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4화
막 잠에서 깨자마자 타티아나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에르네스트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 누구라도 상관 없었지만 타티아나 앞에서만큼은 조심했었어야 했다.
“…….”
타티아나는 무언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에르네스트의 성격을 상당히 깊게 파악하고 있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타티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기념 음반 말씀이신가요?”
이상한 소리를 들어도 다시 확인하는게 타티아나다웠다.
여기서 슬쩍 그냥 말하지 않은 것으로 친다면 그녀 역시 슬쩍 넘어가 주겠지 싶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방법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 카페에서 아나스타샤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나스타샤는 연주회를 꼭 성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거기에 거짓은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을 편하게 해 달라 말했다.
그냥 기념 음반을 내는 쪽이 모든 것이 편하게 되는 길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개가 짙게 낀 그 내면을 다 들여다볼 순 없었다.
하지만 만약 어느 하나 아나스타샤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에르네스트는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이해한다면서 큰 무대로 끌어내려던 것도, 동등하게 여기기만 하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도.
어느 하나 아나스타샤가 원하지 않았던 위선에 가까운 행위들이었다.
물론 그녀가 먼저 일방적인 경쟁심을 보이고 있었음을 느꼈기에 거기에 응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일들이었지만, 최소한 먼저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했다.
입 다물고 있다가 모두 벌이고 나서 어떻냐고 물어볼 것이 아니라.
이게 맞는 걸까.
이제 와서 아나스타샤의 말을 신경 쓰는 것 또한 위선이지 않을까.
여러 가지 고민들을 놓고 생각하던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념 음반에 대한 이야기. 그는 일단 언제라도 발을 뺄 수 있도록 잘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아주 못할 일도 아닌 것 같아서.”
“왜 생각이 바뀌셨죠? 쉽게 바뀔 변덕이 아니라 지론을 따르신 거라 보았는데.”
타티아나는 이상한 소리에도 무시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대해 주는 편이지만, 일관성 없이 흔들릴 때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머뭇거리지 않는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했다.
“그게 내 지론은 맞는데…… 네 지론은 아니잖아? 난 네가 연주회에서 최대한 많은 앙코르를 하길 바란다는 걸 알아. 음반은 그걸 대체하기에 좋은 기념품이고. 그런데 어젠 네 의견은 거의 묻지 않고 내 멋대로 결정한 것 같아서.”
“…….”
스스로 들어도 변명이나 핑계같이 들리는 이유였다. 당연히 아나스타샤의 말을 듣고 급조해 낸 이유니 그리 들릴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의견을 생각해 준다는 말에도 그리 기뻐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는 걸 벌써 눈치차린 듯하다.
대부분 사람들의 말을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그녀에게도 이런 붕 뜬 이야기는 진실성이 없다고 보이는 모양이다.
무언가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타티아나가 바라본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지 지금 오가는 이야기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그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에까지 의문을 품는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만약 그 이유가 합당하다면 모른 척하고 웃으며 동조해 줄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에르네스트로선 이유가 절대 밝혀져선 안 된다.
입을 다물고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진지하게 같이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가볍게 물어본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해나갔다.
짧은 탐색전이 지나가고, 타티아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곧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전 분명 욕심이 많은 사람이고, 다른 분들 역시 제가 욕심을 내 주길 바라고 있었죠. 저도 알아요.”
“그렇다면…….”
“하지만 이번 결정은 에르네스트에게 맡겼잖아요? 그걸로 괜찮아요.”
정말 다른 생각은 전혀 없는지 타티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제 있었던 회의 상황이 떠올랐다.
에르네스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타티아나는 그의 대답을 앞질러 예측하고는 거기에 동조해 주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해 주는 건 정말 의지가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음악을 전하는 걸 좋아하고 청중들에게 헌신적인 타티아나가 두말없이 그렇게 동의해 주었는지에 대해서 에르네스트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무의식중에 의문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자기도 모르게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왜?”
“제가 누구 말을 듣겠어요? 파트너의 말을 들어주어야죠.”
타티아나는 당연하지 않냐는 듯 웃었다.
뭔가 그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에르네스트는 할 말을 잃었다.
타티아나는 정말로 단순히 그를 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무어라 말을 돌려주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제 와서 고맙다고 하는 건 너무 바보 같고 미안하다고 하는 건 뻔뻔하다.
그런 이유로 고민하고 있는데, 타티아나는 그의 생각을 툭 잘라먹듯 덧붙였다.
“그, 이상한 뜻이 아니라 음악가로서요.”
“?”
“설명을 듣고 납득했으면 응당 협조해 주어야 한단 말이에요. 이해하셨나요?”
갑자기 괜한 소리를 덧붙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반응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금 타티아나가 아나스타샤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었을지 그는 아직도 잘 모른다.
만약 에르네스트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금 이건 선을 긋는 발언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먼저 선을 넘어왔다는 자각을 했기에 급히 수습하는 중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로선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는 타티아나가 곤란해하지 않길 바랐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
“……다행이네요. 제가 달리 의견을 내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어요.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정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안 되겠어?”
“알렉산드라의 말대로 몇백 장만 음반을 만들더라도 기념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도록 마스터링과 디자인, 패키징까지 고려하면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말 일주일도 안 되어요.”
에우테르페 레코즈의 마카로프와 친하게 지내며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기도 한 타티아나는 음반 제작에 대해서도 실무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녹음만 마친다고 뚝딱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아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꽤 진지하게 시간을 따져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르네스트는 괜히 고민을 길게 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너도 아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진 않지?”
“예?”
“그러니까 지금 고민 중인 거잖아.”
타티아나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만약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면 그녀가 판단을 내리는 데엔 1초도 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몇 초가 되도록 시간을 앞뒤로 짜 맞추어 보며 주어진 조건들을 확인하고 계산하고 있었고, 그 말인즉슨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분명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고민한다는 것 자체를 바로 가능성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는지 허를 찔린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타티아나는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
갑자기 엉뚱한 변덕처럼 알렉산드라의 계획대로 기념 음반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고 묻는 에르네스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윽고 타티아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은 피아노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실험해 볼까요?”
“실험이라니? 지금?”
“예. 직접 가늠해 보죠.”
현실주의자인 그녀는 말만 앞서지 않는다.
무거운 피아노를 다루는 피아니스트들에게 있어서 시간 내에 현실에 실현시키지 못하는 이상은 무의미한 것이다.
타티아나가 이렇게 다짜고짜 연주로 결정 내려는 걸 보고도 에르네스트는 그리 당황하진 않았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이젠 발을 빼기에도 늦었다.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티아나가 물었다.
“어떤 곡으로…… 가장 최근 했던 곡은 어떠신가요?”
“뭐였지?”
“……벌써 불안해지는데요? 폴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예요.”
진짜 아무 생각 없는 것 아니냐는 듯 흘겨보던 타티아나는 어차피 피아노를 앞에 두고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고개를 돌렸다.
마법사의 제자.
저번 겨울에 했었던 송년 연주회에서 두 사람이 했었던 듀엣곡이었다.
1년도 안 된 곡이라 원래대로였다면 바로 완전하게 기억할 수 있어야 했지만, 그 혼자 하는 독주곡이 아니라서 두 개의 선율이 뒤섞이기도 했고, 그간 작곡을 하면서 접해 온 너무 많은 선율들이 에르네스트의 기억을 방해하기도 했다.
“악보 기억나?”
“잠깐 봐야 할 것 같아요.”
“나도 찾아볼게.”
에르네스트는 스마트폰으로 악보 파일을 찾아냈고, 타티아나 역시 태블릿 컴퓨터를 꺼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각자 전자기기로 악보를 확인했다.
말없이 옅은 숨소리만 들려온다.
악보를 살피던 에르네스트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타티아나는 다리를 꼬거나 몸이 비틀어지게 앉지 않고 똑바로 앉아 악보에 집중하고 있었다.
단지 잊은 악보를 되짚어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창 이 곡에 집중하던 시기의 기분을 그대로 되살려내는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딴생각하다간 망신당하겠는데.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덤벙거리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집중했고, 곧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되었나요?”
“일단 해 볼까.”
완전하진 못하지만 연주를 해 보면 기억날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노를 보고 바로 앉았다. 옆을 살짝 보니 타티아나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동시에 건반을 터치했다.
“…….”
아련하게 멀리에서 들려오는 선율. 그건 오랜만에 듣는데도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기억 속에 있는 이 곡의 레퍼런스는 무대에서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이 곡을 같이 연습했던 적이 없다.
당연히 연주는 살짝 빛이 바랐다. 음색 간의 차이는 부조화를 일으키고 리듬이 어긋나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귀로 들리는 것들에 집중하며 다시 자신의 손을 맞추어나갔고, 타티아나 역시 지금 뒤떨어진 퀄리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열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피아노는 점점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의문이 서려 있던 음색은 확신을 지니기 시작하고, 선율은 보다 자신감 있게 내달린다.
그 자신감에 힘을 얻은 반대편의 선율 역시 정확한 타이밍에 맞추어 따라오며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이 정도까지……?’
그 전 무대에서 보였던 연주의 퀄리티엔 미치지 못했다. 빈틈이 너무 많다. 결코 녹음을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빈틈의 일부는 두 사람이 그간 함께 음악을 교류하면서 쌓아올린 경험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미처 몰랐다가 이제 알게 된 부분들이 가미되면서 색다른 길을 열어 보인 것이다.
그건 미숙함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의 발견이었다.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는 수개월 전의 두 사람과는 또 다른 지평에 손을 뻗을 수 있게 되었다.
빠르게 연주를 이어 나가면서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있는 건 언제나 그렇듯 타티아나였다.
“…….”
10분 남짓의 연주를 마친 에르네스트는 손을 놓자마자 생각을 정리했다. 역시 이렇게 실제로 해 보고 판단하는 쪽이 나았다.
“이건…….”
“나쁘진 않아요. 나쁘진 않은데…….”
타티아나도 연주 중에 든 생각들이 있는지 중얼거렸다. 에르네스트는 그녀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물었다.
“시간을 들여서 연구를 할 필요가 있겠어. 그렇지?”
“예. 단기간에 기록으로 남길 곡은 아니네요.”
지금 보이는 퀄리티는 많이 떨어지지만 그걸 보완하고 완성도를 끌어 올린다면 분명 저번에 무대에서 했던 것보다 더 나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비슷한 생각을 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다른 곡도 더 확인해 보시겠어요?”
“아니, 현실적으로 쉽지 않겠다는 것만 다시 알게 되었네.”
아마 다른 곡도 똑같겠지.
같은 길을 걸어 온 두 사람은 그사이 서로의 음악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함께 더 많은 시너지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다시 그 끝을 보기까진 연습이 필요하다.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다고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분명한 확신이 들어서 에르네스트는 이 이상 녹음을 생각하진 않기로 했다.
만약 필요하다면 따로 그녀와 다른 곳에서 음반을 만드는 쪽이 나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타티아나가 음반 자체를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지금 반대하는 데엔 그런 이유도 있는 거 아닌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에게 물었다.
“우린 할 만큼 해 봤으니까 다음엔 제대로 알렉산드라에게 말해야겠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그래야겠네요.”
“내가 괜히 일 벌이자고 했는데, 안 되어서 기쁜 것 아냐?”
“……제가 왜 기뻐해야 하죠?”
타티아나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시간이 부족한 게 아쉬운걸요.”
시간만 있었다면 진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에르네스트는 아무런 아쉬움을 느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