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05화 (805/1,277)

##  805화

짧은 연주로 확인하고 나자 보다 뚜렷해졌다.

타티아나는 이 상황에 결론을 내리듯 이야기했다.

“어쨌든 전 여러 이유로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겠네.”

“그리고 모두의 앞에서 그렇게 분명하게 의사표시를 하셨는데 갑자기 말을 바꾸면 에르네스트의 입장이 우스워져요.”

그런데 타티아나가 기념 음반에 반대하는 건 단지 음악에 관한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기념 음반을 녹음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면 다음 회의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알렉산드라에게 연락해서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어제 당당하게 이야기했던 에르네스트가 하루 만에 생각을 바꾸는 상황이 된다.

단순한 사정을 이유로 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론 그 자체를 논리로 내세웠던지라, 이제 와서 바꾸는 건 확실히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다.

왜 생각이 바뀌였는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난감했다.

애초에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 때문에 말을 꺼내 본 것뿐이지 자신의 논리를 바꿀 생각은 전혀 없기도 했고.

아무튼 타티아나는 그의 평가마저 생각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만큼 에르네스트는 스스로가 조금 한심하게 느껴져서 웃으며 말했다.

“오늘 우습게 보였나 보네.”

“제, 제가 그렇게 본다는 게 아니라. 다른 분들이요.”

타티아나는 얼른 변명하듯 이야기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그리 말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건 지극히 현실적인 걱정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새삼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타티아나는 세상 모든 음악가들을 마치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무턱대고 이상주의자처럼 낭만적인 이야기만을 하지도 않았다.

종종 그녀는 현실과 유리되어 붕 뜬 것 같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그건 현실을 모르고 순진해서가 아니라 되레 너무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불안하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녀야말로 불안해했을 것 같다.

“아냐, 내가 생각해도 우습긴 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미안.”

“자기 의사를 끝까지 관철해 나가 주세요. 제가 지지해 드릴게요.”

올곧은 눈빛이 그에게 와 닿았다.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올바른 방향으로 생각하며 나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믿음을 말로 한 것은 에르네스트를 독려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내가 어떤 의지를 내세우고 있는지 이 애가 알까.’

그는 자신의 독단으로 아나스타샤를 무대에 세우기 위해 끌어들였고, 타티아나가 우선시하는 걸 우선하겠단 이유로 이 상황을 고착화시켰다.

그리고 결국 지친 아나스타샤가 그냥 편하게 해 달라는 말을 직접 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 모든 건 에르네스트가 하고자 해서 했던 일이고 후회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던 일이다.

그런데 그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타티아나는 어렴풋이 눈치챈 것 같았다.

“…….”

에르네스트는 과분한 친구를 얻은 것에 대해 감사를 느끼면서도, 지금 아나스타샤의 상황을 안다면 타티아나가 어떤 기분을 느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결국 중요한 건 그가 실수를 이어 나가며 망치지 않고 지금부터라도 잘 해내는 일이었다.

아나스타샤와 대화도 조금 더 깊게 해 볼 필요가 있었다.

타티아나의 응원을 받고 생각을 정리한 에르네스트는 조금 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았어. 정신 차리고 있을게. 그렇지 않으면 네 지지도 없어질 테니까.”

농담처럼 한 말이었고, 타티아나가 농담을 받아 협박조로 알아서 잘 하라고 하면 웃어넘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에르네스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웃음기가 서린 따뜻한 목소리로 타티아나가 말했다.

“그땐 지지 대신 도움을 드리겠죠.”

“……뭐?”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나요?”

지지든 도움이든 비슷하게 들리지만 사실 조금 다르다.

에르네스트가 크게 잘못되지 않은 자신의 길을 알아서 찾아 걸어갈 땐 타티아나는 거기에 반대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그저 지지만을 보내 준다.

지금처럼 그건 직접적인 응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길을 잘못 들어 천방지축으로 굴면, 그땐 가로막고 멈춰 세운다.

상황 파악을 못하고 까불면 그대로 무너뜨려 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게 그녀가 줄 수 있는 도움이었다.

두 방식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같았다.

그리고 어떨 때나 힘이 되어 주겠다는 말이었다.

“…….”

아까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에게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에르네스트는 급격한 안도감에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정말 어떤 때라도 그를 버리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는 아예 지금 말해 버리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널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 에르네스트가 관철해 오던 의지에 반하는 일이고 방금 지지를 보낸 타티아나를 배신하는 일이기도 했다.

여러 모순에 복합적으로 얽매인 에르네스트는 결국 앵무새처럼 그녀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아무튼…… 알았어. 나도 네가 필요하다면 지지든 도움이든 될 테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죠.”

“??”

지금까지 부드럽게 이야기하던 타티아나가 느닷없이 고압적인 분위기로 말했다.

에르네스트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당황해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타티아나는 쿡쿡 웃더니 손을 들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을 팔랑거리듯 흔들었다.

“제겐 소원권이 있어요. 잊지 마세요.”

“수틀리면 날 강제로 부리겠다고?”

“그때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정말 어려운 요구를 할 거라 말이죠.”

혹시 슬슬 잊었나 싶었는데, 타티아나는 절대 까먹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연주회가 있으니까 잠깐 봐주고 있을 뿐이다.

연주회가 끝나면 그녀가 뭘 생각해서 요구해 올지 떠올리던 에르네스트는 자각 없이 웃고 말았다.

어려운 요구를 하겠다고 하는데도 웃고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타티아나는 특별히 화내거나 눈을 흘기지 않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분위기를 휙 전환시키듯 말했다.

“연습하죠.”

“소원권 쓴 거야?”

“아뇨? 해야 할 일을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는 타티아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음악가로서의 그녀 자신이었다.

***

별관의 연습실에서 아침 연습을 하던 난 문득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에서 내가 연주했었던 한 파트를 연습해 보기로 했다.

어제 읽어냈던 가능성의 실마리가 조금 더 분명하게 손끝에 얽혀 들어온다.

10개월 전 무대에서 그때 당시 완전했던 곡을 연주했을 때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또 다른 발전이었다.

다시 연주해 보고 있자니 조금씩 욕심이 든다.

이 곡도 에르네스트와 연습해서 완성해 낸다면 또 어떤 모습이 될까. 그건 정말 음반으로 남겨도 괜찮은 게 아닐까.

그리고 아마 내년 즈음 그와 다시 또 연주해 본다면 그때도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겠지. 앞으로 최소 2년.

그리고 아마 진학하더라도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진학할 테니 더 오래 볼 수도 있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음에 난 먹먹해짐을 느꼈다.

“…….”

하지만 일단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해야 미래도 있는 법이다.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지만 일단 하지 않기로 한 것에 대해 지금 미련을 가져 봐야 될 일도 아니다.

난 뒤카의 곡을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곤 당장 내가 맡아 책임지고 해야 하는 곡들을 다시 손에 쥐고 피아노 위로 뿌렸다.

‘생각보다 더 잘 되는 것 같아.’

한동안 연습하던 난 지금 내 실력이 정말 최고조에 올라 있음을 깨달았다.

내 잠재력을 이미 아득하게 초월해서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언제 끝을 마주하게 될지 내심 각오하는 바가 있었는데, 지금 난 정말 세상 그 어떤 곡이라도 실현시킬 수 있을 것 같단 자신감이 있었다.

작년만 해도 손가락이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해야 했던 헝가리 광시곡 2번의 기술적 난해함은 이미 극복한 지 오래다.

갈수록 난 유연해지고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건반을 누르는 속도와 힘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그야말로 음악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피조물과 다름없게 되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곡도 거의 다 암보했다.

원래부터 난 초견도 암보도 강한 편이었지만, 많은 훈련과 교육을 거친 덕분인지 그 능력들은 한층 더 강력해졌다.

이젠 정말 잠깐 스쳐 지나가듯 본 것만으로도 거의 모든 음표와 맥락을 파악하고 머릿속으로 정확하게 이상적인 음악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 그렇게 그려놓은 음악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에르네스트의 곡은 10분 남짓 했지만 상당히 복잡한 구석이 많았음에도 난 그 음악을 기억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내 파트뿐만이 아니라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의 파트 전부.

내 평가의 바늘은 내 이마를 향해 있어도 엄격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가 연주자로서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깐깐하게 스스로를 평가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 봐도 조금 기이할 정도로 내 실력은 급상승해 있었다.

이건 단지 몇 년 정도를 당겨왔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

난 다시 헝가리 광시곡의 복잡한 스케일을 한 손으로 주르륵 쳐냈다.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자각조차 별로 들지 않을 정도로, 그냥 내 의사만으로 건반을 정확하게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며 쉽게 선율이 흘러나간다.

어떻게 이 정도로 자유로워졌는진 모르겠다.

그동안 겪은 경험들이나 내가 해 온 준비들. 그리고 세연이 와 준다고 했던 것이나 미하일 선생님의 응원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

그리고 그런 것들로 내가 이만큼 강해졌다면, 그건 의아하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후회 없이 음악을 연주할 뿐이다.

한동안 연습에 몰두하며 아침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엔 곧장 식사를 했다.

오늘은 아버지도 오빠도 먼저 나가고 없어서 혼자 먹어야 했지만 때마침 오빠가 식사는 했냐고 전화를 해 주어서 외롭진 않았다.

마치 루틴처럼 아침 일과를 행하곤 학교로 향했다.

교실로 들어서서 이미 와 있는 친구들과 인사하고, 내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가 스마트폰을 만지고 무언가 하고 있다가 비스듬히 날 바라보며 웃었다.

“왔니?”

“좋은 아침이에요. 아나스타샤.”

“응. 좋은 아침.”

우린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만약 함께 하는 것이 없다면 그냥 학교 과제나 연습 아니면 다른 이야기 등을 나누었겠지만, 우린 자연스럽게 오늘 스케줄을 공유하며 이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오늘은 우리 연습 있던가?”

“예. 그랬었죠?”

“음…… 그다음엔 바로 나 퀸텟 연습하러 가야 할 것 같아.”

“시간 괜찮죠?”

“응. 괜찮아. 게오르기가 우리 사정을 우선시해 주기도 하고.”

아나스타샤는 그가 차로 데려와 주기도 한다면서 고마워했다.

편의를 봐 주는 건 감사한 일이다. 편한 시간대에 움직일 수 있으니까.

잘 되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나스타샤가 그게 다냐는 듯 물었다.

“연습은 잘 되냐고 묻지 않네?”

“물어봐 드려야 하나요?”

“아하하, 혹시 퀸텟은 어떤지 네가 걱정하진 않을까 해서 그래. 물론 잘 되고 있으니까 걱정하진 마.”

“그러리라 생각했어요.”

이미 퀸텟이 어떤 음악을 구사하는지에 대해 들어본 나는 거기에 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와 네 사람은 이미 내 걱정을 받을 정도로 무르고 모자라지 않다.

같은 무대에 서는 연주자로서 나 또한 모자람 없이 할 뿐이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또한 자신감은 갖추어져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내 표정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내가 묻지 않았던 것을 물어보았다.

“넌 어때? 타티아나.”

“저도 괜찮아요. 오늘은 아침 연습이 잘 되어서 기분이 좋네요.”

“그래?”

“예. 손도 잘 움직이고…….”

“손은 원래 잘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니니?”

“신기할 정도로 잘 움직여서요.”

“아, 그럴 때 있긴 해.”

컨디션이 특별히 좋은 날은 그렇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도 몇 번 느낀 적이 있는지 평소 안 되던 곡을 연주했었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알캉처럼 고난도의 곡들을 여럿 다루기도 해서 특히 컨디션 차이를 더 잘 느끼는 것 같았다.

곧 우린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서로 있었던 경험담 등 온갖 주제들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속에서, 난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어제 에르네스트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응? 무슨 말이야?”

“아, 그게…….”

나도 모르게 꺼낸 말이었는데 아나스타샤가 관심을 보여서 난 간략하게나마 설명해 주었다.

그녀도 같은 자리에 있었던 관계자이니 들을 자격이 있다.

에르네스트가 분명 자신의 지론대로 반대했던 기념 음반에 대해 갑자기 어제 내 의사를 물어본 것이 이상하다고 말했더니 아나스타샤는 물끄러미 날 바라보았다.

“그 애가 그랬니?”

“예. 결과적으론 안 하게 됐…….”

그리고 난 같은 자리에서 아나스타샤가 어떤 주장을 펼쳤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는 기념 음반에 대한 찬성 입장이었다.

어떠한 연관성도 사실 쉽게 붙일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까. 하지만 난 모종의 직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나스타샤. 혹시 에르네스트에게 무슨 이야기 했었나요?”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딱히 부정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듣는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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