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5화
이즈마일로프가에서 지내는 주말 동안 아나스타샤의 부모님들께선 정말로 많은 편의를 봐 주셨다.
나와 아나스타샤가 오후 내내 방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동안 아젤라이다 아주머니가 간식을 챙겨 주기도 하셨고, 저녁엔 옥상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성대하게 맞이해 주신다는 것이 느껴져서 정말 감사했지만, 밖의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세르게이 아저씨와 일리야 두 명이 옥상에서 바비큐를 굽고 왔다 갔다 하며 집 안으로 가져다주는 걸 받아먹기만 하는 건 정말 미안했다.
하지만 내가 움직여 거들어 주겠다고 해도 이즈마일로프 온 집안 식구들이 막아서는 데에야 어쩔 수가 없었다.
날 딸처럼 생각하신다면 조금은 편하게 대해 주셔도 좋을 텐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닌가 보다.
감사의 의미도 조금은 담아서 난 아나스타샤의 가족들이 궁금해할 만한 일들에 대해 조금 더 많이 말했던 것 같다.
요즈음 학교의 상황이라든지, 우리가 함께 연구 중인 곡에 대해서라든지. 곧 있을 연주회의 규모나 일정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이미 아나스타샤가 집에서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도 부모님들은 어쩐지 내 이야기에 더 신빙성을 가지시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억울해했지만, 대신 내가 좋은 이야기를 잔뜩 해 주어서 그녀의 평판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도 우리는 늦게까지 방에서 음악을 붙잡고 있다가, 사일런스 피아노의 진동도 신경 쓰이게 될 즈음 연구를 마치고 잠들었다.
“아침은 저희가 만들어 볼까요?”
“그래도 되겠니? 저번에도 그랬었는데…….”
“어제 대접해 주신 것들이 너무나 감사해서요. 늘 그랬지만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밖으로 나와 보니 아젤라이다 아주머니가 식기들을 정돈하고 계셨다.
다른 사람이 부엌에 손을 대는 것을 신경 쓰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주머니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되레 나와 아나스타샤가 모여서 이것저것 만들고 내놓는 것을 굉장히 기특하게 보시는 분이셨다.
기뻐해 주셨던 모습이 기억나서 이번에도 제안드렸더니 아주머니는 흔쾌히 승낙하셨다.
시간을 살짝 보니 이즈마일로프가의 일요일 아침식사 시간엔 조금 이르다. 잠깐 시간을 보내면서 씻기도 했고, 그사이 아주머니는 차를 끓여 주셨다.
“아나스타샤도 요즈음 아침에 일찍 잘 일어나곤 하는데, 오늘은 조금 늦는구나.”
“어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느라 아마 피곤할 거예요.”
“그런데 타티아나 넌 일어나 있잖니?”
“전 이게 습관이라…….”
“그 좋은 습관 아나스타샤한테도 좀 가르쳐 주렴. 뭐, 조금씩 잘 배우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하하…….”
예전부터 뭔가 이 집에서 나는 아나스타샤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사람처럼 대우받고 있었다.
내가 규칙적인 활동을 하는 건 사실이니까 그 점이 좋게 보인 모양이다.
하지만 나 역시 아나스타샤에게 좋은 영향들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부모님들께서 잘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저번에 리허설 때 일인데요. 아나스타샤가 얼마나 멋졌는지 몰라요.”
또 한창 열을 올리며 난 아나스타샤의 평판을 올리는 데에 집중했다.
내가 그럴 때마다 아젤라이다 아주머니는 딸의 신선한 모습을 느끼는지 꽤 재미있어하시기도 하고, 기뻐하시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건 내게 있어서도 행복한 일이었다.
그렇게 차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적당한 시간이 되어 난 아나스타샤를 깨우러 갔다.
“아나스타샤, 이만 일어나시겠어요?”
“으…….”
묘하게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아나스타샤가 뒤척였다.
창 쪽으로는 햇빛을 피하려고 하고 내 쪽으로는 목소리를 피하려고 하다 보니 좌우로 뒹굴뒹굴하는 모습이다.
잠시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잠에 취해 있던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내가 한참 전부터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듯하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켜더니 날 보았다.
풀어져 있던 눈매가 점점 날카로움을 되찾기 시작했다. 정신이 든 그녀는 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일찍 일어나…… 무슨 냄새지 이거?”
“아, 허브향일 거예요. 방금 어머니와 티타임을 가졌거든요.”
“……뭐?”
별로 이상한 말은 하지 않았는데도 아나스타샤는 충격적인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되묻더니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날 심문했다.
“아침부터 엄마랑 무슨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 했죠. 당연히.”
“아니야…… 내 감시가 없는 사이를 엄마가 놓칠 리가 없어.”
옆에서 보고 있지 않으면 어릴 적 있었던 일부터 몽땅 다 내게 말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런 이야기에 흥미가 있는 건 다름 아닌 나였지만, 아주머니는 아나스타샤의 최근 바뀐 습관 등에 관해 이야기하셨을 뿐이다.
가까이에 보고 있을 땐 그녀를 놀리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실 뿐이지 사실은 정말 아나스타샤를 사랑하신다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부분을 정확하게 전달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난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아나스타샤의 눈치를 보시는 분이던가요?”
“……그건 그렇네.”
생각보다 간단하게 아나스타샤는 납득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완전히 일어났음을 확인한 나는 다시 무릎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침 식사를 만들까 해요. 도와주실래요?”
“응? 알았어. 바로 씻을게.”
귀찮기도 할 텐데, 순순히 받아들인 아나스타샤는 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일리야도 깨워야겠어.”
“세 명이서 만들까요?”
“그래야지 당연히.”
절대로 그냥 두는 일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한 아나스타샤는 곧장 일어날 채비를 했다.
난 다시 부엌으로 가선 잠시 무엇을 만들까 스마트폰으로 검색했다.
모자란 재료가 있다면 일찍 부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빨리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메뉴를 고르는 사이, 일리야의 방에서 난데없는 노호가 울려 퍼졌다.
“…….”
아나스타샤가 도대체 일리야를 어떻게 깨운 건지 모르겠지만,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던 난 다시 별 신경 쓰지 않고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했다.
두 사람에게 할 일을 이것저것 쥐여 주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
어린 동생의 질타에 에르네스트는 잠에서 깨어났다.
“형 진짜 지금 안 일어나면 밥 없어.”
“…….”
그냥 대충 남겨두면 안 되나?
최근 잠드는 시간도 새벽 늦은 시간으로 바뀌고 수면시간 자체도 굉장히 많이 줄어들어서 에르네스트는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다. 심지어 주말엔 더더욱 그랬다.
물론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수면시간을 반납하는 일이기에 누구 탓을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럴 때면 조금 짜증이 난다.
에르네스트는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며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일어났어.”
“거짓말하지 마.”
“사샤. 나 지금 2시간 잤거든? 제발 좀 내버려 둘래?”
정말로 피곤해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말이기도 하고 부모님도 뭐라 안 하는데 동생이 자꾸 귀찮게 하는 건 에르네스트도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사샤는 마치 사관학도생이라도 된 것마냥 엄격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내가 귀찮게 하는 게 싫으면 밤새지 마.”
누구한테 배웠길래 이렇게 똑부러질까.
특별한 사정이 있건 뭐건 밤을 새고 피곤하게 지내지 말고 제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라는 말이었다.
그 말만 놓고 본다면 사실 무어라 변명할 말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도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어서 지금 상태가 비정상적이라는 자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
하지만 그건 나중에 여유가 좀 생길 때가 되면 고치면 될 일이고. 지금 에르네스트는 정말 시간도 집중력도 부족했다.
다시 사샤 쪽을 보면서 에르네스트는 짜증스레 말했다.
“난 밤에 일을 해야 잘 된다니까.”
하지만 사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 말 하는 사람들 많아. 담배를 피워야 일이 잘 된다는 사람도 있지. 나중에 똑같은 핑계로 하고 싶은 거 다 하려는 거야?”
“아니…… 그게 같은 거냐?”
“똑같아.”
사샤는 마치 불규칙적인 생활을 내버려두면 그것이 점점 번져서 나중엔 온갖 나쁜 것은 다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뭔가 반박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침이라 그런지 머리가 잘 돌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평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말문이 막히거나 지는 경우가 잘 없는 편인데, 꼭 사샤나 아나스타샤, 타티아나와 마주하면 이렇게 멍하게 되는 일이 생기곤 했다.
결국 에르네스트는 지금 대화와 전혀 관련 없는 소리를 했다.
“꼬맹이가 뭘 안다고 자꾸 귀찮게 해.”
하지만 말을 뱉고 나서도 에르네스트는 그 말에 스스로 자신이 없었다.
물론 사샤는 분명하게 지금 에르네스트를 압박할 자격이 있기도 했다.
“난 콜라를 끊어 봤거든.”
“……그래, 잘났다.”
결국 항복한 에르네스트가 몸을 일으켰고, 사샤는 그의 소매를 잡고 질질 끌고 나왔다.
뿌리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힘도 없거니와 어린 동생에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힘없이 동생에게 끌려 나와선 대충 세수만 하고 식탁에 앉았다.
그의 어머니 이자벨라가 에르네스트를 보더니 반색하며 동시에 걱정스러워했다.
“아, 나왔니? 에르네스트. 사샤가 억지로 깨웠지? 자게 두라니까 애도 참…… 말을 안 듣고.”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는 걸 잘 아는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조금 더 늦게까지 자길 바라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샤에게 핀잔이 가는 건 원치 않아서 에르네스트는 적당히 말을 끊고는 앞에 놓인 토스트를 들었다.
“덕분에 깼네요. 뭐…… 잘 먹겠습니다.”
“그래.”
차를 끓여 내놓으며 이자벨라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서 주어지는 숙제도 하기 싫어서 미루고 피하는 마당에 온갖 일들을 자처해서 도맡아 하는 아들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이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시선도 많이 받아 봤기에 별 생각 없이 음식을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이자벨라는 에르네스트가 뭔가 좀 먹고 나자 천천히 말을 걸어왔다.
“작곡은 잘 되어 가고?”
“예. 뭐…….”
“얼마 전에 마무리 지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밤을 샐 정도로 바쁘니?”
아마 일을 마치면 편해지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에르네스트가 마친 건 그저 첫 번째 완성일 뿐이었다. 그 뒤로 여러 번의 완성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 옆에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라는 무시무시한 피아니스트들이 모여서 연구하고 그의 음악을 습득하려 한다.
두 사람이 어떤 연구를 해낼지 예상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파트 또한 몇 가지 베리에이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하룻밤이 부족할 정도였다.
“마무리 지은 그대로 끝나는 게 아니라서요. 그 후로 조율해야 할 것들도 있고…….”
“그러니? 아…… 혼자서 하는 곡이 아니라 했었지?”
“네.”
“그나저나…….”
에르네스트가 연주회에 함께 초청된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세 명이서 함께 연주할 곡을 만들어 초연하려 한다는 건 이자벨라도 이미 들어서 아는 일이었다.
거기에서 이자벨라는 단지 음악가들의 일뿐만이 아니라 조금 더 사적인 부분에 대해 떠올리는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표정만 봐도 보인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러한 흥미본위의 의문에 대해선 답할 생각이 없었다.
이전부터 에르네스트는 독단적으로 음악가의 길을 고집했고,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을 누군가 터치하거나 그 의도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고집 있는 부분을 아는 이자벨라는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될 일이라 생각하는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지, 네가 잘 하겠지. 아무튼…… 먹고 나면 접시만 치워 두렴. 에르네스트.”
“네.”
에르네스트가 대답하자 이자벨라는 거실 쪽으로 향했다.
식탁에 사샤와 남게 된 에르네스트는 혼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는 주말에 공동 연구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에르네스트는 예상하고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건 비단 음악적인 부분뿐만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의 비밀을 이야기할 권리를 내기로 한 번 얻어냈다.
그러자마자 바로 타티아나를 초대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싫어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느끼는 여러 감정들.
그중 타티아나에게 향하는 일부를 아마 아나스타샤가 말하고, 또 두 사람이 그걸로 밤새 토론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식탁에 머리를 박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머리가 복잡해진 에르네스트는 결국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여자애 두 명이 나눌 대화를 예상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월요일에 학교에 가 보면 알게 될 일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꼭 알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를 붙잡고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캐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학교 쉴까.
살면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 늦잠도 못 자게 한 사샤가 얼마나 시끄러울지 생각하면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안팎으로 복잡한 에르네스트는 무슨 맛인지도 잘 느끼지 못하고 토스트와 차를 일단 입안으로 밀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