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9화
타티아나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에르네스트도 그녀가 이미 죽은 고전 예술가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다.
많은 문헌들을 접하며 연구하다 보면 이 시대에 없는 사람인데도 마치 아는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단순한 자료나 물건 등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유품을 다루는 연주자라면 시간에 관계치 않는 모종의 연결감을 느끼는 것도 가끔 있는 일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며 진지하고 아카데믹한 태도를 견지하는 타티아나는 이미 그런 흔치 않은 경험을 몇 번이나 겪은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건 그녀가 연주하는 음악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진정으로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자산들을 아끼고 이어 나가고 싶어 했다.
그런 모습만 봐 와서인지,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대중음악 가수를 알고 관심도 보인다는 사실이 조금 생경했다.
“…….”
타티아나는 친구들끼리 고전 예술이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활발하게 이야기하지만, 반대로 주제가 현대 문화로 넘어오게 되면 절로 조용해지곤 했다.
요즘 무엇이 유행하는지에 대해선 에르네스트도 어두운 편이었지만 타티아나는 그보다 훨씬 더 심했다.
현실감각이 없고 과거에만 파묻혀 있는 건 아니었다.
문화 자체에 대한 존중도 충분하고 잘 어울려 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떤 이야기를 해도 타티아나는 현재 흘러가는 시간에 관계 없이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이곤 했다.
그런데 그런 타티아나도 올리거 어쩌구 하는 가수는 아는가 보다.
‘진짜 좋아하는 건가…….’
직접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아나스타샤의 말에 부정하지도 않았으니 어느 정도 관심은 있는 게 분명했다.
에르네스트는 아까 전 스마트폰으로 찾아보았던 올리거 어쩌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유명 가수일 테니 관리를 받기야 하겠지만 그냥 무작정 한 달쯤 면도를 안 한 것 같던데. 대체 그런 스타일의 어디가 마음에 드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유명인이니 좋아하는 이유야 무엇이든 자유겠지만, 적어도 그게 얼굴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에르네스트는 그나마 타티아나가 관심을 가질 만한 한 가지 요소를 떠올렸다.
‘노래는 좀 하나 본데…….’
어차피 그 애가 진짜로 관심 있어 하는 건 클래식 음악.
그중에서도 피아노 소리일 테니 노래 같은 건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곤 있었지만,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그쪽으로 신경이 쓰이는 것을 느꼈다.
가끔 새 음반 이야기를 하더라도 전부 클래식 음반이었던 타티아나가 다른 신곡 이야기를 하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
옆을 슥 보니 타티아나는 혼자서 무언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수업 시작 전에 예습을 하는 습관은 수석인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 모습을 본받아 에르네스트도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였는데, 지금 이 상태로는 신경이 쓰여서 공부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호기심에 진 에르네스트는 이어폰을 꺼냈다. 타티아나가 맞춰 준 커스텀 이어폰이었다.
그녀가 선물해 준 물건으로 쓸데없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이것도 일종의 참고 학습이라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으로 올리거 어쩌구의 신곡을 재생시켰다.
“…….”
평소 잘 듣지 않는 장르이지만 그의 숙련된 음악가로서의 기술은 순식간에 화성들을 분리하고 요소들을 정리해냈다.
단조의 조성으로 극적인 뉘앙스를 연출해 내는 세레나데는 꽤 괜찮은 음악성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특이하진 않았다. 타티아나가 딱히 흥미를 보일 법한 구성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곡이 아니라 가사에 있었다.
결혼 후에 발표한 곡이라 했는데, 그럼에도 몇 번이나 사랑을 말하며 당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노래하는 가사는 좋게 말하면 낭만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극단적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걸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곡은 물론이고 가사도 타티아나가 좋아할 스타일이 아니었다.
타티아나의 취향에 대해선 아직도 모를 부분이 많았지만, 적어도 음악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기준을 느끼고 있는 에르네스트로선 그 점에 대해서 확신이 있었다.
조금 위험한 일만 해도 깜짝 놀라곤 하는 그 애가 이렇게 극단적인 가사에서 호소력을 느꼈을 것 같진 않았다.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문화부 장관을 앞에 두고 했던 퀸텟과의 리허설 대결에서 에르네스트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을 때 타티아나의 도움으로 수습했던 적이 있었다.
정말 죽다 살아난 기분이라서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소원권이라면서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농담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타티아나는 기겁하면서 그런 농담은 하지 말라고 화를 냈었다.
그렇게 보면 이 올리거 어쩌구 하는 가수보다 내가 먼저 말한 건가?
아무튼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타티아나가 이 가수를 좋아한다는 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상한 건 내 쪽인가…….’
결론을 내린 건 좋은데, 에르네스트는 스스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되짚어보고는 이어폰을 내려놓고 책상 위로 엎드렸다.
타티아나가 했던 한마디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방금까지만 해도 잘 몰랐던 가수에게 일종의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가수는 좋아한다는 건 어떤 음악가를 좋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친구가 어떤 가수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 그 취향 자체를 놓고 따지고 들 순 있어도 이렇게 이기고 싶다는 감정을 느끼는 건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이것도 음악가로서의 본능과 비슷한 무언가란 생각이 들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조차도 믿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어제부터 쭉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나스타샤가 분명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란 예감.
그리고 만약 그녀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타티아나에게서도 분명 반응이 있을 거란 생각 등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주말부터 지금까지 계속 편안하게 있질 못했다.
타티아나가 만약 갑자기 에르네스트에게 직구로 그의 마음에 대한 질문이라도 던져 오면 그에 걸맞은 대응을 할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어제 연습을 할 때도 그는 계속 의구심을 가졌다.
타티아나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단지 그가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타티아나가 강하게 동요를 보였다면 아마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연주했던 음악이나 그 후의 태도를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타티아나와 친구일 뿐이었다.
그건 그로 하여금 한숨 돌릴 수 있게 해 주다가도, 조금 예민하게 만들었다.
‘한심하네.’
아침부터 복잡한 생각으로 머리가 아픈 에르네스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1년 안으로 다가온 콩쿠르와 그보다 훨씬 더 빠르게 코앞에 닥칠 연주회가 일단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거기에 대해서 좋은 결과를 내고 싶은 마음은 에르네스트도 컸지만 타티아나의 마음 역시 굉장히 진지하고 무거웠다.
그는 지금 스스로도 준비가 안 된 이 상황에서 타티아나에게 다른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봤자 백 퍼센트 미뤄질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나스타샤의 일도 에르네스트에겐 문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기에 에르네스트는 되도록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결과를 내고자 했다.
아나스타샤가 정당한 대결을 원하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실력 대결은 대결대로 에르네스트와 맞붙고 싶어 하면서도 타티아나가 이 상황을 인지하는 일 자체는 앞당기고 싶어 했다.
직관이 좋고 머리 회전이 빠른 그녀가 대체 어떤 그림을 그리는 건지 에르네스트는 잘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거기에 동의하진 않았다.
콩쿠르나 연주회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없다 하더라도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템포를 흔들어 빠르게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기준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
다시 한번 생각을 공고히 한 에르네스트는 교과서를 펼쳤다.
일단 다 잊자. 오늘 들었던 이야기들에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피아노 연주자인 그에게 있어선 별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 타티아나를 대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오전 수업을 마주했다.
그리고 오전 내내 올리거 리보비치 코롤레프의 신곡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기절 직전에 이르렀다.
‘……조퇴할까.’
심리학에선 어떤 사람에게 특정 생각을 강요하려면 그 생각을 절대 하지 말라고 하면 된다고 한다.
에르네스트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지금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올리거 어쩌구 하는 가수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타티아나가 좋아하는 여러 음악가들 중 하나로 여기고 그냥 넘어가려고 해도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저 그뿐이었다면 상관없었을 텐데, 호기심을 못 참고 들었던 신곡이 문제였다.
활자보다 훨씬 많은 정보량을 지닌 음악이 머릿속에 파고들자 그건 쉽게 지워 버리기도 어려웠다.
워낙에 기억력과 분석력이 좋은 에르네스트에겐 단 한 번만으로도 충분했다.
수업 내내 에르네스트는 그보다 좋은 멜로디와 베리에이션을 떠올리며 골치가 아파야 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그럴싸한 것들이 생각났다.
물론 현대 팝 음악의 흐름에 대해 잘 모르는 에르네스트가 할 수 있는 건 클래시컬한 변화였지만, 그래서 더 엉망진창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자신의 머릿속이 웃기기도 했고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
그냥 집에 가서 자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누워도 계속 생각날 것 같았고 잔다고 해결될지도 의문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음악적 영감과 마주했을 때 의지로 이겨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럴 때 해답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피아노와 오선지를 쥐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마주해 보는 것이었다.
오늘 이후론 영영 떠올릴 일 없을 거라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도 하지 않고 그가 향한 곳은 연습실이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피아노 앞에 앉은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솔직히 이 음악을 그리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잠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더 나은 진행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생각이 맴도는 건 그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타티아나가 좋아하는 음악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곡이라면 에르네스트는 피아노로 연주해 줄 생각이 있었다.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사실 그 어떤 곡이든 상관없었다.
물론 이건 클래식 음악이 아니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을 고치고 나니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생각해 보고는 건반 덮개를 열었다.
“…….”
팝 음악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아주 어릴 적 청음으로 듣고 장난삼아 유명 곡들을 몇 번 연주했었던 기억이 났다.
나이를 먹고 작곡까지 배운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건반을 짚었다.
처음 시작은 최대한 원곡에 가깝도록 드럼 소리와 베이스 그리고 일렉트릭까지 거의 다 표현하다가, 천천히 멜로디 라인만을 남기고 나머지들을 넓게 흩뿌려 보다 단단한 배경으로 이룬다.
순식간에 느낌이 마치 클래식 음악처럼 변화한다.
약간 프랑스식의 느낌을 가미하면 좋을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는 살짝 더 화성을 펼치고 유려하게 표현해냈다.
작곡가인 그는 세상 어떤 음악이든 피아노 한 대만 있다면 클래시컬하게 꾸며낼 수 있었다.
그렇게 기본 틀을 잡은 에르네스트는 이제 자신이 생각하는 조금 더 좋은 진행을 덧붙여나가면서 곡을 변주했다.
당연히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그의 음악엔 가사에 섞인 주제도 섞여 들어간다.
이렇게 잠깐 고쳐서 연주해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계속 생각났던 건가.
그는 이걸 타티아나에게 들려주면 어떨까 0.1초 정도 생각했다가 바로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이미 음반까지 선물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았다.
짧은 즉석 편곡을 마치고 손을 놓은 에르네스트는 일단 여기서 그치고 적당히 할 만큼 했으니 이젠 정말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다행히 현실로 음악을 한 번 옮겨 놓은 덕분인지 머릿속은 잠잠해져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곧장 연습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타티아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세상을 원망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