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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65화 (665/1,277)

##  665화

어떤 계획도 없이 무작정 일어선 두 사람은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서야 역의 이름을 보았다. 라쟌스키 프로스펙트 역. 에르네스트는 평생을 모스크바에서 살았지만 이곳엔 와 본 적이 없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했다.

“일단 나가 볼까.”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는지 스마트폰으로 근처 지도를 검색했다.

잠시 후 오락실을 찾았다며 그녀는 출구 쪽으로 향했다. 별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도 그 뒤를 따랐다.

“…….”

잘 모르는 거리를 두 사람은 말없이 거닐었다.

주변 풍경도, 아나스타샤와 다니는 이 상황도 좀 어색하다. 무언가 알고 있다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원래도 계획 없이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고. 때문에 평소 같았다면 제대로 지도를 보고 있는 건 맞냐고 물어보거나 직접 찾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 와서 돌아가겠다고 하기엔 이미 늦었기도 하고, 이 애와 어디든 끝까지 가 볼 참이다.

“여기겠네.”

“쇼핑몰이야?”

“응. 여기 지하에 오락실이 있나 봐. 왜, 뭔가 살 거라도 있니?”

“글쎄? 보고.”

아나스타샤가 다다른 곳은 한 쇼핑몰이었다. 모스크바 중심부에 있는 대형 쇼핑몰들에 비하면 지어진 지 꽤 오래되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규모라면 내부의 오락 시설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일단 무작정 그 안으로 들어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서 코너를 도니 번쩍거리는 입구가 등장했다. 한눈에 봐도 오락실의 입구였다.

그 안엔 온갖 시설들이 가득했다. 가정용 게임기로 게임은 해도 오락실엔 오지 않는 에르네스트에겐 이런 광경도 조금 생소했다. 하지만 대충 어떻게 노는 것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전 게임 머신이나 펀치 기계, 크레인 머신, 에어하키 등등. 그중엔 가볍게 즐길 만한 시설도 많다.

“저깄다.”

아나스타샤는 주변을 죽 둘러보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자동차 핸들이 달린 기계가 있었다.

자동차 경주 게임이라면 해 본 적이 있다. 이것도 비슷하게 대충 핸들을 돌리고 페달을 밟으면 되는 건가. 에르네스트는 별생각 없이 그 옆으로 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생긴 게 굉장히 복잡했다. 두 개인 줄 알았던 페달은 세 개였고 오른편엔 조작할 수 있는 봉도 두 개나 있었다.

약간 당혹스러움을 느낀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비슷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별것 아니라는 듯 아나스타샤는 웃음을 머금었다.

“설마 이런 게임기도 제대로 못 다룰 거면서 면허 이야기를 한 건 아니겠지?”

“이런 걸 면허 시험장에서 가르쳐 주는 거 아냐? 다 할 줄 알면 누가 돈 내고 배워?”

“…….”

상식적인 반론이 재미없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눈을 흘기더니 그에게 손짓했다. 일단 얼른 앉아 보라는 것 같다.

좌석에 앉은 에르네스트는 약간 막막함을 느꼈다. 자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냥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모르겠네.”

그래도 이것저것 만져 보다 보면 어떻게 알게 되겠지 싶어서 에르네스트는 동전을 넣었다. 화면이 뜨면서 차량과 트랙을 선택하라는 화면이 떴다. 하나도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엑셀만 몇 번 밟아서 일단 게임 화면으로 넘어갔다.

차량 경주가 시작되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에르네스트는 핸들을 잡고 엑셀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카운트가 0이 됨과 동시에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

“……???”

하지만 차량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옆에 있는 다른 차량들만 앞으로 쌩 하고 달려 나갔다. 그저 게임인데도 당혹스러웠다. 이거 왜 안 움직여?

이것저것 작동시켜 보려 해도 꼼짝도 않고, 뒤편에선 아나스타샤가 숨이 넘어가라 웃는 소리만 들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에르네스트는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른이 타야만 출발이 되는 건가? 급기야 그런 생각마저 든다.

그때였다. 옆에서 낯선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야,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넣어야지.”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가벼운 티셔츠에 모자를 쓴 걸 보니 오락실에 놀러 왔다가 에르네스트가 고전하는 걸 보고는 참견하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평소 에르네스트는 자존심으로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스타일이지만, 이럴 땐 거꾸로 솔직하게 나가는 쪽이 더 당당하다는 걸 알기도 했다. 그래서 대놓고 물었다.

“클러치가 뭔지부터 알려 줘야죠.”

“……그것도 모르고 거긴 왜 앉았어?”

“배워 볼려고요.”

“몇 살이야?”

“열여섯.”

“슬슬 배울 때인가?”

남자는 몇 년 전 자신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까딱이더니 혼자 중얼거리며 납득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다른 게임기에 앉더니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내가 하는 거 잘 봐. 한 번만 가르쳐 준다.”

부탁도 안 했는데 남자는 제멋대로 말하더니 자신의 게임을 시작했다. 그다음 하나하나 조작할 수 있는 것들을 가리키며 명칭과 역할 등을 설명했다. 에르네스트는 설명을 한 번만 듣고도 그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왼발로 페달을 밟으며 봉을 움직인다.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봉 쪽도 자세히 바라보았다. 거기엔 1부터 5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집중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저 게임일 뿐이지만 양손과 발이 쉴 새 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그냥 밟으면 가고 돌리면 회전하는 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듯,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운전을 하며 도로를 다니고 있었다. 그도 할 수 있어야 했다.

잠시 후, 코스를 완주한 남자가 핸들에서 손을 놓으며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자, 대충 알겠어?”

“복잡하군요.”

“이건 아주 기초적인 거야. 눈길에서 운전하려면 여기서 배워야 할 기술들이 훨씬 더 많지.”

눈이 자주 오는 러시아에선 눈길 운전 요령도 충분히 배워 둘 필요가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데없이 끼어든 참견꾼이긴 하지만 그는 확실히 도움이 되긴 했다.

남자는 킥킥거리며 웃더니, 에르네스트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뒤쪽엔 들리지 않게 말했다.

“운전 학원 추천해 줄까?”

“……아직은 생각 없어서.”

“그냥 놀이로 생각하면 안 돼. 저기 뒤에 있는 애 태우고 다니다가 어디 들이받기라도 해 봐. 미리미리 해야 한다고.”

“…….”

“뭐야, 그런 거 아니었어?”

둘이 사귀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다는 듯 남자는 피식 웃더니 에르네스트의 핸들을 가리켰다. 그럼 지금 직접 해 보라는 뜻이었다.

이 참견꾼이 더 파고들진 않아 다행이다. 에르네스트는 혹시나 다른 이야기가 이어질까 싶어 바로 게임을 다시 진행했다.

이번엔 배운 대로 그대로 이행했다. 브레이크를 내리고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바꾼다. 1단부터 차례로 올라가는 것이라 했던 것을 그는 잊지 않고 정확하게 따라 했다.

아까 전엔 출발도 못 했던 화면이 앞으로 전진했다. 에르네스트는 더욱 속도를 내며 핸들을 조작했다.

“…….”

처음엔 기어를 올려라 내려라 말이 많던 참견꾼 남자도 어느 정도 지나자 조용해졌다. 이제부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에르네스트가 직접 해 보면서 배우는 게 훨씬 빠르다는 것을 눈치챈 모습이었다.

그만큼 에르네스트의 이해력과 응용력은 뛰어났다. 하지만 물론 처음부터 완주에 성공할 순 없었다. 코스를 반 정도 돌았을 때, 그는 갑자기 미끄러지는 차량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그대로 벽에 들이받았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화면이 캄캄해졌다.

캐쥬얼한 레이싱 게임이었다면 그대로 다시 차를 돌려 코스로 합류할 수 있었겠지만, 이 게임엔 다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무자비한 게임이었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에르네스트가 그런 생각으로 인상을 쓰고 있을 때, 옆에서 보던 참견꾼 남자가 진심으로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센스가 있네. 잘하는데?”

“방금 충돌했는데요?”

“아니, 이 정도면 진짜 잘하는 거야. 변속도 매끄러웠고.”

그런가?

어색하긴 했지만 처음 치곤 배운 대로 잘한 것 같단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차를 출발시키지도 못하는 그를 보며 웃어 댔던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쉽게 칭찬해주지 않았다.

“네 옆자리엔 절대로 안 탈래.”

벽에 충돌하긴 했지만, 그래도 꼭 그렇게 말해야 하나?

에르네스트도 까칠하게 대꾸했다.

“안 태울 거니까 걱정 마.”

“흥.”

아나스타샤는 이젠 자기 차례라는 듯 에르네스트에게 손짓했다.

자리에 앉은 아나스타샤는 무언가 되새기듯 핸들과 페달 등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만지작거렸다. 에르네스트는 그게 그녀의 적응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아나스타샤는 처음 보는 것들도 저렇게 몇 번 만져 보고는 금방 능숙하게 다루곤 했다. 에르네스트도 무언가 배우는 건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편이었지만 아나스타샤처럼 정말 무엇이든 잘하진 못했다.

“오.”

참견꾼 남자가 탄성을 냈다.

아나스타샤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운전을 하고 있었다. 뒤에서 잠깐 배우고 에르네스트가 하는 걸 본 게 전부였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꽤나 잘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에르네스트가 미끄러진 구간을 넘어가지 못하고 벽에 부딪혀 게임오버 당했다. 이미 한 번 사고가 난 걸 봤던 터라 속력을 충분히 줄였는데도 그것만으론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아나스타샤는 완주하지 못한 게 분한지 화면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에르네스트는 그가 당한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나도 네 옆엔 안 타.”

“처음이니까 그렇지! 나라고 처음부터 다 잘하는 줄 아니?”

“어이가 없네…….”

나도 마찬가지라고 해 봐야 아나스타샤의 막무가내엔 통하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하는 걸 본 참견꾼 남자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너네 둘 다 잘 하겠네 뭐. 평생 면허 못 따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가 보기에 너희는 따겠다.”

“……그래요?”

“어.”

그런 말을 들으니 자신감이 조금 더 생겼다. 물론 실제 차량은 다르겠지만, 열심히 잘 배운다면 아마 큰 문제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운전에 대한 긴장이 조금 풀어진 에르네스트는 보다 편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조금 있었다. 바로 18살이 되자마자 면허를 따는 게 평범한 건지 궁금하기도 했고.

“실례지만, 그쪽은 언제 면허 받은 건데요?”

“나? 아직.”

“???”

놀라더라도 잘 내색하지 않는 에르네스트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표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당연히 자동차 면허가 있어서 가르쳐 주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오락실 레이서였던 거야? 도대체 뭐야 이 자식?

황당해하는 건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던 남자는 약간 즐기는 것 같은 웃음까지 짓더니 곧 손을 흔들며 물러났다.

“간다. 여기 애들 아닌 것 같은데, 잘 놀다 가.”

“…….”

남자는 쿨하게 말하곤 휙 돌아가더니 난데없이 멀쩡히 있던 펀치 머신을 괜히 한 대 치고 갔다. 그 뒷모습을 보니 뭔가 머쓱해하는 것 같기도 한데, 정말 뭔지 모르겠다.

에르네스트는 내후년엔 정말로 제대로 된 운전 학원을 알아봐야겠다 생각하며 인상을 썼고, 아나스타샤는 약간 다른 감상을 말했다.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이라 좋네.”

자동차 면허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은 전혀 의심하지 않고 속아 넘어갔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걸 보면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긴 하다. 황당하긴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약간 맥이 풀린 느낌으로 팔을 스트레칭하더니, 옅게 웃으며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다른 것도 해 볼래?”

“그래.”

이 오락실엔 다른 놀거리도 많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와 이렇게 놀러온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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