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9화
회의를 마치고 슬슬 어수선해지는 분위기에서 잠깐 알렉산드라와 이야기하는 사이 두 사람이 없어졌길래 어디 갔나 싶었는데, 연습실 문을 열자 바로 앞 복도 창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진 모르겠지만 날 보자마자 아나스타샤는 숨이 넘어가라 웃으며 좋아했고,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상반된 두 사람의 반응에 난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예요?
“콘서트 디렉터와 이야기는?”
“아, 끝났어요.”
그런데 내가 무어라 다시 묻기 전에 아나스타샤가 먼저 내 옆을 지나쳐 들어가며 물었다. 뭔진 몰라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난 그녀를 따라 들어가선 자연스레 회의용 테이블 앞에 다시 앉았다.
알렉산드라와 나누었던 이야기엔 그녀도 알아야 할 부분이 있었다. 준비를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다름 아니라 저희 드레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혹시 생각하시는…… 아나스타샤?”
“응?”
“얼굴이 왜 그래요?”
의상 이야기를 하면서 아나스타샤의 얼굴을 보던 난 깜짝 놀랐다. 그녀의 이마가 빨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얼굴 이야기를 꺼내자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라며 뒤로 움찔했다.
“왜 그래?”
“그게…….”
보기에만 빨갛게 된 게 아니라 부은 것 같은데……?
이마가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는지, 걱정이 된 난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만져 보려 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내 손을 슬며시 피하면서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만져 보는 건 싫은가 보다.
난 대신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이마요.”
“이마?”
“예. 빨갛게…… 어디 부딪히셨나요?”
그런데 무슨 오해가 중간에 있었는지, 아나스타샤는 그제야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다는 듯 깨달은 표정을 짓다가 난데없이 인상을 썼다.
그녀는 급하게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들고는 얼굴을 비춰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갈수록 살벌해졌다.
“아…… 진짜.”
음울하게 중얼거리던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에르네스트에게 그대로 꽂혔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노려보는 시선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는지 뭔가 딴청을 부리려다 말고 결국 짧게 사과했다.
“미안.”
“미안하면 다니? 어떻게 할 거야 이거?”
문제를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지 옆쪽으론 잘 안 들리게 목소리를 조절했지만 그 속에 담긴 짜증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화난 만큼 난 당황스러웠다.
이마가 저렇게 된 책임을 완전히 에르네스트에게 돌리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일단 화가 난 아나스타샤를 달래면서 물어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에르네스트가 그랬어요?”
“응, 타티아나. 쟤가 때렸어.”
“예!?”
믿을 수가 없어서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는 이미 자수한 상태나 다름없었다.
난 다시 아나스타샤의 이마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자꾸 감추려고 했지만 상황이 어떤지 봐야만 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진짜 뭘 어떻게 한 건지, 새빨갛게 된데다가 부어 있었다. 괜히 만지면 더 아플까 봐 어떻게 하지도 못하겠다.
범인 취조에 들어갈 차례였다. 이마 한가운데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런데 내가 바라보자 뭐라 묻지도 않았는데 에르네스트는 알아서 범행 장면을 재현하며 시인했다.
그는 손가락을 모으더니 탁 튕기며 말했다.
“이거 했어.”
중지로 이마를 때린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대체 얼마나 세게 했길래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예상컨대 두 사람이 무언가 내기를 하고, 에르네스트가 이겨서 이행한 것 같은데…… 평소 내기란 내기는 아나스타샤가 모두 이겨 와서, 간만에 잡은 기회를 마음껏 누릴 만도 했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 심했다.
“내기를 하셨다고 해도 이렇게 세게 하시면 안 되잖아요.”
“그게, 내기는 아니고…….”
“아니었다고요?”
어이가 없어진 내가 쏘아붙이자 에르네스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난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다.
아무리 장난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부을 정도로 세게 이마를 때려도 되는 건가? 그리고 이렇게 세게 때린 손가락은 멀쩡한 건가?
뭔가 중재를 하긴 해야겠는데, 양방향에서 걱정이 되니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사이 아나스타샤가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나 복수해도 되는 거지?”
“복수요? 음…….”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되갚아 주는 건 점점 장난이 심해질 뿐이므로 적당히 끊자고 하고 내가 달래 주었을 텐데, 이번엔 말리기도 힘들었다.
저 이마를 보면 그만하자는 말이 나올 수가 없었다.
“이건 어쩔 수 없네요.”
“허락한 거다?”
“잠시, 잠시만요…….”
아나스타샤는 마치 진짜로 뭐든 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은 사람처럼 갑자기 가방을 더 뒤적이기 시작했다.
뭔가 무기라도 찾는 모습이라서 난 다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못하고 부추기지도 못하는 상태로 난 쩔쩔매며 그녀가 조금 차분해지도록 붙잡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내가 말려 주는 사이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난 눈빛으로 빨리 더 사과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진짜 미안. 약 사다 줄게.”
“나 이따 리허설 가야 하는데 약 바르고 반창고라도 붙일까? 사람들 다 알게?”
약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제 회의를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나나 에르네스트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콰르텟 멤버들과 함께 이어 리허설을 해야 했다.
난 당혹스러워하는 에르네스트에게 지갑째 건네주며 말했다.
“약과 함께 아나스타샤가 쓸 만한 모자라도 하나 사 와 주세요. 넉넉한 사이즈로요.”
“모자?”
“빨리.”
혹시라도 딱 맞는 사이즈로 샀다가 부어오른 곳이 더 아파질까 싶어서 난 에르네스트에게 그렇게 주문했다.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정신이 좀 없는지 살짝 늦게 내 말을 이해하고는 재빠르게 연습실 밖으로 나갔다.
일단 눈앞에서 에르네스트가 사라지자 아나스타샤는 순식간에 진정했다. 난 아나스타샤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나스타샤…… 괜찮나요?”
“응.”
의외로 순순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진 단순히 화를 내야 하기에 화를 냈던 것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여전히 이마가 신경 쓰이는지 조금이라도 가리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별문제 없이 물병을 기울였다.
일단 에르네스트를 강제로 보내 놓긴 했지만, 뭔가 표적을 잃어버린 것처럼 조용해진 아나스타샤를 보니 조금 속상했다. 난 뾰로통하게 투덜거렸다.
“저 에르네스트에게 실망했어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너무해요.”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정말 예상 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아니야, 이건 그 애가 잘한 거니까.”
“……예?”
그렇게 화를 냈으면서요?
하지만 다시 봐도 그녀는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 앞에서라면 죽어도 말 안 하겠지만 내 앞이니까 하는 진심 어린 말.
난 앞뒤 정황을 묻기보단 그녀의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는 밝게 웃더니 내게 해도 될 이야기만 해 주었다.
“내가 먼저 에르네스트를 바보 취급 했거든. 아, 사실은 그것도 그 애가 먼저이긴 했지만.”
여전히 모를 일들투성이긴 하다. 이것도 저번 주에 있었던 두 사람의 다툼과 관련된 건가?
하지만 그때 분명 잘 풀었고 오늘도 사실 아나스타샤가 이마를 맞고 분위기도 험악하게 조성했지만, 심각함의 정도가 달래지도 못할 정도로 느껴지진 않았다.
서로의 이해가 잘 어우러지는 장난이 오간 느낌. 지금 아나스타샤의 평온한 얼굴만 보더라도 그랬다.
그래도 이마를 보니 속상한데.
“아무튼 실망하고 할 것도 없어. 그냥 평소랑 다를 것 없는 거니까.”
“…….”
한마디 더 할까 싶었지만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에르네스트를 변호하면서 이 건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까지 한다면 정말 내가 중재할 필요는 없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몸을 가까이 해 오며 물었다.
“그나저나, 내 모자는 왜 네가 사 주는 거야?”
“?”
“네 지갑을 줬잖아.”
혹시라도 그냥 내보냈다가 지갑이 없는 상황이면 큰일 나니까 급한 대로 내 걸 쥐여 줬을 뿐이다.
나도 그 와중에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게, 급하다 보니.”
“그 애도 웃겨. 그걸 그냥 받아 가더라?”
“에르네스트도 경황이 없었겠죠.”
“뭘 또 경황이 없니? 내가 뭘 했다구.”
복수하겠다면서 가방을 뒤적이지 않았나요?
지금 보니 반쯤은 장난이었겠지만 당시 분위기는 무서웠다.
똑같은 수준으로 때려 주겠다며 뭔가 딱딱한 거라도 꺼낼까 봐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말렸는데.
그래도 조금 수습 아닌 수습이 된 것 같아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자 아나스타샤는 미안한 이야기는 이쯤 하자는 듯 발랄하게 말했다.
“오늘은 리허설 하고…… 아, 맞아. 타티아나. 이번 주에 우리 집 올래?”
“주말에요?”
“응. 곡 받은 거 같이 연구도 하고 그러자.”
이전에도 몇 번 놀러 간 적이 있긴 했지만 이번엔 놀러 오란 것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허공 어딘가를 가리켰다. 난 그것이 먼 프랑스로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오늘 다시 한번 검증받았잖아? 연주자인 우리가 실수하면 곡 탓도 못 할 테니까. 그치?”
에르네스트가 요번에 작곡한 곡으로 받은 평가는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난 그전에 미리 곡을 연주해 보면서 그가 작곡에 진심으로 임한 지 1년도 안 된 사이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는지 깨닫고 있었지만, 이번에 파리 음악원 입학을 제안받은 건 정말 피부에 와닿을 정도로 굉장한 일이었다.
만약 초연을 실패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연주자 쪽으로도 많이 기울 것이다. 난 그 점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아나스타샤 역시 상당한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작곡가인 에르네스트와 함께 한다면 연구가 조금 더 편할 수 있겠지만, 연주자끼리 의견 교류를 하고 연구하는 부분도 분명히 필요한 시간이었다.
난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럴까요? 잔뜩 연구해서 에르네스트를 놀라게 해 줄까요?”
“응.”
“알겠어요. 음…… 그런데 주말에 가면 부모님들이 신경 쓰이지 않으실까요?”
“괜찮아. 우리 부모님은 네가 오면 되게 안심하시니까.”
“?”
내가 그녀의 집에서 모범생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 정도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나스타샤는 요즘 성적을 열심히 올려놔도 그게 다 그녀가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타티아나와 같이 다니는 덕분 아니냐고 하신다면서 억울해했다. 그건 정말 너무했다.
공동 연습뿐만이 아니라 사소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꼭 아나스타샤의 집에 방문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렇게 나와 그녀가 서로의 집에 갔을 때 있었던 일 등을 이야기하면서 잠깐 시간을 보내는 사이, 나갔던 에르네스트가 돌아왔다.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였다.
가까이 다가오니 살짝 숨이 찬 게 느껴진다. 정말 뛰어갔다 온 모습이었다.
그래도 잘못한 걸 수습하겠다고 뛴 걸 보니 약간 기특하기도 하다.
그는 오자마자 내게 지갑을 돌려주었다.
“나도 모르게 가져가긴 했는데 네 카드는 안 썼어.”
역시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주는 대로 그냥 가져갔었나 보다. 난 웃으며 말했다.
“써도 괜찮았는데요.”
“농담 마.”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모자와 연고를 아나스타샤에게 건네주었다. 상처가 나진 않았기에 멍과 붓기에 잘 듣는 연고인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연고는 고맙다고 하면서도 모자에 대해선 아주 박한 반응을 보였다.
“으, 디자인 진짜.”
“……그렇다고 앉아서 네가 뭘 좋아할지 고르고 있을 순 없잖아.”
에르네스트가 사 온 건 까만 볼캡이었다. 디자인에 민감한 아나스타샤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왜 모자를 사 와야 하는진 제대로 이해하고 사 온 것이었다.
챙이 없는 베레모 같은 걸 사 왔다간 아마 아나스타샤에게 족히 30분은 놀림 당했을 테니까.
진짜 이걸 써야 하나 고민하던 아나스타샤는 결국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곤 교복 재킷을 벗고는 모자를 푹 눌러 썼다. 그러고는 각도를 살짝 비튼다.
사실 뭘 입어도 태가 나는 그녀는 이렇게 모자만 하나 써도 멋졌다.
모자챙 아래로는 날카로운 눈매만 보였다. 그녀는 슬쩍 날 올려다보았다. 난 환하게 웃으며 말해 주었다.
“잘 어울리셔요. 정말로요.”
“그래?”
살짝 불만이 있던 아나스타샤는 내 칭찬을 듣고 나서야 밝게 미소를 지었다.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간신히 한숨을 내쉬는 것이 들렸다.
***
날짜가 흘러 주말이 되었다.
난 약속한 대로 아나스타샤의 집으로 찾아갔다.
정문을 통과하는 것도, 펜트하우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타는 것도 이젠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현관 앞에 서서 벨을 누르자 몇 초도 안 되어 아나스타샤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일찍 왔네? 타티아나!”
“실례할게요.”
“응, 어서 들어와.”
편안한 차림으로 날 맞이한 아나스타샤가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녀도 퀸텟 연습을 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얼마나 머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혹시나 싶어 난 하루 자고 갈 짐을 다 싸 왔다.
그녀의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로 향했다. 그러자 반가운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뭐야,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일리야.”
“이런 젠장. 왜 말 안 했어! 아나스타샤!”
주말 오전을 편하게 있던 일리야가 허겁지겁 일어나더니 동생을 타박했다. 아나스타샤는 태평하게 말했다.
“우리끼리 놀 테니 나가 있으라고 해도 도무지 말을 안 들으니까, 그냥 말할 필요를 못 느껴서.”
“아, 진짜 말을 말자.”
황당하다는 듯 말하던 일리야는 급히 거실을 빠져나갔다. 난 사실 별 감흥이 없었는데 실례라고 생각하는지 씻고 오려는 것 같다.
그런데 막 나가려던 일리야는 문득 뒤돌아보더니 내게 말했다. 인사를 안 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잘 왔어. 편히 놀다가 가.”
“예, 실례할게요.”
그러면서 일리야는 아나스타샤에겐 두고 보자는 듯 눈을 부라렸지만 지금 무방비인 건 그쪽이었다.
난 본의 아니게 그를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졌다.
그냥 그 정도 감상으로 나중에 어떻게 편하게 말을 걸어 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괜찮니? 혹시 많이 신경 쓰이는 건 아니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하하, 넌 문신을 보고도 그랬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같이 점심이나 만들어 먹자며 날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