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0화
아나스타샤가 냉장고를 보여 주었고, 난 그 안에서 재료들을 몇 개 추려내어 요리들을 구상했다.
드미트리로부터 받은 수련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요리를 해내는 방법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재료들에 부여된 맛과 향신료 등을 결합하는 건 즉흥 음악과 비슷했다.
물론 조리 방법에 따라서도 천차만별로 달라지니 보다 숙달될 필요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조건만 갖춰져 있다면 하지 못할 것이 없기도 했다.
“이 도마를 씻어 주시겠어요?”
“응.”
세상 못하는 것이 없지만 요리에 대해 흥미가 별로 없는 아나스타샤는 내가 지시하는 대로 보조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이미 우리는 이렇게 같이 요리를 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어서 그야말로 눈빛만 봐도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정도였다.
“…….”
그렇게 식사를 준비하는 와중, 부엌 저편에선 일리야가 은근히 몇 번 스쳐 지나갔다.
그는 와서 물을 마시기도 하고 찬장을 뒤적이기도 했다.
누가 봐도 장난거리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의도가 다분했다.
아까 전엔 아나스타샤의 기습에 당했지만, 사실 이 집에선 보통 일리야가 아나스타샤를 놀리는 일이 많았다.
자연스레 그의 목표물은 동생인 아나스타샤로 집중되었다.
난 일단 그의 친구이지만 손님이기도 하니까 직접적인 장난에선 제외된 것 같았다.
아니면 본격적으로 칼을 쥐고 있는 사람은 건들지 않기로 했을 수도 있고.
어쨌든 그렇게 일리야가 돌아다니자 몇 번 신경이 쓰였는지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다.
“방에 박혀 있으라고 해도 말 안 들을 거지?”
“내가 왜 주말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데?”
“……됐어. 그럼 밥은 알아서 먹어. 우리도 우리끼리 먹을 거니까.”
아무리 귀찮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그 말은 너무 박정했다. 난 그렇게까지 할 건 없지 않냐는 듯 살짝 그녀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
타이르듯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조금 심했다고 생각하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금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지금은 끼어들어도 될 것 같았다.
“괜찮으시다면 식사 함께 하시겠어요? 일리야.”
두 남매 중 누가 먼저 제안해도 어색한 상황에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내자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어차피 같이 테이블에 앉지 않으면 어색해서 뭔가 먹기도 힘들 것 같았다.
일리야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한가득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럴까.”
“뭘 그럼 그럴까야? 그럼 뻔뻔하게 있지 말고 뭐라도 하던가!”
“알았다고.”
사나운 아나스타샤의 말에 일리야는 얼른 팔을 걷어붙이고 선반 앞에 섰다.
난 적당히 일리야에게도 할 만한 일들을 부탁했다.
가끔은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일을 그에게 떠넘기기도 했지만, 이러쿵저러쿵 시끄러우면서도 우리는 요리를 하나씩 완성해 나갈 수 있었다.
협력하면서 하니 식사를 준비하는 데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닭고기 커틀릿을 튀겨서 완성하는 데에 드는 시간이 거의 전부였다.
그사이 우리는 블린도 몇 개 굽고 샐러드도 만들어서 세 사람이 먹을 만한 요리들을 만들어 냈다.
깨끗이 주변을 정돈하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다른 사람 집에서 식사를 한 경우는 많지만, 대접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직접 요리를 거들면 어쩐지 진정으로 그 구성원 안에 함께하는 기분이 든다.
“잘 먹겠습니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식기를 들었다.
금방 만들어 낸 요리였지만 그 맛은 꽤나 훌륭했다. 내 개인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만족스러울 만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혹시 일리야의 입맛엔 맞을까 싶어 바라보니, 그는 때마침 날 보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맛있네.”
“다행이에요.”
한동안은 식기가 접시에 닿는 소리나 간간히 웃는 소리만이 들렸다.
함께 요리를 하면서 각자 맡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할 이야기도 그만큼 많았다.
그리고 요리 쪽으로 집중되었던 대화의 흐름은 자연스레 조금 더 넓어지면서 그간 나누지 못했던 안부 쪽으로 향했다.
난 일리야를 본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궁금한 부분이 꽤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일리야도 이제 2학년이죠?”
“응? 응.”
“학교생활은 어떤가요?”
갑자기 옆에서 풉 하고 뿜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른 한 손은 미안하다는 듯 들고 있었다.
내 말을 돌이켜보니 동생 친구로서 할 말 치고는 좀 이상하긴 했다.
아나스타샤는 말은 않았지만 그 눈빛은 마치 우리 엄마도 그런 말은 안 한다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난 이 정도는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리야도 약간 당황해하는 것 같았지만, 난 꿋꿋하게 다시 물어보았다.
“그게…… 궁금해서요. 미술 대학 생활은 어떤지.”
“항상 똑같지 뭐……. 요즘 그리는 거 보여 줄까?”
일리야는 그제야 편히 웃더니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어 몇 번 조작하고는 내 쪽으로 건네주었다.
그가 켜 준 사진엔 학교 작업실에서 찍은 것 같은 이젤과 캔버스가 담겨 있었다.
그 캔버스 안의 그림은 일리야가 곧잘 그리던 범고래가 아니라 푸른 풍경이었다.
난 그림에 대해선 아직 잘 모르지만 이 그림으로 일리야의 기술이 한껏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옆으로 사진을 몇 장 넘겨 보니 다른 것들도 있었다.
비단 완성된 그림들뿐만이 아니었다. 칠을 하다가 중간에 찍어 놓은 것, 붓을 씻는 물통을 찍은 것, 스케치북에 그린 밑그림 스케치 몇 장.
하나하나가 일리야의 미술 대학 생활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 조금 재미있었다.
난 어느 한 사진이 아니라 이 전체에서 느껴지는 감상을 그에게 전했다.
“멋지네요…… 생동감이 넘쳐요.”
“아직도 기초만 하는 것 같은 기분이야.”
“기초가 이 정도라면 그다음은 더욱 굉장하겠는걸요?”
“그래야겠지.”
기분이 좋은지 일리야는 가볍게 웃으며 다시 포크를 들었다.
난 마지막으로 돌려주기 전 사진을 몇 장 넘겨 보다가, 그림이 아닌 것도 발견했다.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사진도 있네요.”
“아, 잠깐만. 이리 줘.”
일리야는 화들짝 놀라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난 순순히 그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물론 아나스타샤가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녀는 곧장 내게 물어왔다.
“뭔데?”
“어떤 여성분이었어요.”
“오빠 사귀는 사람 생겼어?”
내가 말하자마자 아나스타샤가 곧바로 일리야에게 물었다.
스마트폰 자체를 아나스타샤에게 넘기면 일이 커질 것 같아서 바로 일리야에게 돌려주긴 했지만, 사실 프라이버시에 관련된 일이라고 해도 그렇게 숨기거나 할 일은 아니었다.
이 또한 일리야의 대학 생활 이야기의 일환이기도 할 테니까.
나와 아나스타샤가 식사는 뒷전으로 하고 흥미를 보이자 일리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관심 꺼. 왜들 그러는데? 점심이나 먹자고.”
“궁금하잖아?”
“그러네요.”
“당황스럽네.”
평소 꽤 여유 있고 어른스러운 일리야가 묘하게 서툰 모습을 보이니 재미있긴 했다. 동생의 친구인 내가 있어서 더 그런 걸까.
하지만 괜히 지금 그에게 장난을 칠 생각은 없었다. 간섭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아나스타샤는 이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신랄하게 그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와, 부끄러워하네. 진짜 밥맛 떨어져.”
“……너 진짜 가만 안 둔다?”
“그러든가?”
일리야는 당장 식탁 너머의 아나스타샤를 붙잡아 입을 틀어막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엔 이즈마일로프 남매 둘뿐만이 아니었다. 일리야는 슬쩍 내 눈치도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어라 해 줘야 하는진 학교에서도 어디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난 뭔가 어색함을 느끼며 말했다.
“축하해요. 일리야.”
“이게 축하받을 일인가……?”
그렇다고 슬퍼할 일은 아니니까요.
놀림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듯 일리야가 혼란스러워했다. 어색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런데 장난을 그칠 생각이 없는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너무 슬프다는 듯 우는 목소리까지 내며 말했다.
“그래, 축하할 일은 아니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면 그랬을까. 누군진 몰라도 불쌍한 언니네. 이상한 남자한테 잘못 걸려서 앞으로 고생할 일만…….”
“지금 그게 무슨 뜻이야.”
“응? 어제 봤던 드라마 이야기인데.”
“넌 맥락이라는 게 없냐? 어떻게 들어도 드라마 이야기가 아닌데?”
상식적인 이야기를 해 봐야 지금 작정한 아나스타샤를 막을 순 없었다.
당연히 한두 번 겪는 상황이 아닌 일리야는 지금은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이를 갈며 그녀에게 말했다.
“두고 봐. 아나스타샤. 너도 언젠가 나한테 걸리면…….”
언젠가 아나스타샤에게도 연인이 생긴다면 그대로 복수를 다짐하던 일리야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썹을 찡그리더니 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있는 건 아니지?”
그러면서 확인하듯 날 바라보는데, 그렇게 본다 한들 내가 해 줄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웃음이 터졌다.
“풉.”
“……야!”
“와 진짜, 진짜로 웃긴다 이 오빠! 왜, 걱정돼? 응?”
아나스타샤가 깔깔 웃으며 일리야를 마구 놀렸다.
그래도 동생이 신경 쓰이긴 하냐는 듯, 만약 있으면 어쩔 거냐는 듯 일리야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만 쏙쏙 골라 던졌다.
한참을 시달리던 일리야는 결국 신경질이 났는지 완전히 그녀를 무시하며 포크로 커틀릿을 찍었다.
“됐다. 마음대로 해.”
“아, 배 아파.”
숨이 넘어가라 웃던 아나스타샤는 진짜로 배가 아픈지 웅크리고 있었다.
잠시 색색거리며 그렇게 숨을 내쉬던 아나스타샤가 별안간 고개를 슥 들더니 말했다.
“괜찮아. 아마 오빠가 걱정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
막 커틀릿을 먹던 일리야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이쯤 하자는 듯 인상을 썼다.
아나스타샤도 더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지 식기를 다시 들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식기를 들었지만, 음식을 입에 넣는 대신 자꾸만 일리야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지금 일리야처럼 당연하게 아나스타샤에게도 연인이라 할 사람이 생기겠지. 그녀는 너무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떻게 상상해 봐도 선뜻 떠올리기 어려웠다.
멍하니 친구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도 그 생각이 뻗어 온다.
물론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도 되는 걸까. 피아노를 제외한 다른 거의 모든 것들을 유예했던 건 그 무엇도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은 새에게서 기억을 넘겨받고 판단에 혼란을 겪을 일이 줄어들었다. 당연히 유예에도 끝이 찾아온다.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 아나스타샤처럼 즐겁게 일리야를 놀리는 데에 동참하거나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봐도 지금은 소용없었다. 난 일단 복잡한 생각들을 밀어놓고는 샐러드를 찍었다.
식사를 마치고 정리도 끝내고 나니 한가로운 오후 시간대였다.
일리야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근처에 재미있는 곳이 있는데 잠깐 가 볼 생각이 있으면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내가 놀러왔으니 되도록 재미있게 해 주려는 모양이다.
“감사하지만, 다음에 부탁드려도 될까요? 일리야.”
“왜? 나가는 건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전 오늘 놀러온 것이 아니거든요.”
오늘 아나스타샤의 집에 온 목적은 음악 연구지 다른 그 무엇도 아니었다.
일리야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황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우리가 무언가 연구한다고 하면 절대로 건들지 않았다.
“알았어. 거실에서 할 거야? 정리해 놓을까?”
“아뇨, 피아노를 써야 해서요.”
“알았어. 방해 안 할게.”
일리야는 필요한 것 있으면 부르라며 손을 흔들고는 자기 방 쪽으로 사라졌다.
아나스타샤는 마치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조용해졌네.”
속이 다 시원하다는 것처럼 말하곤 있지만, 아까 식사 자리에서 가장 신났던 건 사실 아나스타샤였다.
난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아나스타샤는 기지개를 쭉 펴고는 날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즐거웠던 시간은 잠시 접고, 이번엔 음악가로서 즐거움을 찾아 움직여야 할 때였다.
긴 말 할 것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고 난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