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9화
상황은 이러했다.
올해 초부터 미하일 선생님은 내 협연을 염두에 두고 기존 친분이 있던 오케스트라들과 만남을 가지셨고, 덕분에 여러 곳에서 좋은 응답을 받기도 하셨다.
그중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pacific symphony orchestra는 아주 호의적인 대답을 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일정을 기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선생님은 방학이 되자마자 어떻게 할 수 없는지 직접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 오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오케스트라와 접선을 하시던 중, 뜻하지 않게 기회가 생긴 것이다.
이걸 좋은 기회라 해도 될진 잘 모르겠지만.
“지휘자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입원 치료 중이라 하더구나.”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겐 지병이 있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그 지병이 악화되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준비하던 협연은 진행해야 하기에 오케스트라는 빠르게 다른 객원 지휘자를 초빙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협연자가 기존 지휘자가 아니라면 하지 않겠다고 하고는 떠나 버렸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연주회는 그대로 취소되어 버렸고.
종종 있을 수 있는 트러블이긴 하지만 오케스트라 관계자들 입장에선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코앞에 닥친 연주회라면 티켓 판매도 다 끝났을 텐데 도로 환불도 해야 하고, 이미지에도 엄청난 타격이 있을 테니까.
어쨌든 그 손해를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오케스트라는 빠르게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는데, 그때 미하일 선생님이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찾아왔던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나 보다.
대체 난 어떻게 선생님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선생님은 태연하게 말씀하셨다.
“난 한 것도 없단다. 네 이름을 말하니 바로 알아보더구나. 하하, 연주 영상을 보고 나선 더 말할 것도 없었고.”
물론 선생님이 아무리 노력하셔도 내 실력이 형편없었다면 협연은 꿈도 못 꿨을 테지만, 그래도 난 그보단 선생님의 역할이 훨씬 더 컸다고 생각한다.
“…….”
상황은 이해했다. 난데없이 연주회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오케스트라와 객원 지휘자, 그리고 멀리 모스크바의 피아노 연주자. 그렇게 모여서 연주회를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미하일 선생님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니. 타티아나.”
이런저런 어려운 생각 않고 보자면 이건 기회였다.
물론 단시일 내에 협연을 준비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내가 준비하는 연습과 경험은 사실 시간이 촉박하면 촉박할수록 좋기도 했다.
콩쿠르에선 시간이 많이 주어지지 않고, 때문에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서의 연습이 필요한 것이니까.
하지만 타인의 불행을 기회로 삼으며 기뻐해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스멀거리며 내 기분 속에 파고들었다.
“그저 좋아하지만은 않는구나.”
“그게……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제게 좋은 기회를 가져와 주셨다는 건 알아요. 다만…….”
지병 때문에 입원하셨다는 지휘자님이 누구인지 난 전혀 모른다. 모르는데도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린다. 몸이 아파서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런데 내가 그 자리에 서도 되는 걸까. 혹시, 그런 날 미워하시진 않을까. 급기야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세상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란 상식적인 믿음이 어두운 생각들을 밀어내지만, 그럼에도 내 머릿속은 여전히 맑지 않았다.
어려워하는 날 보며 미하일 선생님은 간단히 일축했다.
“이렇게 생각하려무나.”
선생님이 들어 올린 손가락을 바라보며 생각을 멈추었다. 그 사이로 말소리가 스며든다.
“연주회를 기다렸을 수천 명의 사람들의 기대가 허공에 날아가 버리기 직전이지.”
“…….”
“네가 그걸 다시 붙잡아 주는 거란다. 타티아나.”
선생님은 내 시점을 연주자와 오케스트라에서 청중들 쪽으로 돌려 주셨다.
정신적으로 조금 몰려 있던 관점이 확 트여지는 기분이 든다.
무대가 비어 있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게 무대에 오르겠냐고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난 무대에 오르고야 말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그러고야 마는, 난 그런 사람이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난 이윽고 조심스레 대답했다.
“하겠어요.”
“잘 생각했단다.”
미하일 선생님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 목소리엔 내게 향하는 칭찬과 약간의 감사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결정이 나자 선생님은 찻잔을 들고 목을 축이시더니, 바로 연주회를 진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셨다.
“그럼 기존 티켓을 취소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대로 연주회를 볼 수 있도록 하자꾸나.”
원칙대로라면 기존 연주회는 없어졌으니 티켓은 전부 환불해 주고 새롭게 새 연주회를 홍보하고 티켓을 파는 것이 올바르겠지만, 그러면 시간이 훨씬 많이 소요된다. 뒤에 있는 다른 정규 일정에 영향이 갈 우려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선생님은 조금 유연하게 미리 구매한 티켓으로도 관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말씀하시고 계셨다.
그 시점에 그냥 아무 연주회나 볼 생각이었던 사람들이라면 아마 쉽게 납득하겠지. 하지만 내가 만약 청중이라면 의아해할 것 같다.
“그대로 할 수 없지 않나요?”
“무슨 말이지?”
“청중들의 기대는 원래 있던 지휘자님과 연주자님에게 향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러니 티켓 가격도 당연히 할인해야…….”
청중들이 티켓을 사는 것엔 여러 이유가 있다. 2시간 동안 어떤 음악이 준비되어 있는지 프로그램을 보고 사기도 하고, 그 홀에 한 번쯤 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사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바로 사람 때문에 산다.
특정 지휘자의 교향곡을 듣고 싶어서, 혹은 평소 팬이었던 연주자의 연주를 듣고 싶어서.
그런 이유가 가장 강렬하게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당연히 그것은 곧 경쟁력이 되어 티켓의 가격이 천차만별로 나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원래 일정대로의 연주회는 분명 긴 시간을 두고 준비되었을 테지. 하지만 이번엔 시간도 짧고 인원들도 임시로 교체된 것이다.
물론 객원 지휘자님은 대단한 분이실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상식적으로 티켓값을 낮춰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
다시 한번 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 스스로의 값어치에 대해 평가하기 시작했다.
뭔가 철학적인 것 같으면서도 아주 세속적이기도 한, 미묘한 균형 위에서 고민하자니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다.
그런 날 보던 미하일 선생님은 무엇이 그리 즐거우신지 한참 동안 소리 없이 웃으시더니, 이윽고 말씀하셨다.
“글쎄다.”
무슨 말씀이신가 싶어 고개를 드니 선생님이 태연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오케스트라 쪽에선 전혀 할인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예?”
“나 역시 그렇고 말이지.”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선생님은 다시 한번 이번엔 소리를 내어 크게 웃으셨다.
***
연주회까지 남은 시간은 10일. 블라디보스토크 일정은 최대한 빠르게 준비되어야 했다. 오케스트라 측에선 하루라도 내가 빨리 도착해야 리허설을 더 해 보고 연주회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한시가 급하다고 하는 것 같다.
난 그래서 결정이 난 뒤 바로 내일 출발하기로 했다.
“바로 괜찮겠니?”
“예. 아마도요.”
선생님은 걱정이 많아 보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극동의 도시이다. 게다가 최소 열흘 넘게 머물러야 하는 일정이다. 그런 긴 시간 동안 있으려면 여러 가지 알아 봐야 할 것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하지만 여기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시차도 있고, 이동시간도 있기 때문에 내가 하루 늑장을 부리면 그쪽은 이틀이 늦어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내 생각엔 서두르자면 서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온 난 바로 오빠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야? 타티아나.”
“절 도와주실 수 있나요.”
예고르를 찾아가도 되겠지만, 저번에 정원에서 내가 필요하다면 리조트도 구해 주겠다며 농담을 하던 오빠가 생각났다.
그게 완전히 농담은 아니었는지, 오빠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전용기가 필요해요.”
“……뭐?”
평소 난 부탁 같은 걸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드물게 한 부탁이 전용기라서 오빠는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설마 전용기를 사 달라고 이해한 건 아니겠지?
난 혹시나 싶어 덧붙여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일이 생겼어요.”
“언제?”
“내일이요.”
“……???”
오빠는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비즈니스도 하지 않는 내가 하루 만에 급하게 전용기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일이 무엇 있느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의심의 끝에 다다른 오빠는 무례하게 물었다.
“타티아나, 너 내가 외출하지 않는다고 저번에 뭐라고 그래서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그렇게 유치한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난 한숨을 쉬었다. 천천히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미하일 선생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연주회를 할 수 있게 된 일, 그리고 최대한 빨리 도착해야 한다는 것까지. 말하고 보니 그렇게 복잡하진 않았다.
그리고 내 설명을 듣고 난 루슬란 오빠는 내가 개인적인 어떤 이유로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고 짐작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미안…….”
“괜찮아요.”
“하…….”
오빠는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있는 것 같지만 그 영민한 머릿속으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을지 난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아마 내일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수를 생각하고 있겠지.
이윽고 결론을 낸 오빠가 다시 날 내려다보았다.
“알았어. 아마 할 수 있을 거야. 아버지에게도 말했어?”
“저녁에 말씀드리려 해요.”
“그래.”
그리고 아버지에게 설명하는 일은 오빠에게 하는 것보다 백배는 쉬웠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일이 있다고 말하자마자 바로 그렇게 하라며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든 간에 내가 합당한 부탁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었다. 이런 믿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
난 식사 내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며 요즘 내가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내년엔 무엇을 할 건지 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전용기를 타기로 결정하고, 빅토르와 소로킨, 자하르에게도 열흘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줄 수 있는지 양해를 구했다.
내 경호원들은 뭐 그런 걸로 양해까지 구하냐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난 그저 미안하기만 했다.
짐을 싸는 건 나제즈다가 도와주었다. 사실 피아노 연주자가 챙겨야 하는 짐이라고 해 봐야 옷가지 정도가 전부였지만…… 나제즈다는 척 봐도 열흘 치가 넘는 옷들을 캐리어에 준비하고 있었다.
하루에 옷을 세 번씩 갈아입으란 거예요……?
하지만 난 그녀가 이럴 때야말로 의욕을 낸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딱히 말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준비를 거의 마친 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알람에 맞춰 눈을 뜬 건 자정이었다.
날짜로 보면 하루가 넘어갔으니 어제 선생님과 이야기하면서 내일 출발하겠다고 한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늦게라도 당일 미팅을 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오후 5시.
이곳에서 그곳까진 비행기로만 8시간에 시차가 7시간이 난다. 거기에 공항에서 이동하는 시간 등을 합치면 지금 시간엔 일어나야 했다.
“…….”
잠이 살짝 부족하다. 난 스트레칭을 해서 잠기운을 떨쳐내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어차피 차량과 비행기로 이동하긴 할 거지만 8월에도 밤은 차갑다. 난 얇은 케이프를 하나 걸쳤다.
저녁에 준비한 짐들은 이미 다 차량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더 들고 갈 것도 없었다. 내 소지품들을 담은 핸드백 하나가 전부였다.
저택 밖으로 나오니 밤바람이 파고든다.
그리고 그 앞엔 환한 헤드라이트가 들어와 있는 검은 차량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가실까요. 아가씨.”
“이 시간에 고생이에요. 모두들.”
난 내 경호원들을 안으며 미안함을 전했다. 하지만 그들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빅토르가 뒷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무엇 때문에 아가씨가 이런 시간을 자청하시는지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그 의지에 힘껏 따를 뿐이죠.”
물론 모든 건 내가 결정한 일이니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했다.
나중에 똑바로 보답을 해 줘야지. 난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면서 차량에 올라탔다.
이른 새벽. 그렇게 나와 경호원들은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