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81화 (781/1,277)

##  781화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우리는 서로 묻지 않았다.

먼저 아나스타샤가 스스로 이해한 만큼 자신의 파트를 연주했고 그다음으로 내가 이해한 것들을 음악으로 제시했다.

본래 세 명이 필요한 음악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완전한 음악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따로 에르네스트의 파트를 음악에 섞는 대신 심상으로만 더해 넣었다.

그가 평소 음악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이 악보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의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을 토대로 만들어 낸 추측은 꽤 또렷한 음악을 드러낸다.

나와 아나스타샤는 침대맡에 나란히 걸터앉은 채 각자 추측해 낸 그의 음악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이 프레이즈는 몽땅 가져가려고 했을 것 같지 않아?”

“아마 주도하려 할 거예요. 그런데 제 생각엔…… 여기, 이 부분만큼은 아나스타샤가 낚아채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디?”

“여기요.”

난 악보의 한 지점을 손끝으로 짚으며 아나스타샤에게 보여 주었다.

어지러운 화성들 속에 감춰져 있어서 바로 알아차리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분명 에르네스트의 음악 속에서 아나스타샤가 톡 튀어나와 주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아마 함께 합을 맞춰 본다면 자연스럽게 그리 될 테지.

가만히 악보를 보던 아나스타샤는 처음엔 갸우뚱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는…… 되는 거네. 어떻게 그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내? 둘 다 네 파트도 아닌데.”

난 악보를 읽어내는 능력이 조금 좋은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술적인 이야기 등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기 파트에만 매몰되지 않기 위해 우리 같이 모여 연구 중인 것 아니었나요?”

“그렇지?”

“그렇다면 제 파트에도 조언을 해 주세요.”

“응? 어, 잠깐만.”

“어서요.”

이런 공동 연구를 할 땐 협의와 협조가 굉장히 중요하지만, 가끔은 반대의견을 꼭 내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혼자선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놓쳤던 부분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준비도 안 된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보채자 그녀는 당황스러운지 악보를 막 뒤적이다가 결국 부족한 자기 파트나 다시 쳐 봐야겠다면서 피아노 앞으로 도망갔다.

“…….”

가만히 아나스타샤가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는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그녀가 정말 많이 성장했음을 새삼 느꼈다.

악보를 받고 며칠도 안 되었는데 이 정도 수준의 연주를 펼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초견 실력이라면 자신 있는 나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초견 실력과 숙달력도 상승해 있었다.

테크닉에 대해선 이미 날 뛰어넘었다고 생각한다.

아나스타샤가 알캉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듣노라면 이미 그녀 역시 한계에 다다른 연주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한계의 벽을 부수면 그녀 역시 더 빠르고 수월하게 벽을 무너뜨리고 나아간다.

아마 앞으론 계속 그녀의 한계는 내 한계보다 높게 위치할 것이다. 몸으로 악기를 다루는 이상 당연한 일이다.

이제 내가 그나마 조금 더 잘한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곡을 깊게 파고들어 디테일하게 해석하고 표현하는 능력 정도였다.

다만 그 해석력에서 비롯되는 차이가 사운드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꽤 두드러지게 느껴지기 때문에 총합적인 음악성에선 아직 내가 반걸음 정도 앞서 있다고 평가되고 있었다.

그건 다른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하지만 분명히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잡히겠지.

그것이 난 너무 기쁘다.

“…….”

감상자의 태도로 꼿꼿하게 서 있던 허리가 슬며시 구부러졌다.

함께 연구하는 입장에서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악보를 보며 분석적으로 들어 주는 것이 예의겠지만, 지금은 그녀의 해석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그냥 이 음악에 떠내려가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잠깐 아나스타샤의 파트가 멈췄을 때, 그녀는 마치 지금까지 어땠냐는 듯 날 바라보았다. 보통 연주 중엔 사람의 말을 하지 않지만 지금은 해도 되는 순간이다.

난 감상을 말하는 대신 그녀에게 부탁했다.

“아나스타샤.”

“응?”

“누워서 들어도 될까요?”

아나스타샤는 황당하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내 부탁 자체가 이상하다기보단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이 믿기지 않다는 표정이다.

물론 평소 내가 친구들 앞에서 늘 학구적인 태도를 보였던 건 사실이다.

음악을 앞에 두고 딴청을 피우거나 자세를 흐트러뜨리면 안 된다고 교육받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여긴 학교도 연습실도 아니고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아나스타샤의 방이니까, 조금은 편하게 친구로서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난 허락을 받자마자 뒤로 슥 넘어갔다.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가 날 받아 주었고, 양옆으로 악보들이 바스락거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자니 다시 연주가 이어졌다.

“…….”

에르네스트가 쓰고 아나스타샤가 연주하는 음악이 귓가로 들려온다. 유려한 아르페지오로 시작되는 음악이었다.

파도처럼 유연하면서도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난 이 음악을 이루는 것이 내 친구들이라는 것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꼈다.

심지어 저 안엔 내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 사실에 내가 얼마나 감사를 느끼는지 이 아이들이 알까.

두 친구의 영향력과 크기, 그리고 내 위치 등을 가늠하면서 난 음악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가만히 있는데도 침대가 울렁이며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돛단배에 누워 있는 기분이다.

물론 세 명이 연주해야 할 곡을 혼자서 자기 파트만 연주하고 있기도 하고, 아직 연주가 완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기분엔 여기저기 색이나 그림이 빠져 있었다.

난 그 불완전성에 휩쓸리지 않고 완성된 음악을 심상 속에 이루었다. 그렇게 완성된 음악은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이 멎었다.

누워 있는 내 눈앞으로 얼굴이 슥 다가왔다.

“자니?”

난 누워 있는 채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아나스타샤는 날 잠들게 만들지 못한 게 아쉬운 듯했다.

갑자기 음악을 듣다 말고 내가 눕겠다고 해 버렸으니 그녀로선 아예 재우고 싶은 도전 정신이 들었나 보다.

그러나 애초에 내가 누워서 들었던 건 그녀의 음악적 해석을 자연스레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허리를 일으키자 아나스타샤가 옆으로 비켜서면서 내 옆에 앉았다. 난 그녀와 마주 보았다.

방금 들었던 음악에 대한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할 말이 많았다.

하나하나 분석적으로 따지지 않고 누워서 편하게 들었다고 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앞서, 난 갑자기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혹시 최근에 에르네스트와 피아노로 대결해 본 적 있나요?”

“……어?”

음악적인 부분에서 어떤 말을 들어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었겠지만, 갑자기 이런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아나스타샤는 적이 당황해했다.

아까 전에 눕겠다고 했을 때도 그랬었는데, 지금은 조금 더 놀란 모습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내 말에 답하는 대신 다시 되물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아나스타샤의 실력이 너무 좋아져서요. 이젠 에르네스트도 긴장해야 할 것 같은데요?”

꽤 진심으로 말한 것인데, 아나스타샤는 여기 없는 친구 이름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무슨 소리니. 그 애가 왜 긴장을 해?”

“음…… 모르고 계셨나요? 에르네스트는 꽤 신경 쓰고 있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종종 나 덕분에 실력이 좋아졌단 말을 하곤 한다. 나도 그것을 부정하진 않는다.

실제로 그녀가 느끼는 테크닉적 한계에 대한 조언도 내가 많이 해 주었고, 오래 같이 공부도 해 오면서 그녀의 음악에선 내 영향을 받은 소리가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비단 나만이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가 이미 엄청난 실력을 손에 쥐었음에도 쉬지 않고 계속 앞을 향해 가는 건 나 외에 에르네스트라는 또 엄청난 연주자가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에르네스트 역시 아나스타샤의 존재감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난 두 사람이 보다 높은 수준의 음악을 공유하며 상승적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나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아나스타샤는 잠시 말이 없더니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애가 직접 너한테 그랬어?”

“아뇨, 말로 하기보단 느끼기에 그렇죠.”

“느끼기에…….”

내가 느끼는 두 사람 사이의 음악적 관계는 누군가의 입에서 알아낸 것이 아니다.

그저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을 때 서로 나누는 음악에서 읽어낸 것일 뿐.

그건 말로 전하고 이해하는 어떠한 사실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다가오는 진실이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걸까.

어려서부터 친하기도 했고 때론 다투기도 하지만, 지금은 정말 명실상부 러시아에서 손꼽을 만한 천재인 두 사람이 협력과 경쟁 등을 통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내겐 경이롭게 느껴졌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아나스타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무엇이든 괜찮다는 뜻으로 웃어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피아노 쪽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런 것도 생각하고 있겠네?”

“어떤 것이요?”

“네 생각엔 나랑 에르네스트가 대결한다면 누가 이길 것 같니?”

해 본 적이 있는 걸까.

우리는 가볍게 장난처럼 대결을 하기도 하지만 사소한 내기도 진지하게 하는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의 경우엔 피아노를 두고 하는 대결을 가볍게 할 것 같진 않다.

지금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그렇고, 조금 진지한 대결이었을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선 없었는데, 언제 있었던 걸까. 조금 다투었던 저번 주 즈음이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별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난 긍정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요,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요?”

“그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말 한 것 아니야?”

아나스타샤는 이제 와서 슬쩍 발을 빼는 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물론 두 사람의 실력을 운운한 건 맞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대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결이 성립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어느 한쪽도 쉽게 질 생각이 없을 테니 노력을 아끼지 않을 테고, 그건 곧 각자의 음악적 자산이 된다.

난 그 자산의 크기가 커지는 것에 관심이 있다.

난 싱긋 웃으며 그녀의 손끝에 내 손끝을 대었다.

“세계에 있어선 의미 있는 일이겠죠. 그런데 제게 있어선 두 분 모두 자랑스러울 뿐이에요.”

앞으로도 어디에서든 두 사람은 무대에서 비교되게 될 테고 그건 음악계라는 세계에서 몇 번이나 큰 주제로 다루어지겠지. 사람들은 누구 실력이 더 낫다면서 평가를 하거나 순위를 매기기도 할 것이다.

나까지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단 친구로서 보다 낙천적으로 함께 음악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라 생각한다.

진지하게 바라보다가 미소를 짓자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쯤은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린 옆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말없이 기다리자 한참 지나서야 아나스타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그런 말 하면 난 부끄럽잖니…….”

“그, 그런가요?”

“……진짜.”

무어라 웅얼거리던 그녀는 갑자기 이런 이야기는 어색하다는 듯 악보 뭉치를 다시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보다 이거나 봐 줄래. 아까 했었던 건데…… 에르네스트도 이대로 따라왔을 거라 생각해?”

난 아나스타샤가 내민 악보를 살폈다. 그 부분은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음악적 구조를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다만 그뿐이었다면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균형이 어느 쪽으로 더 향해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상세한 부분에 대해선 직접 연주해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가 알겠죠?”

“그렇겠네.”

“체크해 두죠. 월요일에 가서 물어보면…….”

“왜? 뭐 하러?”

“예?”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어느샌가 손에 든 스마트폰을 흔들며 말했다.

“지금 물어보면 되잖아. 전화로.”

그것도 방법이긴 했다.

연주자가 연습 중에 해석에 의문이 생긴다면 보통은 다른 연주 레퍼런스를 찾거나 그 곡을 이전에 깊게 연구한 분을 찾아 레슨 등을 요청하곤 하는데, 우리는 아예 곡을 쓴 작곡가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궁금한 게 있다면 직접 대답을 들을 수 있다.

물론 사사건건 물어보는 건 방해가 되겠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다 싶었다.

난 그녀가 궁금해하는 일이니 직접 전화할 것이라 생각하며 손을 앞으로 내밀며 지금 전화를 해 보라는 제스쳐를 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난데없이 내민 내 손 위에 스마트폰을 턱 올려놓았다.

“네가 걸어 봐. 타티아나. 그 애는 네 전화를 더 좋아 할 테니까.”

아까 내가 대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까?

아나스타샤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난 정말 여러 이유가 그녀의 목소리 안에 섞여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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