻고 싶었다. 나 지금 어떻게 해야 하냐?
“괜찮아요.”
타티아나는 왜 아무것도 없이 마트에 와 있냐고 길게 묻지 않았다. 이럴 때 그녀는 상당히 쿨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다정하기도 했다.
“제가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행?”
“예, 저 없이 두 분뿐이었다면 어땠을지…… 걱정이잖아요?”
그런 걱정을 해준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에르네스트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타티아나가 친구들에게 많은 신경을 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걱정받고 싶진 않았다. 약한 모습으로 관심을 끄는 건 비겁하다. 그는 늘 그런 생각을 한편에 지니고 있었다.
“하…….”
그렇지만 실제로 지금은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일단 타티아나가 이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할 일이다.
마트로 들어선 세 사람은 이런저런 식재료 등을 구매했다. 한 끼 식사만 할 것이었으므로 양이 많을 필요는 없었지만 파스타와 사이드메뉴 몇 가지만 하려고 해도 종류가 이것저것 많이 필요했다.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타티아나와 사샤의 뒤를 따르며 두 사람이 담는 것들을 운반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타티아나가 계산을 끝낸 후 집으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반씩 들자고 했지만, 에르네스트는 이것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럼…… 잠시 주방을 빌려도 괜찮을까요?”
집에 도착한 타티아나는 이 와중에도 에르네스트에게 양해를 구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뭘 한다고 해도 말릴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고는, 멀뚱히 있지 않고 옆에 서서 재료들을 다듬는 것을 거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감자를 깎거나 채소를 씻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사샤도 기특하게 손을 보태려 했지만 주방에 세 명까지는 필요하지 않아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도록 했다.
“…….”
잠시 두 사람은 말없이 각자 맡은 일에 집중했다. 수돗물을 쓰는 소리와 무언가 칼로 다듬는 소리만이 울린다. 하지만 같은 부엌에 있으면서 한마디도 안 하고 있자니 어색했다.
에르네스트는 평소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야 했다.
“오늘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요.”
가볍게 말문을 트자 타티아나도 밝게 웃으며 답했다. 그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모습이 에르네스트의 마음을 더욱 편치 않게 했다. 그는 결국 항복이라는 듯 말했다.
“아니야, 진짜로. 뭐든지 할게.”
“뭐든지요?”
“응.”
괜찮겠지 싶어 말한 건데, 타티아나는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지 고개를 들고 멈칫하더니 신중히 말했다.
“음…… 생각 좀 해 볼게요.”
“……뭘 생각씩이나 해? 무섭게?”
“무섭다니요? 절 못 믿으시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것도 우습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타티아나가 뭐라고 하든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물론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를 그렇게 괴롭힐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손을 멈추더니 살짝 돌아서며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저기, 있잖아요.”
소원 이야기인가? 에르네스트는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하며 들었다.
타티아나가 천천히 말했다.
“아까 사샤에게 들었어요.”
“뭘?”
“요즘 대회에 출품할 협주곡을 쓰고 계시다고요.”
갑자기 요리하다 말고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잘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일단 묻는 대로 대답했다.
“맞아. 슬슬 완성 직전이야.”
“컴퓨터를 사용하면 작곡하시기에 더 편한가요?”
사샤가 그 이야기까지 했구나.
그런 부분에 대해 잘 모르는 타티아나는 순수한 의문으로 물어온다. 현대에 와서 편지를 쓰는 것보다 문자 메시지를 쓰는 게 훨씬 간편한 것처럼, 손으로 악보를 쓰는 것보다 작곡 프로그램을 쓰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직접 써 본 에르네스트는 일단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쉬운 척해 봐야 어차피 타티아나에게 들통날 것 같았고.
“아니? 미치기 직전이야.”
“미, 미쳐요?”
“원하는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게 쉽지 않은 것처럼,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어렵나 보네요.”
“그냥 독학으로 배워나가는 중이야.”
언젠가 조금 익숙해지면 모를까, 일단은 손으로 쓰는 게 편했다.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조금 더 몸을 돌려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음원은 만드셔야 하고요?”
“응. 꼭 컴퓨터로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든 해 보려고.”
“그래요?”
그리고 타티아나는 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방법을 택하냐는 듯 의문을 표했다.
“절 두고 왜요?”
에르네스트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