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688화 (688/1,277)

##  688화

블라디보스토크 이튿날 예술감독직에 위촉된 나는 그날 밤 늦게까지 곡들을 연구하고 프로그램을 짜 가서 결국 흡족한 평가를 받아 냈다.

그 후로는 며칠 간 거의 비슷한 일정이 계속되었다.

리허설 시간은 오후 2시로 변경되었으므로 오전엔 호텔에서 푹 쉬다가 10시 즈음 프리모르스키 필하모닉 홀로 향한다.

나에겐 늘 개방되어 있는 피아노 리허설룸을 빌려선 아침연습 겸 웜업을 하고, 홀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느긋하게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그리고 저녁 6시나 7시까지 쭉 리허설이 이어진다. 휴식 빼고 서너 시간 정도 되는 리허설인데 집중도가 굉장히 높아서 그 결과물을 내는 능률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나와 오케스트라는 겨우 며칠 만에 곡 두 개를 거의 한계까지 끌어올려 놓고 있었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이 음악에 대해 모두가 은근한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게 열정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리허설을 마치고 단원들을 퇴근시키고 나면, 호텔로 돌아온 뒤엔 예술감독으로서 무대를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 있게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하거나 지휘자님과 의견을 교류한다.

지휘자님은 종종 내 음악적 지식의 수준이 꽤 높은 편이라며 감탄하시곤 했다.

난 내가 피아노 외엔 문외한이라 생각하고만 있었지만, 학교에서 배운 협주곡 지식들이나 성악, 마카로프 프로듀서에게 배운 어쿠스틱 엔지니어링,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챔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스타니슬라프와 같은 분들에게서 배운 여러 지식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보다 한참이나 노련하고, 또 틈날 때마다 시험을 하려 하시는 짓궂은 지휘자님과 회의를 하면서도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꽤 고단한 일정이지만 체력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거나 하진 않았다. 꾸준히 내 몸 상태를 체크하며 컨디션 관리도 함께 해 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호텔에 있는 스파 시설이 꽤나 도움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며칠 내내 호텔과 콘서트홀만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날 수행하던 빅토르는 살짝 걱정이 되었나 보다.

“아가씨.”

“예, 빅토르.”

늦은 저녁이자 이른 밤이라 할 수 있을 시각.

호텔방에서 편한 복장으로 침대에서 할 수 있는 필라테스 동작들을 몇 가지 연습하고 있는데, 불쑥 빅토르가 찾아왔다.

그는 날 보더니 어깨 부근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제가 좋은 운동 가르쳐 드릴까요?”

“무슨 운동인가요?”

“플란체라고 하는 건데.”

생전 처음 듣는 운동이름을 말한 빅토르는 갑자기 손바닥을 바닥에 대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대로 팔굽혀펴기라도 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빅토르의 다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과 수평한 상태로 고정되었다.

“……?”

난 헛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눈을 비볐다.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봐도 빅토르의 몸 중 바닥에 닿은 건 손뿐이었다.

차라리 저대로 물구나무를 섰다면 덜 놀랐을 것 같은데, 어떻게 수평자세가 가능한 건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거의 공중부양에 가까운 무언가처럼 보인다.

나도 모르게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운동이 아니라 마술 아닌가요……?”

“하면 됩니다.”

“…….”

하면 된다. 몸을 사용하는 악기 연주자로서 나도 믿어 의심치 않는 말이긴 하지만, 저런 걸 흉내낼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난 팔굽혀펴기도 하나 똑바로 못 할 정도니까. 손목에 무리가 갈까 무섭기도 했고.

아무튼 갑자기 왜 운동을 보여 주나 싶었다.

“음. 그래서 어쩐 일로 찾으셨나요?”

“다름이 아니라.”

빅토르는 커다란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나더니 손을 탁탁 털고는 내게 말했다.

“오늘은 토요일이기도 하니, 늦은 시각이긴 하지만 잠깐 나가서 관광이라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정말 생각도 못한 시간에 생각도 못한 제안이었다.

나도 모르게 창밖을 바라보니 어두운 밤하늘 아래 밝은 불빛들로 밝혀진 도시가 보인다. 나도 이 도시를 둘러보며 관광을 하고 싶었다. 아직 바다를 가까이에서 제대로 못 보기도 했고.

하지만 관광을 하고픈 생각이 막 본격적으로 고개를 내밀기 전에 마음 속 어딘가에서 덜컥 하고 책임감이 제동을 걸어온다.

주말에 연주회로 가장 바쁜 경우가 많은 오케스트라엔 휴일이 딱 정해져 있지 않다. 그 오케스트라와 함께 협연을 해야 하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리허설은 휴일 없이 전부 잡혀 있었다.

내일도 바쁘고 시간은 많이 늦었다. 난 살짝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빅토르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날 설득하려 했다.

“이전엔 다른 지역에 가시면 관광도 하시고 둘러보시면서 많은 감흥을 느끼시는 것 같았는데…… 이번엔 처음 오는 곳인데도 전혀 다른 곳에 가 보려 하질 않으시더군요.”

상트페테르부르크나 파리 등 다른 도시를 음악 목적으로 방문해서도 난 꼭 관광을 하며 그 도시의 풍취를 먼저 느껴보곤 했다.

음악은 곧 작곡가,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자연뿐만 아니라 하나하나의 건물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풍경 등이 드러나는 분위기와 음악도 있었으니 관광은 곧 내 음악의 해석을 풍부하게 해 주는 원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엔 시간이 없기도 하고 맡은 직책도 있다 보니까 여유가 없어서 그쪽엔 생각이 닿지 않았다.

“……그랬나요?”

“그랬죠.”

“듣고 보니 그렇네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니 빅토르가 다시 한번 은근히 제안해 온다.

“밤바람이 시원할 겁니다. 잠시 머리를 식히시는 건 어떻습니까?”

만약 미하일 선생님이 곁에 계시더라도 몇 시간 정도는 놀러 다니라고 허락해 주실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빅토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거절하기 미안하기도 했고.

결정을 내린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 머리는 늘 냉정한걸요.”

“그게 아니라…….”

“후후, 알아요. 무슨 뜻인지. 음,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곧 준비할게요.”

멈칫하던 빅토르는 곧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기더니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문을 닫고 나갔다.

나갈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던 난 일단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빅토르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실례라 생각하며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그래도 놀러 간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꽤나 걸려 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 시간도 안 쓸 순 없었다.

8월 블라디보스토크의 밤은 선선하다. 얇게 입고 나갔다가 여름 감기라도 걸린다면 정말 큰일 난다. 난 블라우스와 바지, 그리고 재킷과 모자까지 챙겼다.

전화로 빅토르를 불렀더니 대기하고 있던 그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내 방을 노크했다. 빅토르는 내 차림을 보자마자 말했다.

“역시 쇼핑몰로 가실 건 아닌 것 같군요?”

“아하하, 그렇게 보이시나요?”

야외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느껴진 모양이다. 난 빅토르보다 먼저 앞장섰다.

“가요, 빅토르.”

“알겠습니다. 걸으실 겁니까?”

“예. 밤바람을 쐬고 싶네요.”

호텔 밖으로 나오니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듯한 바람이 날 맞이했다. 확실히 공기의 감촉이 다르다. 난 모자챙을 살짝 당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시간이면 보통 호텔에서 나가지 않았던 터라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여유롭게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아졌다.

뒤따라 나온 빅토르가 내 옆에 서더니 말했다.

“그럼…… 도보로 안내하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어디로 가냐고도 묻지 않고 빅토르를 따라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디로 가면 되는지 일러주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호했을 빅토르도 오늘은 내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콘서트홀로 향하는 길과 비슷한 길을 따라 걷는다.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던 길이라 이젠 익숙하지만, 한밤중에 목적지도 불분명한 길을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신선함을 느끼며 밤 산책을 하는 와중 빅토르는 시시한 농담을 던져 오기도 했다.

건물에 달빛이 걸려 드리워지는 긴 그림자와 바다 내음이 느껴지는 바람, 그리고 그의 농담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그렇게 한동안 걷다가 멈춰선 곳은 바다가 보이는 커다란 광장이었다. 광장 한가운데엔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는데, 밝은 조명으로 무척 신비롭게 보였다.

블라디보스토크 해변공원. 이 도시에 대해 알아볼 때 이런 관광지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와 본 건 처음이었다.

“바다를 이제야 제대로 보네요.”

사실 공원이라기보단 이 오션 뷰를 즐길 수 있는 거대한 테라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가서 바다에 발을 담그는 것보다는, 사람들과 떠들썩한 분위기를 공유하면서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는 곳.

지금 난 물놀이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으므로 딱 적절한 곳이기도 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많아요.”

“주말이라 그런 것도 있겠고……. 저 밑쪽으로 야시장이 열린다고 합니다. 이것저것 파는 것 같군요.”

“어서 가 봐요!”

해변광장에 열리는 야시장이라니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빅토르를 재촉해서 사람들이 몰리는 곳으로 향하자, 천막을 친 가판이나 간이 카페 등이 보였다. 이런저런 간식거리나 음료, 과일 등을 팔고 있었는데, 밤중인데도 온갖 화려한 조명들로 굉장히 밝았다. 온통 관광객들로 붐비며 에너지가 넘치는 분위기였다.

난 흥미진진하게 두리번거리면서 시장을 구경하다가, 내 옆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빅토르를 휙 돌아보았다.

“드시고 싶은 것 있나요? 빅토르?”

“전 괜찮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구경하는 게 재미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덥석 무언가 사는 건 그리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빅토르의 입에 넣어 줄 것이라면 뭐든지 간에 의욕이 생긴다.

반드시 무언가 입에 넣어 주고 말겠다는 의지로 그를 바라보자, 결국 픽 하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과일 정도는 괜찮겠죠.”

“그런가요?”

“많이 사지는 마시고, 프룬 한두 알만요.”

내가 과일 가판을 통째로 사기라도 할까 봐 미리 막겠다는 듯 그게 덧붙였다. 원래 많이 살 생각도 없었는데, 왜 걱정인지 모르겠다.

난 근처에 있는 과일가판을 하나 찾아냈다. 빠르게 훑어보니 프룬도 팔고 있는 게 보였다.

“어서 오세요.”

“프룬 두 알만 주시겠어요?”

많이 사 봐야 전부 먹기도 어렵다. 그래서 두 알만 달라고 했더니 가게 주인은 제일 큰 것으로 두 알을 내게 주었다.

프룬은 다게스탄이나 크라스노다르같은 도시가 있는 러시아 남서부 카프카스 지방에서 흔히 키우는 자두의 일종이다. 서쪽 끝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키운 과일들이 이곳 동쪽 끝까지 어떻게 실려 왔을까. 모스크바에서 온 나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빅토르에게 한 알을 건넸다.

“여기요, 빅토르.”

그는 내게서 프룬을 받고는 빙글 돌려 보더니 한 입 깨물었다. 나도 그를 따라 프룬을 한 입 물었다.

상큼한 과일 과즙이 입안에 퍼지며 행복을 더해 준다.

나도 모르게 쌓이고 있던 긴장과 스트레스 등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난 환하게 웃으며 빅토르에게 말했다.

“이렇게 나오니까 좋네요. 진작 다녀 볼 걸 그랬어요.”

“그간 바쁘셨잖습니까?”

빅토르가 데리고 나오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우린 그렇게 가벼운 걸음으로 야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기도 하고, 해변을 따라 포장된 길을 걷기도 했다.

선착장 쪽으로 가면 수상택시 같은 걸 타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한참이나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따로 방법을 알아볼까요.”

“괜찮아요. 바다에 나갈 생각은 없어요.”

굳이 애써서 배를 타고 나가지 않더라도 지금 이대로도 즐거웠다.

“기분 좋네요.”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 낯선 도시에 음악을 하러 와선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 역할을 충실히 잘 해 나가고 있다는 충족감이 든다. 본래 해야 하는 연주자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예술감독의 일도.

며칠간 진행된 리허설도 만족스럽고, 함께 하는 음악가들도 마음에 든다. 그들 역시 날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 페이스대로 앞으로 일주일이면 분명히 해낼 수 있겠지.

난 연주자로서 또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고,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다보면 내년엔 정상에서 전 세계의 실력자들과 마주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두근거린다.

내게 그런 기회가 허락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바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막연한 믿음이란 걸 느끼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쁜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할 만한 것들을 하나하나 자각해 나가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가시죠. 오래 걸으셨는데.”

“그럴까요.”

우린 해변공원의 둥근 광장을 지나 길게 뻗은 해변길로 향했다. 그곳엔 규칙적으로 늘어선 가로등과 반원 모양의 벤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누구나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

잠시 앉아서 빅토르가 사 온 음료수를 홀짝이고 있자니 멀리 보이는 바다와 배들이 시야에 가득 차서 멍한 기분이 든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은 절로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멍하니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부분을 보던 내 앞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지나가기도 했지만 시야에 들어와도 그리 신경 쓰이진 않았다.

“……?”

그런데 도중에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스쳐 지나간 한 실루엣이 갑자기 눈에 확 들어왔다.

초점을 멀리 두고 있던 난 빠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있는 노년의 남자였다.

이런 곳에서 내가 알아볼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 걸음걸이가 너무나 익숙해서, 난 그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그 사람의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 것은.

순간 난 심장이 멎어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

멀리 있는데다가 가로등 불빛이 역광으로 음영을 만들어서 제대로 알아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 모습은 흐릿하게 남아 있던 내 기억을 자극했다.

“교수님……?”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연주회 등으로 복잡하던 머리가 깨끗하게 표백되어 버리는 기분.

멍한 상태로 난 그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제대로 알아보거나 할 틈도 없이, 노년의 남자는 곧 다시 고개를 돌리곤 길을 따라서 가 버렸다.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힘이 풀리며 천천히 숨이 가빠져 온다. 그것은 어둡고 무거운 무언가가 날 덮쳐 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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