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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63화 (763/1,277)

##  763화

우리는 본래 계획대로 저녁 전에 돌아가기로 했다.

지루해져서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 저녁 늦게까지 놀다가 하룻밤 자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잠시 바람을 쐬고 기분 전환을 하자는 목적에서 충동적으로 더 나아가면 주말을 통째로 쉬는 데에 보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쉬는 것도 중요하지만, 친구들과 같이 있으면 노는 데에도 체력이 들어간다.

일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라면 주말 내내 진탕 놀고 월요일에 학교에 가도 상관없다 생각하겠지만, 우리같이 몸을 사용하는 연주자들은 주말간 컨디션 관리에 실패하면 월요일까지 그 여파가 이어지고, 점점 커져 일주일을 통째로 망치는 것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은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고, 내일은 다시 신체 컨디션을 가다듬으며 한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편이 좋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프로정신이 강한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도 오늘 즐거웠지?”

“예.”

컨트리클럽 안의 시설들을 전부 이용해 보진 못했지만, 친구들과 함께 나눈 시간이 너무나 좋아서 아쉬움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차 트렁크엔 오늘의 수확물도 실려 있었다. 지금도 잘 있으려나? 난 뒤편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이 많았지만…… 전 낚시가 기억에 남네요. 물고기도 가져갈 수 있었고요.”

“그쪽에서 이해해 줘서 다행이야.”

원래는 낚시터에서 잡은 물고기는 클럽 내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한 마리만 가지고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 끝에 우리는 예외를 허락받았다.

그렇게 허락을 받은 건 아나스타샤였지만, 정작 그녀는 물고기를 가지고 갈 생각이 없었다. 덕분에 그 예외는 나에게만 좋은 일이 되었다. 난 직접 요리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집안사람들에게 물고기를 보여 주면 얼마나 놀랄까, 어떤 요리를 하면 좋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그 기분이 표정으로 얼마나 드러났는지, 날 물끄러미 보던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그렇게 좋니?”

“예, 제가 물고기를 잡아 갈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자신감이 붙네요.”

“이젠 낚싯줄 매는 법도 알겠어?”

“그건…… 앞으로 공부하려고 해요.”

“아하핫, 뭘 그런 걸 공부까지 하니?”

매듭법은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다. 나중에도 혹시 낚시를 가게 될 수 있으니 연습해 두려 했는데, 아나스타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연습 같은 것 안 해도 잘 하셔서 부럽네요. 내가 불만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단지 오늘 했던 것처럼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은 듯 보였다. 낚싯대를 세팅하는 건 그녀가 하고, 난 미끼를 바늘에 끼워 주는 것으로 우리 역할 분담은 거의 완벽했다.

생각해 보니 반대로 아나스타샤가 혼자서 미끼를 끼울 수 있게 되면 조금 섭섭해질 것 같았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나 간사하다.

난 그녀의 생각을 알겠다는 뜻으로 마주 웃고는 그녀 옆의 에르네스트에게도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떠셨나요?”

말이 별로 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던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좋았어. 간만에 느긋하게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에요.”

역시 노는 것도 체력이 필요한 탓인지 그는 약간 피곤해 보였다. 좌석의 안마 기능을 사용해도 좋다고 말해 주었지만, 그는 괜찮다며 극구 사양했다.

모스크바 시내를 달린 차량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에르네스트의 집 앞에 도착했다.

“먼저 가 볼게. 두 사람 다 조심히 들어가.”

그는 차에서 내리며 그렇게 인사했다. 딱히 가지고 온 짐이 없어서 가지고 갈 짐도 없었다. 무언가 들려 주고 싶었지만 딱히 그럴 것도 없어 아쉬웠다.

아나스타샤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좋은 밤 되세요.”

우리가 인사하자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웃었다.

“다음 주에 보자.”

그 짤막한 인사는 꽤 기분 좋게 들려왔다. 오늘 우리가 공유할 시간이 이제 끝났다는 사실에 우울해할 것 없이, 이어질 다음 시간 역시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믿을 수 있는 약속이었다.

에르네스트를 보내고, 아나스타샤와 둘이 남았다.

“…….”

스쳐 지나가는 야경을 바라보며 우린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의 아파트가 있는 프리스넨스키는 그리 멀지 않았다.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해도 길게 할 만한 시간이 부족했다.

잠시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 사이, 아나스타샤가 말을 걸어왔다.

“타티아나.”

“예.”

야경에서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가로등 불빛보다 더 또렷한 아나스타샤의 눈빛이 이쪽으로 향해 있었다. 다만 그 빛은 살짝 고개를 숙여 내 어깨 부근을 비췄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나 사실 말야, 오늘 올지 말지 고민했었어.”

“……예?”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되물었다.

“아나스타샤가 예약하셨잖아요?”

“그건 고민한 후에 결정한 거고. 그 전에. 에르네스트가 먼저 말했었잖아.”

“아.”

난 그제야 이야기를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네스트의 제안을 아나스타샤는 흔쾌히 바로 받아 주도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살짝 날카로워져 있는데다가 연습이 흡족하지 않자 주말간 혼자 있겠다고 했었다.

그 결정을 뒤집는 데엔 고민이 필요했으리라.

“그냥 혼자 쉴까 했거든. 그런데 이렇게 나와 보니까…… 조금 나은 것 같긴 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든다.

고민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다른 감정들이 섞이며 조금 희석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

원래대로라면 한 모금만 마셔도 견딜 수 없었을 감정을 이제는 마실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걸 그리 내켜 하지 않는다는 건 느껴졌다.

섣부르게 끼어들지 않겠다고 정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이라면 한 번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아나스타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별로.”

“이야기해 주시면 들어 줄게요.”

조금은 진지하게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더니 그녀는 무언가 충동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내가 그 부분을 자극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잠시 후, 아나스타샤는 무언가 스스로 깨달았는지 바람이 새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나도 남 말할 게 아니네. 네 관심이나 끌려고 약한 소리나 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자조하는 목소리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누구나 약한 소리는 할 수 있다. 혼자 견뎌 내야 하는 시간이 너무 고되고 길게 느껴질 때, 가끔은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일부나마 알아주었으면 하는 건 자연스러운 마음일 테니까.

그건 나 역시 자주 느끼는 충동이었다. 물론 그 자체로 걱정을 끼치는 것이기에 늘 안 그러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오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건 저렇게까지 심하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난 혹여나 그녀가 자조를 이어 나갈까 봐 급히 말을 꺼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생각 마세요.”

“미안, 미안. 그냥 말 안 할게.”

“아나스타샤…….”

무슨 말을 하든 그 자체가 계속 약한 소리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나스타샤는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야기를 강요할 수 있을까. 지금 살짝 자신의 힘듦을 드러내려는 것만으로도 자존심 상해하며 내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투로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그녀인데.

내가 자극해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건 그녀를 무시하고 짓밟는 행위였다. 난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정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내가 바로 그렇게 느꼈을 테니까.

난 반대로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했었는지 떠올렸다.

그녀는 내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마다 흥미본위로 내게서 말을 이끌어 내려고 하지 않고, 곁에 있어 주거나 다른 곳으로 신경을 쓸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역시 비슷할 테지.

“오늘 놀러 오지 않으실래요?”

“오늘? 지금?”

“예.”

“나 오늘은 집에 들어간다고 해 놨는데.”

“다시 전화 드리세요. 제가 오늘 잡은 물고기 있잖아요? 요리 해 드릴게요.”

하루만 더 데리고 있자.

어떠한 직접적인 도움이나 조언을 내어 줄 순 없을지 몰라도, 오늘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조금 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괜찮지 않냐는 뜻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거절하지 않을 거란 확신도 어느 정도 있었다. 주말에 놀러 오는 일은 예전에도 자주 있었으니까.

그러나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냥 보냈으면서, 나만 특별대우네?”

그 말에서 벌써 거절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분명히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다. 난 그게 작은 갈등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특별대우 하면 안 되나요?”

“아하하, 그거 듣기엔 좋다.”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어 보였다.

난 힘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지 말라는 듯 아나스타샤는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그냥 갈게. 피곤하잖아? 쉴 시간도 있어야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강요하거나 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우리가 오늘 한나절만 놀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정한 건 컨디션 관리를 위한 목적이기도 했으니까.

지금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내 멋대로 케어하려는 건 반대로 그녀의 컨디션 관리 계획을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잠깐 동안 이야기가 오갔을 뿐인데 몇 번의 신호를 거친 차량은 벌써 아파트 앞에 도달해 있었다. 차가 멈추자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내릴게요. 고마워요, 빅토르, 소로킨.”

“별말씀을. 안녕히 가십시오.”

두 사람이 뒤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였고, 아나스타샤는 훌쩍 내렸다. 그녀 역시 손에 든 건 작은 가방 하나뿐이었다.

내가 올려다보자 그녀는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손짓하며 말했다.

“가서 사진 보내 줄게. 타티아나. 오늘 잘 논 만큼 내일 푹 쉬고. 월요일에 봐.”

“안녕히 가세요.”

“안녕.”

조용히 문이 닫히고, 아나스타샤는 아파트 입구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차가 앞으로 다시 미끄러지듯 출발하자 그 모습은 점점 멀어지다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

일요일은 일어나자마자 전신에 살짝 근육통이 있었다.

골프채를 조금 휘두르고 낚싯대를 당긴 것이 꽤나 운동이 된 듯했다. 격하게 달린 것도 아니고 제자리에서 하는 야외활동이었을 뿐인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난 간만에 생긴 근육통을 스트레칭으로 다스리며 곧장 연습실로 향했다. 전체적인 신체적 밸런스를 다시 피아노에 최적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연습곡부터 시작하여 손바닥을 크게 펼쳐 건반을 연타하기도 하고 작게 웅크려 짚어 나간다.

골고루 손을 풀어 준 다음엔 바흐와 모차르트로 박자감각과 균형감각을 되찾는다.

몇 년 동안 이러한 재활을 꾸준히 해 온 나는 이제 자연스럽게 어떤 곡을 연주해야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재정립시키는 데에 유효한지 거의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곡을 찾거나 할 것도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손을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몸을 푼 뒤엔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미하일 선생님이 내어 준 과제곡과 헝가리 광시곡 2번,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이 해야 하는 협주곡이 바로 주된 곡들이었다.

어느 한쪽에 집중력이 매몰되지 않도록 시간을 나누어 곡들을 연습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 한 무대에 여러 곡을 올려야 하는 일도 잦은 내게 이러한 훈련은 그리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늘 하던 일을 하던 대로 할 뿐이다.

단지 나 혼자 연주하는 곡이 아니라 같이 연주해야 할 곡 같은 경우엔 연습에도 한계가 있었다.

부족한 빈공간은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연주를 이어 나갔다.

오늘 하루 동안만 상상과 함께 연습을 하고 나면, 내일은 분명 현실의 더 훌륭한 음악이 내 곁에 있으리라 생각하니 절로 손끝에 더더욱 집중하게 된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도 분명 지금 이 시간 피아노 앞에 있겠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리 믿을 수 있는 신뢰가 우리 사이엔 존재하고 있었다.

일요일 하루는 그렇게 꼬박 컨디션 관리와 피아노 연습으로 보냈다.

그리고 월요일.

오전엔 아무 일 없이 수업을 마치고 오후 연습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난 언제나처럼 먼저 일정이 없는 에르네스트와 듀엣 연습을 하려고 그를 부르려 했다.

“에르네스트, 오늘은 내 파트 좀 봐 줄래?”

그런데 그보다 먼저 아나스타샤가 그를 불러냈다.

저번 주에 약간 다투었던 건 이제 다 풀게 된 걸까?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는데 어제 괜찮은 연주를 해낸 걸까.

정말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에르네스트의 오후 시간을 독점하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지만, 난 두 사람과 함께 연습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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