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64화 (664/1,277)

##  664화

예선 DVD에 대한 조언을 해 주고, 콩쿠르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난 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이전보다 편안해져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날카로움을 거둬들이고 에르네스트는 조심성을 약간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방금 네 연주 조금만 수정해 보면 안 돼? 믹싱 컨트롤에 대해서 배우고 싶은 게 있는데.”

“뭐? 안 돼!”

“별건 아니고 잠깐이면 되는데.”

“싫어. 소름 끼쳐.”

“무슨 소름까지 끼치냐……?”

아나스타샤는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 양어깨를 감싸 안으며 눈을 흘겼다. 하지만 반쯤은 이미 장난이었다. 에르네스트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혀를 내밀었다.

가벼운 장난과 웃음. 한동안 두 사람은 다른 그 어떤 입장도 아닌 친구로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웃음이 멎고 나선 다시 진지한 음악가들의 시간이 돌아왔다. 마카로프가 그 사이에 참가해선 아나스타샤의 레퍼토리에 대한 짧은 평을 해 주고 에르네스트가 낸 의견에 대해 보충 의견도 덧붙였다. 그 모든 것이 설득력 있고 납득할 만한 의견이라 신중하게 참고할 만했다.

마카로프는 에르네스트에게도 방금 전 실시간으로 다루었던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더 해 주고, 이어서 그가 연습 삼아 해 보면 좋을 만한 방법들도 여럿 알려 주었다. 에르네스트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바로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렇게 조언을 마친 마카로프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음, 물건은 내일 즈음 보내 드리겠습니다. 택배가 아니라 화물 운송 서비스를 쓰려다 보니.”

“알겠습니다.”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스타샤가 흥미를 보였다.

“무슨 물건?”

“신디사이저.”

“작곡에 쓰게? 프로듀서한테서 중고로 산 거야?”

마카로프가 대신 대답했다.

“그냥 준 겁니다.”

“예? 그냥요?”

“저보다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값비싼 악기를 선물로 받았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마카로프와 에르네스트를 번갈아 보더니, 의심하는 눈초리로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네가 달라고 한 거 아니지?”

“아니거든.”

“뭐 그러면…… 괜찮나.”

가볍게 웃으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에르네스트가 어떤 면에서 인정을 받았기에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이해한 듯했다.

하지만 이해하고 인정한 것과 그녀의 장난기는 별개였다.

아나스타샤는 일부러 그런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마카로프의 옆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 애가 받은 선물을 시장에 팔거나 그런 애는 아니에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마카로프가 크게 웃었다.

“푸하하, 하하. 친구가 보장해 준다니 믿음이 가는군요.”

“그렇죠?”

아나스타샤가 생글거리며 마카로프의 웃음에 기름을 부었고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마카로프는 모르시잖아? 네가 그런 양아치일 수도 있다는 걸.”

“내가 지금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

“아마도 그럴걸?”

“……말을 말자 그냥.”

이 장난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장난으로 밝아진 이 분위기에 고마움을 느낀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괜한 한숨만 연거푸 쉬며 싫은 티를 내고, 아나스타샤는 마카로프와 죽이 맞아 농담을 주고받는다. 에르네스트는 무의식중에 합의된 것 같은 이 상황이 그리 싫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놀림감이 되거나 장난의 대상이 되는 걸 그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그렇게 차와 함께 잡담을 주고받길 잠시, 마카로프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두 사람에게 말했다.

“슬슬 가셔야 할 때군요.”

“아, 그러네요.”

이곳은 엄연히 음악 작업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스튜디오였고 용건이 끝났다면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마카로프의 시간을 오래 빼앗고 있었다는 걸 느끼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카로프는 느긋한 미소를 짓더니 책상에서 차 키를 집어 들며 말했다.

“집까진 어떻게 가실 겁니까? 지하철을 타신다면 제가 근처 역까지 태워다 드리죠.”

“저흰 괜찮습니다. 지금까지로도 충분해서.”

에르네스트가 사양했으나 마카로프는 부담 갖지 말라는 투로 이어 말했다.

“아뇨, 어차피 역 근처에 볼일이 있습니다.”

“그러시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차피 역에 가야 한다면 큰 부담이 아니다. 아나스타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거기에 에르네스트도 자동적으로 편승하게 되었다.

스튜디오의 문을 잠그고, 세 사람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건물 옆의 주차장에서 마카로프가 자신의 승용차를 운전해 나왔다.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그 차 뒷좌석에 나란히 올라탔다.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말없이 운전을 하던 마카로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늘 두 분의 모습 인상 깊었습니다.”

“……?”

그냥 무턱대고 와선 도움을 청했을 뿐인데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카로프가 큭큭 웃으며 이어 말했다.

“콩쿠르엔 안 그래도 경쟁자들이 많으니 여기서 신경 쓸 것 없다고 제가 말씀드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까운 연주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곤 있었습니다. 안 좋은 쪽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해도 같은 콩쿠르에 참가하는 친구끼리 경쟁 심리를 가지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카로프는 실제로 그런 광경을 몇 번이고 봐온 듯했다.

마카로프는 그 경쟁심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정당한 무대에 정당하게 오르고자 하는 모습이더군요. 보기 좋았습니다.”

“좋게 봐주셨다면 감사해요.”

“하하, 정말 큰 무대에 가게 될 겁니다.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그는 확신하는 어투로 그렇게 말했다.

스튜디오에서 역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카로프가 역 앞에 차를 세우고 두 사람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시길.”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고마워요. 마카로프.”

마카로프는 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차를 운전하여 다른 차들 사이로 사라졌다.

에르네스트가 잠시 도로를 바라보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가자.”

두 사람은 함께 역 안으로 들어섰다.

역 안은 수많은 인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노선을 다시 확인하고는 각자 집까지 가는 티켓을 끊고 개찰구를 지나쳤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헤어질 필요는 없었다.

잡담이나 하면서 걷고 싶었지만 워낙에 역이 시끄럽고 사람이 많아서 걸으면서 대화를 하기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 복잡한 와중에 에르네스트에게 말을 걸어오는 한 여성이 있었다.

“저기,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

“?”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멈춰 선 에르네스트가 바라보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하며 말했다.

“세상에, 팬이에요!”

“아…… 반갑습니다.”

“사인 부탁드려도 되나요!?”

원래 콘서트홀이 아닌 밖에선 사인을 거절하는 연주자들도 많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만년필을 꺼내며 정중하게 물었다.

“성함이?”

“로자예요!”

그녀가 꺼낸 수첩에 사인을 해 주자 잔뜩 긴장해 있던 로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만개했다.

“고맙습니다!”

그에게 사인을 받은 로자는 몇 번이고 감사인사를 하며 앞으로도 응원하겠다는 말을 남기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조용히 옆에서 바라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픽 웃으며 물었다.

“인기 많아서 좋겠네?”

에르네스트는 가끔 이런 일을 겪기도 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인기에 목을 매거나 바라진 않았다. 그저 알아봐 주는 사람들에겐 고마워할 뿐이었다.

그리고 유명세가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유명할 뿐이다. 지금도 주변 사람들 몇 명이 이 광경을 보고 흥미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냥 지나쳐 가고 있었고.

또 무언가 장난을 걸어오려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너도 종종 사람들이 말 걸잖아?”

“난 피아니스트라고 알아보고 말 거는 게 아니거든?”

“그것도 인기인 건 같아.”

“…….”

아나스타샤야말로 사람들에게서 많은 제안을 받곤 했다. 모델부터 배우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아나스타샤는 사실 뭘 해도 잘할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그런 걸 그리 즐기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

두 사람은 지하철에 올라탔다. 운 좋게 비어 있는 두 자리가 보였다. 나란히 앉자 상당히 가까이 붙게 되어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괜찮을 정도가 되었다.

에르네스트는 일단 잡담이나 할까 생각했다. 어쩌면 아나스타샤와의 사이에 필요한 건 그런 편안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단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후년엔 운전면허 딸까.”

“갑자기?”

문득 든 생각이라 잡담 주제로 던져 본 것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의아해할 만도 했다.

“갑자기는 아니고, 예전부터 그런 생각 했었어.”

“으흠…….”

열여덟 살이 되면 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된다. 아나스타샤는 듣고 보니 슬슬 생각할 만하다는 듯 콧소리를 흘렸다.

그러던 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타티아나 태워 주려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금까진 그 애가 우리 맨날 태워다 주곤 했잖니? 그러니까 그에 대한 보답으로?”

오늘 내내 이 자리에 없는 타티아나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때문에 갑자기 그녀의 이야기가 나오자 에르네스트는 머리가 조금 복잡해졌다. 아나스타샤가 어떤 의미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시끄러운 지하철에선 바로 파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얼핏 본 아나스타샤의 얼굴엔 이 이야기를 잡담 이상으로 끌고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질문을 살짝 비껴 대답했다.

“그 애가 대중교통을 안 타는 건 탈 이유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경호 문제이기도 할걸.”

“그렇겠네.”

아나스타샤는 싱겁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되레 고민에 조금 빠지고 말았다.

면허에 대한 생각은 이 복잡한 지하철에 타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는 데에서 나온 생각이었지만,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타티아나를 옆자리에 태워 주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아마 필연적으로 검은 벤츠가 뒤에 따라붙을 것 같기도 했다. 운전을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그대로 빅토르가 튀어나와서 타티아나를 데리고 가겠지.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한 에르네스트에게 잠자코 있던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아무튼, 면허 딸 수는 있겠어?”

“……하면 되겠지.”

“자신만만하네?”

“지금 밖에 도로에 다니는 차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딴 걸 나라고 못 딸 이유가 뭐야?”

면허가 그리 쉽게 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은 들은 것 같지만, 무작정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 잠깐 놀러 갈래?”

“……뭐?”

“면허 따기에 앞서 연습으로 오락실에서 해 보는 거지.”

무슨 오락실이야?

타티아나가 있으면 아나스타샤는 마치 남자애도 끼워 넣어야 한다는 듯 에르네스트를 부르곤 했지만, 이렇게 둘이 있을 땐 처음이었다.

물론 훨씬 더 옛날엔 아나스타샤와 놀러 간 적도 있었다. 그때의 생각이 났다. 에르네스트는 게임 등에서 이긴 기억이 별로 없었다.

어지간하면 그냥 집에 가자고 하려는데, 아나스타샤는 이미 결정되었다는 듯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말했다.

“다음 역에서 내리자.”

“바로??”

“응.”

에르네스트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오늘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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