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0화
새벽의 도로를 달려 공항에 도착한 후엔 모든 것을 빅토르가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해외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간소화된 몇 가지 절차만 거치고 나니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얌전히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있으니 빅토르가 와서 확인하고는 킥킥거렸다.
“제가 따로 말씀드릴 것도 없군요.”
“섭섭해하진 마세요.”
“하하.”
그는 짧게 웃고는 내 좌석에 팔을 기대어왔다.
말해 줄 것도 없다고 했으면서, 그래도 그는 그냥 돌아가지 않고 나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비행은 8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리고 지구가 도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플러스 7시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15시간 이상 흘러 있겠군요.”
시차가 나는 지역으로 여행을 하면 그런 일을 겪는다. 동쪽으로 향하는 여행에선 정말 하늘에서 하루가 증발해 버리는 일도 흔했다.
난 이미 그런 것까지 다 고려했기에 이 새벽에 길을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처음 생각해 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뿐이지만 빅토르가 즐거워하길 바라니까.
“손해 보는 기분이에요.”
“대신 돌아올 땐 1시간밖에 안 흐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겠습니까?”
결정적으로 내가 하늘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거나 하진 않지만 그런 기분이라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
“이득 보는 기분이 들겠네요.”
“그렇죠. 돌아올 때를 기대하시죠.”
그는 그때가 기대된다는 듯 말하더니 다시 똑바로 서선 조종석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나와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그 나름대로 이런저런 다른 일들을 확인하러 갈 것이다.
그렇게 가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내게 한 가지 조언했다.
“아무튼 그쪽에 가셔서 할 일들을 준비하시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조금 주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별로 못 주무셨으니.”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이니 그도 피식 웃었다.
“그럼 잠시.”
빅토르가 객실을 떠나고, 이 안엔 나와 승무원 한 분만이 남았다. 승무원분은 내게 말도 걸지 않고 저편에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내가 부르지 않으면 그녀도 움직이지 않겠지. 이 새벽에 전용기를 이용하면서 말 한마디 안 하고 있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싶다가도, 괜히 부르는 게 더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것 말고도 난 당장 확인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미하일 선생님과 이야기를 마친 지 12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난 함께해야 할 오케스트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으니 기본적인 부분들이나마 알아두어야 했다.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 1935년 주립 라디오 오케스트라로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음악 집단이었다.
난 태블릿 컴퓨터로 음원이나 영상 등도 몇 가지 찾아보았다. 최근엔 어떤 연주를 하는지 이런 식으로 빠르게 알아볼 수 있다.
물론 오케스트라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지휘자가 객원 지휘자로 바뀌었을 테니 연주 역시 바뀌었을 테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가지는 음색과 스타일은 남는다.
금관이 강한지, 현악이 풍부한지. 그런 부분들을 빠르게 분석해 나갔다. 태블릿 컴퓨터와 이어폰으로 듣는 것이지만 개략적인 파악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다음은 내가 그들 앞에서 빠르게 준비할 수 있는 레퍼토리들의 확인이다.
리사이틀이 아닌 협연이니 기본적으로 최소 2곡에서 3곡의 협주곡을 준비해야 했다. 열흘 내로 최대한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곡들을 추리고, 또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 역시 확인한다.
이전 연주 기록이 남아 있어서 서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대조해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실 오케스트라와 미팅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난 항상 미리 준비해 가는 편이었다. 특히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더더욱.
“…….”
열흘이라는 시간은 빠듯하다. 사실 어떤 연주자들은 이런 일을 받아들이는 게 정신 나갔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미하일 선생님이 내게 이 건을 추천했다는 것 자체가, 해낼 수 있다고 판단하셨기에 낸 과제라 여겼다.
짧은 시간 안에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추어 완성된 음악을 연주하는 일.
그건 비단 콩쿠르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협연을 자주 하게 된다면 여러 번 겪을 일이었다.
실제 연주회를 일종의 과제로 여기는 건 안 될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내겐 열의와 집중력을 가져와 주기도 했다. 난 보다 신경 써서 지난 연주들을 듣고, 내 머릿속의 총보들을 체크했다.
물론 빅토르가 말한 대로 컨디션 관리를 위해 자 두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도착 5분 전입니다. 아가씨. 이제 일어나셔서 안전벨트를 매 주셔야 합니다.”
“으응…….”
어둠 속에서 눈을 뜨니 약간 당황스럽다. 하지만 곧 난 안대를 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곤 안대를 벗었다. 환한 빛에 눈이 시리다.
그 시린 시야에서도 난 빅토르가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닫곤 고개를 돌렸다.
왜 빤히 보고 있는 거예요? 실례잖아요. 내 무언의 항의가 느껴졌는지 빅토르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괜히 뭔가 뒤적였다.
잠시 후, 비행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안전한 운항을 해 주신 기장에게 박수를 보내고, 빅토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입니다.”
모스크바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에 도착했다는 실감은 잘 들지 않았다. 공항이라고 해 봐야 평평한 활주로에 비행기들만 보여서 그런 걸까.
하지만 스마트폰으로 지역에 따라 자동으로 맞춰진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 4시경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한 게 새벽 1시 즈음이었다는 걸 생각하니 정말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양손을 위로 하며 스트레칭했다.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어서 굳어 있는 몸을 살짝 풀어 주고는, 빅토르를 따라 잠시 걸었다.
활주로 밖으로 나와서 차량들이 있는 곳으로 가니, 그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검은 차량이 한 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빅토르를 올려다보자 그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미리 이곳에서 준비해 놓은 차량인 것 같았다.
“소로킨이 먼저 가 있는 것 같군요.”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언제 가신 건가요……?”
분명 방금 착륙해서 내린 건 똑같은데 대체 언제 앞질러 가서 차를 준비해 놓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빅토르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피식 웃더니 캐리어를 끌고 먼저 그쪽으로 향했다.
차량에 타니 소로킨과 자하르가 이미 날 기다리고 있었다. 소로킨이 백미러를 통해 이쪽을 보며 물었다.
“바로 프리모르스키 필하모닉 홀로 모실까요.”
“예.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소로킨은 깍듯이 대답하고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 내가 만날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프리모르스키 리지널 필하모닉primorsky regional philharmonic 소속의 오케스트라였다.
일반적으로 필하모닉은 오케스트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심포니와 달리 지역 협회가 있는 회원제 오케스트라 시스템 그 자체를 뜻한다.
현대에 와선 그런 의미들이 많이 퇴색되어서 보통 지역의 이름만 앞에 달고 필하모닉이나 심포니 등 자유롭게 부르는 편이지만, 전통대로 필하모닉 협회를 두고 그 밑에 오케스트라를 여럿 두는 경우도 많았다.
이 프리모르스키 리지널 필하모닉만 하더라도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 말고도 주립 브라스 오케스트라governor brass orchestra 등 몇몇 연주 집단을 가지고 있었다.
“…….”
약속 시간까지 약 40분. 그리 오래 걸리진 않는다.
슬슬 본격적으로 집중해야 할 때였다. 컨디션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오랜 시간 비행한 것치고는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오늘은 아마 회의만 하지 않을까 싶지만 즉석에서 실력 테스트를 바란다면 얼마든지 응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정도 생각도 안 하고 갔다가 창피한 일을 당하고 싶진 않았다.
꼼꼼하게 팔을 스트레칭하면서 곡들을 다시 되새기자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도착했습니다.”
“…….”
어제 전화를 하고 정말 하루 만에 난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의 콘서트홀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시간도 늦지 않고 딱 맞춰 왔다.
소로킨과 자하르는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은 1차 미팅으로 짧은 회의만 할 예정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레퍼토리를 확인하고, 실력도 살짝 가늠하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차량에서 내린 난 우선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4층짜리 흰색 건물엔 좁고 긴 창문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이런 좁은 창문은 러시아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18세기 프랑스 양식이었는데, 어쩐지 이 건물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보다 유독 더 유럽풍의 느낌이 많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잠깐 건물을 구경하고는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빅토르가 내 뒤를 따라와 주었다.
“어떻게 찾아오셨죠?”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약속이 있어요.”
“아,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맞습니까?”
“예.”
“이쪽으로 오시죠.”
입구에 있는 직원에게 방문 목적을 밝히자 금방 오케스트라와 약속되어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번엔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는 걸까?
본래 있던 지휘자가 병환으로 없으니 아마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을지도 몰라.
그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해야 할지 잘 생각하고, 이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협조하고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난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마주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사람들에 대비했다.
“……누구지?”
커다란 문을 열자 그 안에 있던 몇 명의 시선이 이쪽으로 휙 날아든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미 충분히 준비를 한지라 당황스러워하거나 움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약속한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진짜로 왔네.”
“세상에.”
인사를 하던 난 그들의 반응에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진짜로 왔다는 건 무슨 의미지? 그럼 내가 약속을 펑크라도 낼 줄 알았나?
당혹감이 서린 눈으로 바라보니 서 있던 한 남자가 성큼 다가오며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우리가 너무 무례했죠.”
내가 조금 올려다보면 시선이 닿는 키. 그리고 시원시원한 외모와 매력적으로 웃는 얼굴을 지닌 남자였다. 난 이 사람을 이미 영상과 사진 등에서 본 적 있었다.
그 역시 날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 바로 약속을 잡자마자 바로 이렇게 날아와 주신 게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놀란 것이니까 너무 언짢게 생각하진 말아 주시고.”
“아뇨, 괜찮아요…….”
내가 고개를 젓자 그가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그리고 나선 큰 손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 손을 맞잡자 그가 정식으로 진지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습니다. 이곳의 악장인 시어도어 로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예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연주자들 간엔 악수만으로도 전달받는 것들이 꽤 있다. 난 힘있게 쥔 로스의 손아귀로부터 아주 강인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내 전체 인생보다 긴 시간을 바이올린에 집중했겠지.
그런 로스가 보기엔 난 정말 어리고 미숙한 연주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건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내 걱정과 달리 로스는 손을 놓더니 이전보다 훨씬 더 신뢰가 담긴 미소로 말했다.
“당신의 연주는 영상으로만 몇 번 봐서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오늘 이렇게 직접 보여 주신 열정에 이미 감탄했습니다.”
진지한 경의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 때문에 난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지만, 24시간 안에 비행기를 타고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 올 수 있는 연주자가 흔치 않다는 것 정도는 따져볼 것도 없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몇몇 도움들이 지금 날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이다.
그 모든 것에 감사하며 올려다보니, 로스가 기분 좋게 말했다.
“우리,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군요.”
기존에 계획된 연주자의 대신으로 와서 열흘 만에 협연해야 하는 상황은 사실 누구에게도 그리 달갑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