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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694화 (694/1,277)

##  694화

프리모르스키 콘서트홀과 그 근처의 모든 빌딩과 창고 등의 보안 관리자와 접촉을 마친 빅토르는 자하르의 전화를 받고 조금 놀랐다.

“이미 호텔이시라고?”

-  그렇습니다. 빅토르.

자신이 없는 사이 타티아나를 수행한 자하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빅토르는 시계를 다시 확인하고는 중얼거렸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무슨 일이시지…….”

- 리허설이 일찍 끝났다고 합니다. 일요일이라 그런가 봅니다.

“그럴 거면 애초에 모이질 말던가?”

예상하지 못한 일정 변경이었다.

이전까지 분명 타티아나와 오케스트라의 리허설은 4시간씩 진행되어 왔다. 일요일임을 감안해서 약간 일찍 끝난다 하더라도 최소 2시간은 했어야 할 터.

자하르가 말하는 시간을 들어 보니 타티아나는 리허설이 시작되고 30분도 안 되어서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래서야 오전에 혼자 연습만 하러 홀에 간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다른 오케스트라 인원들의 생각은 차치하고 타티아나 성격에 이렇게 빠르게 리허설을 끝내버릴 리가 없는데. 심지어 이번엔 예술감독이라는 큰 직책까지 맡았지 않았나? 예술감독인 타티아나라면 언제나 최선을 다해 리허설을 진두지휘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끝내곤 호텔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빅토르는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뭔가 이상한데…… 그래서 아가씨는? 일요일인데 어디 나가시지도 않고 그대로 호텔에서 뭘 하고 계시지?”

-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

황당함이 재차 밀려왔다.

그 타티아나가 오후 3시에 호텔에서 자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시간에?”

- 많이 피곤하다고 하시더군요. 간밤에 잘 자지 못했다고.

그 말을 듣고 나니 짚이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타티아나는 어제 해변공원에 다녀온 후로 어딘가 울적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최대한 밝은 모습만 보이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봐 온 빅토르가 그 정도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을 무시하는 건 경호원이 할 일이 아니기에, 빅토르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

이 또한 어리광에 어울려 주는 것이란 걸 알면서도, 이따금 타티아나가 보이는 고집스럽고 처연한 표정을 보면 빅토르는 그 이상 무언가 관여하려 하기가 정말이지 어려웠다.

약간 불안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빅토르는 말했다.

“내가 봐야겠어.”

스스로에게 하는 명령처럼 그렇게 중얼거린 빅토르는 곧장 차를 몰고 가장 빠른 길로 호텔에 도착했다.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며 타티아나가 묵고 있는 방으로 향한다.

“음.”

문 앞에 선 그는 조용히 방 안쪽으로 귀를 기울여보았다.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문을 열고 두 눈으로 보는 것뿐이었다.

유리는 타티아나의 경호원으로서 빅토르에게 여러 임무를 명령했다. 그중엔 유사시에 타티아나의 상태를 직접 판단하고 문제가 없도록 조치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상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단순히 리허설을 망친 타티아나가 상심하여 일찍 잠들어 있는 것이면 좋겠지만, 어제 본 타티아나의 태도가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필요하다면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시끄럽게 할 필요는 없이 그에겐 이미 이 방의 스페어키가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막연한 불안과 긴장. 그리고 걱정 등을 느끼며 빅토르는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눈으로는 타티아나를 찾는다.

다행히 그가 찾는 소녀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혹시나 호흡이 불안정하거나 표정이 불편하진 않은지 살펴보아도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아주 편안하게 자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워 자는 자세마저도 올곧다. 그런 감상이 들 정도로 타티아나는 바로 누운 자세로 이불을 반쯤 덮고는 양손을 포개어 배 부근에 두고 있었다.

차라리 이상한 자세로 이불을 걷어차고 자고 있었다면 빅토르는 웃으면서 이불을 덮어 줄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자는 모습을 보며 빅토르는 입술을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

자야 하니까 잔다.

빅토르는 종종 타티아나에게서 그런 이상한 분위기를 느낄 때가 있었다.

수면욕은 사람의 가장 큰 욕구 중 하나일 텐데, 타티아나에겐 그저 컨디션을 정돈하는 데에 필요한 시간에 불과한 것 같았다.

죽음을 한 번 이겨 내고, 기억을 한 번 잃었다가 되찾으면서 타티아나는 분명 일반적인 사람의 궤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라.

이 간단한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게 평범한 사람일 테고.

하지만 타티아나는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처럼 그것들을 해내려 했다. 그 어느 하나 타산적인 부분이 없는 진심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에겐 더없이 냉정하고 가혹하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그 어느 하나 편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근거와 이유를 두고 당위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그녀의 행동원칙과도 같았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타티아나를 두고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성격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하여 마냥 좋아하기만 할 순 없는 것이니까.

그도 그럴 것이, 가끔 보면 타티아나는 무언가를 초월해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것이 사람으로서의 무언가인지 아니면 또 다른 것인지. 알 순 없었다.

‘……아가씨.’

그러나 빅토르는 타티아나가 가끔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바로 울음을 터뜨릴 것같이 눈가를 찡그리기도 하고, 보여주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리고 어깨를 웅크리기도 한다.

늘 보이는 상냥하고 강인한 모습은 그저 그렇게 스스로를 견지하려는 정신력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확실히 보통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그런 타티아나를 볼 때 빅토르는 이따금 속이 쓰린 기분을 느끼곤 했다.

오늘도 많이 힘들었을 테지.

그녀의 작은 어깨에 올라가 있는 것들은 너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리허설을 일찍 마치고 호텔에서 바로 잠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빅토르는 그녀가 어느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느꼈다.

남들보다 잘 견딘다 해서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타티아나가 너무 힘들진 않기를 바라며 빅토르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가 해결해야 하는 업무 등은 우선 자하르에게 맡기거나 스마트폰으로 해결했다. 지금 타티아나를 옆에서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했기에.

자리를 뜨지 않고 그대로 4시간쯤 흘렀을 때.

미동도 않고 잠들어 있던 타티아나가 눈만 깜빡거리며 떴다.

너무나 조용히 깨어나서 빅토르는 한참 후에야 그녀가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타티아나의 시선엔 의문과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힐난 등이 섞여 있었다. 곧 그녀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너무하지 않나요? 빅토르.”

“예?”

빅토르가 영문을 모르겠단 투로 되묻자 비난조가 조금 더 강해졌다. 타티아나는 늘 조심스럽지만 이럴 땐 꽤 강하게 말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들어오셔도 좋다고 허락한 적 없는데, 어째서 여기 계시나요?”

하지만 빅토르도 배짱 좋고 능청스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시간을 확인하는 척하며 말했다.

“일찍 돌아오셨다기에 걱정이 되어서 그랬습니다.”

“…….”

그 말에 타티아나의 표정이 곧바로 풀려 버렸다.

짐짓 강하게 말하려 하지만 빅토르가 장난으로 여기서 가만히 타티아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하는 수 없이 타티아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안 돼요. 저도 나이가 열여섯이에요. 빅토르도 제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주셔야죠.”

선을 긋는 말이었지만 빅토르는 유쾌함을 느꼈다. 그는 크게 웃으며 사과했다.

“하하, 그렇죠. 맞는 말입니다. 제가 늘 실례를 저지르긴 하지만 이번엔 정말 실수했습니다.”

“……장난치지 마세요. 정말. 입장을 반대로 놓고 빅토르가 주무시는데 제가 보고 있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한 사과였는데도 타티아나는 빅토르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평소 한 행실이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빅토르는 피식 웃으며 그렇다면 그냥 장난으로 이어 가기로 했다.

“전 상관없는데.”

“……정말 각오하세요. 제가 언젠가 유성 사인펜으로 얼굴에 낙서하고 말 테니까.”

“기왕이면 귀엽게 부탁드립니다.”

“전 음악은 클래식을 좋아하지만 그림은 현대미술에 흥미가 조금 있어요.”

할 수만 있다면 정말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 타티아나가 손을 들더니 검지로 허공에 가로세로로 선을 그었다. 대체 뭘 그리려는 건지 모르겠다.

타티아나가 아무리 살금살금 움직이더라도 그의 감각에서 벗어날 순 없으니 몰래 낙서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만약 그녀가 정말 하려 한다면 한 번쯤은 모른 척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가만히 있어도 코앞에서 한참이나 갈등하다가 결국 그냥 돌아서 버릴 타티아나의 모습이 상상되어서, 빅토르는 킥킥 웃어 버리고 말았다.

타티아나는 무언가 불만인 것처럼 빅토르를 째려보았으나 곧 같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

오늘 안 좋은 일을 겪은 게 아닐까 싶었는데, 한숨 자고나니 괜찮아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빅토르는 시간도 적당히 잘 되었다 싶어서 그녀에게 제안했다.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약간요.”

“저녁 식사는 어디에서 하시겠습니까?”

“글쎄요…… 나가서 먹을까요?”

안에서 먹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빅토르는 빠르게 주변의 레스토랑 등을 떠올리다가, 일단 바다 부근은 제외했다. 어제 해변공원에서 바다를 본 타티아나가 조금 우울해져 버렸던 것을 고려한 것이다.

“그럼 오늘은 시내에서…….”

“해변공원 쪽에서 조금 더 나가면 좋은 해산물 레스토랑이 있다고 추천받았어요. 그쪽으로 가 봐요.”

그러나 타티아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먼저 말했다. 빅토르는 그녀가 일부러 해변을 택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괜찮습니까?”

“안 되나요?”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그렇게 결정했다면 빅토르는 반대하지 않는다.

“안 될 것 없죠. 알겠습니다. 가 보죠.”

그가 시원스레 대답하며 일어서자 타티아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시어도어가 추천해 준 레스토랑은 굉장히 훌륭했다.

저녁 바다가 보이는 뷰도 마음에 들었고, 나오는 요리들도 모두 신선하고 맛있었다. 킹크랩과 조개, 새우까지. 양을 많이 먹진 않았지만 빅토르와 함께 골고루 조금씩 맛보면서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차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빅토르가 물었다.

“어제보단 조금 더 잘 보이는군요.”

해변 공원과 야시장을 구경 다녔을 땐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 너무 어둡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적당한 저녁때라서 아직 바다가 잘 보였다.

“예, 멋지네요.”

“기분 좋으신 것 같아서 저도 덩달아 기분 좋군요.”

그는 오늘 은근히 내 기분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자하르가 준 약을 먹고 자다가 일어나자마자 빅토르의 얼굴을 보았을 때 정말 놀랐지만, 입이 무거운 자하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빅토르는 그저 내가 이른 시간부터 자고 있었던 게 흔한 일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도 상당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오늘 리허설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그래서 난 더더욱 명랑하게 굴었다.

“괜찮아요. 사실 안 좋을 일이 어디 있겠어요?”

박 교수님을 보게 된 것 때문에 놀라고 혼란스럽긴 했지만, 잘 계신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많이 여위셨지만…… 다른 제자들이 있으니 괜찮으시리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분이 보실 연주회를 최고의 컨디션에서 최상의 퍼포먼스로 선보이는 것. 오로지 그게 전부였다.

한숨 잔 덕분일까,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된 기분이다.

“내일은 잘 해야겠어요.”

“잘 해내실 겁니다.”

“고마워요.”

가볍게 웃으며 답하자 빅토르도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찻잔을 기울이며 한동안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내 전화였다.

이 번호로 연락을 할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빅토르가 손가락을 뻗으며 물었다.

“아가씨 전화로군요. 친구분입니까?”

“……예.”

난 화면에 떠오른 번호와 이름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거기엔 임세연이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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