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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62화 (762/1,277)

##  762화

옆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에르네스트는 다리를 쭉 폈다.

“이거 봐 봐, 타티아나. 진짜 귀엽지?”

“와, 정말이에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은 낚싯대를 지지대에 걸쳐 놓고는 스마트폰으로 무언가 함께 보면서 놀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도 저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더 멀리 자리를 피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에르네스트는 이미 그녀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지금 이 정도의 거리감과 관계성으로 괜찮은 걸까.

당연히 이런 상황을 처음 마주하는 에르네스트로선 이게 옳은지 틀린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할 수도 없다.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조차 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혼자서 생각하고 판단하여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

화창한 가을날 느긋하게 낚시를 하고 있고, 아나스타샤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활기차게 떠드는 그녀가 이따금 피로한 표정을 보일 때마다 한겨울 빙판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언제 빙판이 깨져서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을지 모른다.

타티아나가 옆에 있으면 아나스타샤는 괜찮아 보인다. 이틀 전 놀이터에서 이야기했던 것이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그녀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분명 괜찮을 거라고 확신할 순 없다는 걸, 에르네스트는 이제 알고 있었다.

‘생각이 짧았어.’

저번에 나누었던 이야기는 제대로 된 그의 항변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 에르네스트가 휴식을 제안하자 따른 것도 한 번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뻣뻣한 태도의 일환에 가까웠다.

오해는 이만 풀자고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정말 오해인가?

아나스타샤가 정확하게 본 것 아닌가?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은 여전히 에르네스트의 머릿속에 가시처럼 깊게 박혀 있었다.

이해하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여자애라는 이유로 경쟁상대로조차 봐주지 않는다는 말. 심지어 아나스타샤는 그가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다고까지 했다.

에르네스트는 세상 누가 널 우습게 볼 수 있겠느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선 은연중에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아나스타샤를, 그리고 세상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어려운 일들은 분명 있을 테지만 방법을 잘 강구한다면 그 어떤 관계도 망가지지 않고 가지고 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에겐 분명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때문에 독단적으로 계획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오만함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건 단지 쉬워 보이기 때문이잖아?

빈틈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온 그 지적은 에르네스트의 견고한 자신감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만하고 생각도 짧은 멍청이였다. 에르네스트는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고는 우울해졌다.

‘이야기를 하긴 해야 해.’

에르네스트는 오만한 멍청이더라도 뻔뻔한 무능력자까지 되고 싶진 않았다.

2년 전 타티아나에게 호되게 당했을 때도 그랬다. 그는 세상을 너무 쉽게 여기고 까불었다가 하루 만에 모든 걸 잃고 교내에서도 한동안 평판이 엉망으로 떨어졌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대해 억울함을 느끼거나 화를 내지 않고 다시 올바른 방향을 찾아 나설 줄 알았다.

타티아나도 그가 그렇게 노력해 준 것을 높게 샀기 때문에 아직까지 옆에 있어 주고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무례한 방식으로 아나스타샤를 화나게 한 것에 대해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냥 넘어가는 건 최악의 방법이었다. 잘못을 했다면 수습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주말을 그냥 넘기지 않고 모두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리로 만들었다.

지금까진 약간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 같지만, 여전히 아나스타샤에게서 느껴지는 냉담함이 있다.

일단은 시간을 좀 보내고, 타티아나가 없는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른다. 조금 더 유리하게, 영리하게 빠져나갈 방법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지 피하면 안 된다는 생각만으로 에르네스트는 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

은은한 파문이 이는 수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긴 상념에 빠져 있던 에르네스트는 찌가 움직이는 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낚싯대를 움켜쥐었다.

줄을 타고 느껴지는 생명력. 에르네스트는 봐주지 않고 그대로 힘을 주어 잡아당겼고, 처음으로 물고기를 한 마리 낚을 수 있었다.

“와, 잡으신 건가요?”

“제일 큰 것 같은데?”

놀고 있던 두 사람도 에르네스트가 무언가 채 올리자 다가와선 함께 구경했다. 그녀들의 말대로 꽤 길이가 있었다.

“그래도 한 마리 잡았네.”

“아나스타샤만 못 낚으신 건가요?”

“이제 곧 잡을 거야!”

아나스타샤는 질 수 없다는 듯 다시 낚싯대를 확인하며 이건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리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낚아 올린 물고기를 내려다보았다.

타티아나가 거의 낚싯줄을 던지자마자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는 약간 조바심을 내며 무언가 하려고 했을 땐 전혀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몇 분간 그냥 두고 침착하게 기다리자 이렇게 물고기가 잡혀 올라왔다.

아나스타샤에게도 그냥 낚싯대를 가만 두고 기다리라고 하려던 에르네스트는 이제 와서 무슨 조언인가 싶어 입을 다물었다.

“바늘을 빼야 해요.”

“응.”

타티아나는 옆에 쪼그려 앉아선 신기하다는 듯 물고기를 구경하더니 무언가 도와줄 것이 없는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운동신경이 별로 좋지 않은 그녀는 액티비티 활동 등을 즐길 때 주로 도움을 받는 쪽이었다. 때문에 이렇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되니 뭐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에르네스트는 솔직히 아직도 미끌미끌한 산 생물을 만지는 게 별로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생선 요리도 잘 하는 편이니 물고기의 입에서 바늘을 빼는 것 정도는 쉽게 할 터다.

그래도 그는 고개를 젓고는 직접 물고기를 잡았다. 그녀가 원하는 걸 하게 해 주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건 직접 하고 싶었다.

미끌거리는 물고기를 쥐고, 긴 플라이어로 바늘을 잡고 뽑아냈다. 이중으로 된 바늘은 잘 빠지지 않아서 꽤 힘이 필요했다.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던 타티아나가 말했다.

“잘 하시네요?”

“이것도 잘 하는 게 있고 못 하는 게 있어……?”

“전 얼마나 애먹었는데요.”

그리고 보니 아까 물고기를 잡고도 아나스타샤랑 둘이 앉아서 뭔가 하는 것 같았는데, 사진을 찍고 노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바늘을 뽑느라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럴 줄 알았으면 도와줄 걸 그랬나 싶었는데, 타티아나가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먼저 말했다.

“이렇게 다 같이 낚시도 하고, 즐겁네요. 그렇죠? 에르네스트.”

물고기를 사이에 두고 앉은 채로 에르네스트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약간 어색해하는 미소로 그를 마주했다.

아나스타샤가 낚싯대에 신경을 쏟는 사이 무슨 생각으로 단둘이 말을 걸어온 것인지 알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이런 건 처음이어서.”

“후후, 주말에 놀러 가자고 제안해 주셔서 감사해요.”

“여기 오자고 한 건 아나스타샤인데.”

“처음 제안은 에르네스트가 해 주셨잖아요?”

타티아나는 정확한 기억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간 별말은 않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기만 했지만, 살짝 불안증이 있는 타티아나가 어떤 기분으로 보고 있었을지 생각하면 미안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신뢰에 찬 눈으로 에르네스트를 보며 말했다.

“만약 두 분 안 좋으신 일이 있었더라도…… 풀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 에르네스트가 그럴 생각이셨다고 믿어요.”

중간에 끼어들어선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지켜보고만 있지만,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알아.”

“고마워요.”

지금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 에르네스트 쪽이었는데도, 타티아나는 가볍게 그런 말을 남기곤 무릎을 폈다.

그러고는 다시 아나스타샤의 옆으로 가선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녀에게 장난을 쳤다.

“…….”

에르네스트는 한동안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다시 물고기를 물에 놓아주었다.

아직 시간은 있다. 연주회 전까지 이야기를 할 기회 정도는 분명 있겠지.

에르네스트는 다시 천천히 생각을 골라 가다듬으면서 다시 낚싯바늘을 잡았다. 그리고 다음 낚시를 위해 미끼를 끼우려던 때였다.

“아.”

잠깐 딴생각을 한 탓인지, 아니면 미끼가 너무 미끄러운 탓인지. 바늘이 검지를 찔렀다. 에르네스트는 따끔한 감각에 놀라 손을 떼면서도 순간적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피가 나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단지 혹시라도 타티아나가 알았을지,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다치는 것에 대해 굉장한 불안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평소 티를 안 내려고 하지만 이따금 공황 비슷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에르네스트는 절대로 그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피가 뚝뚝 흘렀다.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쓰며 물통을 가지고 와선 손을 씻어냈다. 그래도 금방 다시 피가 흐른다.

피가 멎으려면 잠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너무 오래 가만히 있으면 타티아나가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일단 땅에 놓인 낚싯대를 다시 세팅해서 던져 넣어야겠다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미끼통 쪽으로 손을 뻗었다. 검지만 쓰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아나스타샤가 그 앞에 섰다.

“에르네스트.”

“어.”

태연하게 대답해 보았지만 그녀는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다 들켰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저쪽으로 가.”

“…….”

아나스타샤는 길게 말하지 않았고, 에르네스트는 그녀와 함께 의자로 돌아왔다.

타티아나는 자신과 아나스타샤의 낚싯대를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아나스타샤가 낮고 빠르게 물었다.

“깊게 찔렸니?”

“아니, 괜찮아.”

“보여 줘.”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이러는 게 굉장히 어색했지만 왼손을 내밀었다. 그저 바늘에 찔려서 피가 좀 나고 있는 정도였다. 이 정도로 호들갑을 떨면 채혈을 하거나 주사도 못 맞는다.

별일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아나스타샤도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녀는 다른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낚싯바늘은 깊게 찔리면 빠지지 않는다고 들었어.”

“맞아. 아까 빼 보니까 잘 안 되더라고.”

“쿡 찌르고 만 것 같긴 한데…… 아무튼 낚싯대 이리 줘.”

두 사람이 느끼기엔 별것 아닌 일이지만 타티아나는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아나스타샤는 낚싯대를 잡더니 휙 휘둘러선 빈 바늘과 찌를 물속에 던졌다.

“미끼 안 끼웠는데?”

“무슨 상관이야. 일단 물에 던져 놓고……. 치료 제대로 받아. 아까 그 샵에 가면 비상의약품 정도는 있을 거야.”

지금 미끼를 다시 끼우고 할 시간도 없으니 일단 빈 낚싯대라도 다시 세팅한 척하고는 얼른 치료받고 오라는 뜻이었다. 자리를 뜰 생각까진 없었던 에르네스트가 손가락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그냥 괜찮은…….”

“내가 지금 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니?”

“…….”

“아니면 관심받고 싶어?”

그 말은 에르네스트를 강하게 자극했다.

아나스타샤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정말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

단지 타티아나가 이 좋은 시간을 보내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리 처신하는 것뿐.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협조해야만 했다.

그래도 관심받고 싶냐니,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딱딱한 어투로 대꾸했다.

“아니야.”

“미안해. 그…… 어쨌든. 음료수 사러 간다고 하고 갔다 오면 되잖아.”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스타샤가 옆을 향해 크게 말했다.

“타티아나! 음료수 마시고 싶은 것 있니? 에르네스트가 사다 준대!”

“전 오렌지주스요!”

살갑게 목소리를 주고받은 아나스타샤는 다시 낮게 말했다.

“치료받고 와.”

“…….”

아나스타샤는 무신경하게 보내 버리려는 것이 아닌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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