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4화
타티아나는 평범한 애가 아니야.
그녀의 어떠한 천재성이나 겪은 상황 등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아나스타샤가 뒤늦게 생각한 건 그 모든 것을 한 몸에 담고 있으면서도 진지하고 성실한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타티아나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마주하고도 그녀는 화를 내거나 충동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참을성 있게 한 번 더 생각하고는 차분히 이야기한다.
그것은 비단 다른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에 대한 태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태도는 배울 점이 정말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누구나 따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
침대맡에 앉아서 말하기도 하고 미소를 짓기도 하는 타티아나는 어딘가 쉽게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바로 옆에서 평범한 친구로서 스며들려 하는가 반면, 어느 순간 눈치채지 못하게 슥 물러나선 관조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시선이 가끔은 친구가 아니라 아예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것처럼 느껴져서 아나스타샤는 종종 섬찟함을 느꼈다.
타티아나가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눈을 떼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기에.
타티아나는 스스로를 연주자라 칭한다.
그녀 입에서 나오는 연주자란 그 단어가 단순히 한 직업을 뜻한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아나스타샤도 이제 알고 있었다.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정체성 고찰은 그녀를 음악의 화신과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중요시하는 의문점도 그녀에게 있어선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조금이라도 불안을 보이면 타티아나는 금방 다시 곁으로 돌아와선 따뜻하게 다독이려 한다.
타티아나는 결코 감정이 무디거나 애정에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다.
되레 평범한 아이들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섬세하기도 하다.
애초에 자기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다채로운 표현력을 지닐 수 없다.
솔직하면서도 다만 신중할 뿐이다.
그 신중함이 보통 사람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 있어서 가끔 멀리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뿐.
스스로를 솔직하지도 신중하지도 못하다고 생각하는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타티아나의 기준점과 생각 등을 어렴풋이 읽어나가면서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이야기 많이 했네요.”
둘만이 공유하는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니 피아노 소리가 그친 지 한참이나 되었다는 자각이 갑자기 찾아왔다.
타티아나는 약간 피곤하면서도 생각이 많은 얼굴이다.
오늘은 이쯤 이야기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아나스타샤가 무릎을 까딱였다.
“마실 것 좀 가져올까?”
“그럴까요. 지금 몇 시…….”
스마트폰을 찾는지 침대 위를 짚던 타티아나는 부스럭 하는 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거기엔 그녀들이 연구 중인 악보들이 놓여 있었다.
분명히 침대 매트리스 위에 놓인 것을 손으로 눌렀는데도 악보는 별로 구겨지지도 않았다.
손에 무게가 없기라도 한 건가 싶을 정도다.
“아, 이거.”
타티아나는 다시 악보를 들더니 주제가 바뀌기 전 나누던 음악 연구를 떠올린 듯 보였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했었던 연주에 대해 작곡가인 에르네스트에게 즉각 의견을 물어보자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약간 주저했다. 보아하니 물어보는 것 자체를 주저하는 게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그녀에게 전화하라고 했던 것을 상기 중인 것 같았다.
그냥 모른 척하고 나한테 맡겨도 될 텐데. 이럴 때마저도 성실하네.
아나스타샤는 가만히 지켜보면서 타티아나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고 싶기도 했지만, 오늘 그녀를 너무 많이 괴롭힌 것 같아서 더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아나스타샤가 감당할 수 있는 죄악감은 이미 찰랑거리며 넘치기 직전이었다.
“그냥 내가 할게.”
“예?”
“전화 말이야. 물어보기로 했잖아?”
그렇게 아나스타샤는 오늘 있었던 이야기 전부를 심각하지 않게 넘기며 매듭지으려 했다. 이 정도면 훌륭한 수습이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잘래잘래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음, 제가 할까요.”
뭔가 오기라도 생긴 걸까.
타티아나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지만 그녀가 무언가 시도 중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남들이 하는 이야기나 에르네스트가 어떻게 본다든지 하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면 전화 같은 건 편하게 할 수도 있어야 했다.
애초에 이건 사적인 전화도 아니고 공적인 일에 관한 내용이기도 하고.
그런데 타티아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놓더니 아예 악보를 들고는 다시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정리를 좀 해 볼게요.”
“정리는 무슨 정리니?”
“그…… 실례잖아요. 물어볼 사안들을 똑바로 정리도 하지 않고 무작정 전화하는 건…….”
공적인 전화를 한다고 해서 정말 그렇게까지 할 일이야?
작곡가에게 곡에 대한 의견을 문의한다고 생각한다면 물론 횡설수설하며 시간낭비를 길게 하지 않도록 딱 필요한 질문들만 간추리는 게 맞겠지.
하지만 에르네스트잖아? 횡설수설 좀 하면 어때서? 그 애는 되레 그걸 좋아할걸?
차마 말은 못하고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이, 타티아나는 아예 펜까지 가져와선 노트에 또박또박 전화 대본까지 쓰기 시작했다.
가만히 지켜보니 번호까지 매긴다.
진짜로 전화를 해선 첫 번째 질문부터 시작할 모양이다.
“…….”
아나스타샤는 등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이것도 연주자로서의 성실함이 우선되기에 나오는 행동인 걸까.
단순히 보기엔 그렇게 보인다. 타티아나도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고. 그녀는 음악의 화신으로서 자신의 기준과 신념에 투철하다.
그러나 아나스타샤가 보기에 지금 타티아나는 단지 시간을 끌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고 어색해하면서도 외면하는 건 지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펜을 움직이는 중이다.
그 모습을 보여 아나스타샤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14년간의 기억이 서서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게 다시 한번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할 거면 진짜로 월요일에 물어보는 게 낫겠다. 타티아나.”
“문제가 있나요?”
“우리가 지금 몇 가지 추려서 에르네스트에게 확인받는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게 아니잖니?”
침대에 반쯤 엎드려서 공책에 대본을 쓰던 타티아나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이어 설명했다.
“계속 연습할 거고, 내일도 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편하게 연락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양식을 갖출 거면 차라리 한 번에 몰아서 하는 게 낫지.”
“그런가요?”
약간 판단이 흐려졌는지 타티아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것만큼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그럼 제가 월요일에 물어볼게요…….”
“그렇게 하자.”
각자 파트와 연계에 대한 이야기는 각자 물어보는 것이 나았지만, 타티아나는 자신이 도맡아서 중심을 잡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사실 타티아나가 어려워하는 것만큼이나 아나스타샤 역시 신경이 쓰였다.
오늘 타티아나에게 말해 둔 것들은 사실 몇몇 확인에 가까운 것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그녀의 반응은 조금 바뀌었다.
에르네스트도 예상은 하겠지만 어쩌면 엄청 혼이 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이제 와서 그걸 두려워할 정도로 마음이 약하진 않았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일방적인 배려나 인내 따위를 그만둔다 하더라도 타티아나가 괜찮다고만 생각한다면 아무 말 않고 입 다물고 있을 생각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복잡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아나스타샤는 자기 하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깔끔하게 해결될 문제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인지 아닌진 해 봐야 알겠지만, 적어도 자기 하나만 컨트롤하면 된다는 점에서 훨씬 현실성 있는 해답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의 선택에 따라선…….
“발소리 들리지 않았나요?”
“응?”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귀가 좋은 타티아나는 무언가 감지했는지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정말로 또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 밖에서 삑 하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오셨나 보네요?”
“엄마인가?”
토요일엔 출근해도 일찍 돌아오는 편이니 슬슬 오실 때긴 했다.
아나스타샤가 밖으로 나가니 그녀의 어머니 아젤라이다가 신발을 막 벗고 있었다.
고개를 든 아젤라이다는 방에서 나온 아나스타샤와 그 뒤로 쪼르르 따라 나온 타티아나를 보고는 크게 반색했다.
“나 왔…… 어머, 타티아나.”
“안녕하세요. 아젤라이다 아주머니. 실례하고 있어요.”
“오랜만이네! 이리 오련. 안아 보게.”
아젤라이다가 자연스레 양팔을 뻗자 타티아나도 주저 없이 그녀와 포옹했다.
그간 몇 번 놀러 온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 일찍 집에 돌아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본 건 정말 오랜만이긴 했다.
어머니가 워낙에 타티아나를 예뻐하기 때문에 반가워하리란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 귀가하자마자 이런 반응을 보이니 아나스타샤는 자동적으로 볼멘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나는?”
“답잖게 왜 이러니?”
“나 엄마 딸인데??”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아젤라이다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 사이로 번갈아 손을 왔다 갔다 했다.
“여기 타티아나도 딸 같으니 마찬가지 아니니? 둘이 가끔 보면 자매 같기도 하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거 타티아나가 기분 나빠 할 거야.”
“아, 그런가? 기분 나쁘니 타티아나?”
아차 싶었는지 아젤라이다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어떤 종류의 애정이든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타티아나가 고개를 저으며 방긋 웃었다.
“아뇨, 전 감사할 따름이죠.”
“거보렴.”
“그게 아니라…….”
그만큼 사이좋아 보인다는 건 기뻐할 일이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쉽게 이런 말을 하는 어머니도 이상했고 타티아나도 별 생각 없어 보이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복잡한 기분으로 인상을 쓰고 있는데, 타티아나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언니라고 불러 보실래요?”
“엄마가 이상한 소리 하는 거 받아 주지 마! 그리고 네가 왜 언니니?”
“그럼 제가 언니라고 불러 보면 어때요?”
자매라 불릴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기만 하면 호칭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아나스타샤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언니라 불리는 건 조금 이상했다.
키 차이만 놓고 본다면 그게 자연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는 항상 타티아나에게 배울 점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조금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 혼란이 짜증이 될 무렵 타티아나가 목을 까딱이더니 가볍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농담도 할 만한 걸 해.”
“할 만했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혼자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나스타샤뿐이었지, 이 상황에선 타티아나와 아젤라이다가 지극히 정상이었다.
아까 방에서 했었던 대화에서 느낀 기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워낙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모양이다.
아나스타샤는 일단 그런 생각들을 무시하고 쾌활하게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벽에 기대어 섰다.
안으로 들어온 아젤라이다는 주위를 보더니 아나스타샤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네 오빠는?”
“방에.”
“또 게임 하고 있는지 불시검문을 해 봐야겠구나.”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아마 생각이 있다면 자기도 공부를 하겠지.
아나스타샤는 그런 희망을 1% 정도 가졌지만, 진짜로 아젤라이다가 문을 열었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일리야를 보고는 차가운 표정을 했다.
아젤라이다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문을 닫고는 돌아서선 다시 타티아나를 보며 물었다.
“아, 그나저나 타티아나. 저녁 먹고 가니?”
“예. 자고 가려고 해요.”
간만에 본 타티아나가 정말 반갑긴 한가 보다. 아나스타샤는 어머니가 최근 이렇게 기뻐하는 걸 본 적이 있나 싶었다.
아젤라이다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오늘은 주말이기도 하니 저녁엔 특별히…….”
“괜찮아요! 저 이번엔 아나스타샤와 음악 연구를 하러 온 거예요!”
처음 놀러 왔을 때 출장 뷔페를 시킨 것을 타티아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큰 집에 살면서 별로 놀라지 않아도 될 텐데, 감사해하면서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를 최고로 대접하고 싶었지만, 이번엔 그녀의 바람에 맞추어서 같이 어머니를 설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