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7화
문이 잠긴 연습실이 아니라 이곳이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 한복판이었다 하더라도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을 것 같단 기분을 느꼈다.
타티아나는 늘 미묘하게 거리감을 두는 경어를 사용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 거리를 확 좁혀 왔다.
차갑게 들리는 목소리. 이 애가 이런 목소리로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던가.
물끄러미 아나스타샤를 올려다보는 타티아나는 그전까지 알던 것과는 또 조금 다른 사람이었다.
얼마 전, 본 성격은 언제 나오냐고 물었던 것이 문득 기억났다.
타티아나는 과거 한 성격 했었음을 딱히 부정하지도 않는 편이었다.
단지 기억상실로 그 전부를 잃어버렸다가 이제 되찾았음에도 2년간의 관성을 이어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되찾은 14년의 기억이 타티아나에게 정확히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진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기억뿐만이 아니라 타티아나의 자아의 관성에도 영향을 주고 있음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있는 건 두 살의 체험을 지닌 친구가 아니었다.
“…….”
너무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런 상황까지 온 것에 대해 우울하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무어라 말도 못 하고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하던 타티아나가 곧 조용히 읊조렸다.
“장난이 아니었구나.”
차가운 목소리엔 그만큼 냉철한 통찰도 섞여 있었다. 그녀는 아나스타샤의 태도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그저 농담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아본 타티아나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차라리 시시한 장난이었다면 괜찮았겠네. 그 애도 가벼운 성격이었다면 좋았을 테고.”
만약 그랬더라면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을 거라는 듯 중얼거리던 타티아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엔 전혀 장난 같은 게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아.”
“……타티아나.”
“그런데도 계속 조금 더 가볍게, 그러면서도 깊게 만나 보라는 이유가 뭘까…….”
타티아나는 다시 옆을 보더니 아까처럼 연습실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와 태도는 무서울 정도로 서늘한데도,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에게 무작정 비난을 쏟아내지 않았다.
자신에게 위해가 될 이유가 아니라고 무조건적으로 믿는 모습이었다.
그 믿음이 느껴져서, 아나스타샤는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타티아나가 그 어떤 식으로 바뀌더라도 결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지켜보는 사이, 타티아나가 천천히 연습실을 돌아 제자리로 왔다.
그동안 생각했는지, 타티아나가 문득 물어왔다.
“그 애가 최근에 나쁜 짓이라도 했어?”
“?”
“그 애, 에르네스트 말이야. 최근이 아니라면 예전 내가 모르던 시절에 질 나쁜 일이라도 하고 다녔니? 이쪽은 조금 가능성이 있을 것 같네.”
“가, 가능성?”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여러 번 놀란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에르네스트가 나쁜 짓을 했냐고? 개인적으로 따져본다면 있기야 하지만, 사실 과거나 지금이나 그는 언제나 모범생에 가까웠다.
차라리 문제아를 꼽자면 아나스타샤 쪽이 문제아였다. 학교에서 정학당한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법을 어긴 적 없냐고 묻고 있는 게 아냐. 아나스타샤, 네 눈으로 보기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던 건?”
“……무슨 말이야?”
“성격이 안 좋다거나 습관이 나쁘다든가. 그런 것들을 알아보길 바라지 않니?”
타티아나의 결론은 단순했다.
소꿉친구인 아나스타샤만이 아는 에르네스트에 대한 어떠한 단점들이 있고, 결과적으로 그 단점들이 인간적으로 그의 점수를 깎아 놓고 있으므로 진지하게 만날 생각 말고 학창시절에 가볍게 만나 보란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 이유가 아니고서야 절대 아나스타샤가 이런 짓을 할 리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다.
지금까지 아나스타샤가 한 말로만 미루어 보면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전혀 의도한 바도 아니었고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도 적이 당황스러웠다.
경어를 내려놓고 거리감을 좁힌 타티아나는 이제 물리적인 거리도 좁혀 왔다.
두어 걸음 걸어온 타티아나는 바로 지금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았으니, 원하는 대로 해 보자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진심인가 싶어 물어보았다.
“……지금 그 애의 뒷담화를 하자고?”
“지금이니까 할 수 있지. 모처럼이니까.”
여전히 특별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타티아나는 웃기까지 했다.
얼핏 장난기마저 엿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기라도 했던 걸까.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가 에르네스트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싫어하느냐 좋아하느냐를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애초에 싫어했다면 타티아나와 가까이 하는 걸 지켜 볼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타티아나 쪽에서 먼저 뒷담화를 하자고 하니, 예상 못한 상황에 예상 못한 주제로 할 말이 바로 생각 날 리가 없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는 사이, 타티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할게. 우선 그 애는 아직도 건방져.”
“무, 켁, 콜록.”
가만히 있다가 사레가 들린 아나스타샤는 기침을 했다.
잠깐 사이 놀랄 일이 너무 많았던 탓일까. 숨이 다 막힌다.
아나스타샤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잠깐만, 타티아나?”
“내가 못 할 말 하는 건 아니지 않니? 그렇잖아. 연주회로 안 그래도 시간이 없고 바쁜데 자기 혼자 시간을 48시간쯤 쓰는 사람처럼 다 하려고 들고.”
“……하, 아하하…….”
“어제 기념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내가 불쑥 화가 났던 건 그 애가 스스로의 신념에도 어긋난 이야기를 하면서 일을 늘리려 했기 때문이었어.”
타티아나도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화를 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늘 찾으려 노력하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간 쌓인 불만이 있는지 타티아나가 푸념하듯 말했고, 아나스타샤는 일단 이대로 동조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의 편을 들어 주었다.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건 아마 나 때문일 거야.”
“누군가 살짝 부추겼다고 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그게 건방지단 거야.”
한 번 삐딱해진 타티아나는 좀처럼 되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애도 원래 고집이 세고 단호한 면이 있었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타티아나가 손바닥을 위로 펼치며 아나스타샤 쪽으로 향했다.
“네 차례야.”
“…….”
솔직히 말하자면 타티아나와 이런 이야기를 편한 어투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색했다.
아나스타샤는 절대 이런 일이 올 거라곤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순 없었다. 타티아나도 저 정도로 이야기 해 주는데, 아나스타샤도 할 말이 많다.
특히 최근 가을 연주회에 아나스타샤를 끌어들이고 멋대로 군 것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런 감정들을 섞어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 애가 좀 독선적이긴 하지.”
“맞아.”
“맞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번엔 타티아나가 에르네스트의 편을 들어 주리라 생각했는데, 타티아나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어려서부터 성공한 경험이 많아서일까, 자신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다 성공하리라 생각하고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어. 그 방향이 좋으면 자신감이겠지만 가끔은 독선이 되어 버려.”
“…….”
“예전에 내가 그 애의 계획을 한 번 망가뜨린 이후로는 좀 나아졌는데, 지금도 여전하긴 하지.”
분명 이 애, 보통 성격은 아니야.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이렇게 보니 신선한 느낌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간 종종 느끼던 타티아나에 대한 경외감이나 섬뜩함 등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간혹 알 수 없는 태도로 초인과도 같은 일을 해내지만, 그럼에도 타티아나는 열여섯 살일 뿐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약간 미소를 보이자 타티아나가 불을 지피듯 말했다.
“그 성격이 어디 가겠니?”
“아하핫.”
“다음은 어떤 이야기를 해 볼까.”
그렇게 아나스타샤는 뜻하지도 않은 에르네스트 뒷담화로 한참이나 이야기했다.
세상이 보기에 에르네스트는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겠지만,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간 말하지 않았던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쓸데없이 무뚝뚝한 척하려 한다거나, 친구도 가까운 몇 명 말고는 별로 없다던가. 사실 자승자박에 가까운 이야기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키가 최근에도 조금 큰 것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젠 척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은근히 그런다니까?”
“맞아. 맞는 것 같아.”
타티아나는 떠올려보니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맞장구를 치다가,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며 이어 물었다.
“그리고 또?”
그 목소리를 듣고, 아나스타샤는 알아 버렸다.
웃고 있는 타티아나를 보면서 아나스타샤 역시 마주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단점 같은 건 전부 상관없다고 생각하니? 타티아나.”
단점이 어떻든 간에 타티아나는 그 전부를 사랑스럽게 볼 뿐이다.
지금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이러고 있지 않았다.
뒷담화의 형태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만큼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담고 있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신중하게, 아나스타샤를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인지 타티아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아마도.”
“아마도라니?”
“그 애와 사귀어 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일도 많을 테니까.”
겨우 2년 친구로 만나서는 알 수 있는 것들이 적다. 타티아나도 그 정도는 안다.
그러나 이곳의 학생들에겐 대화나 행동 말고도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피아노로 마주하고 있으면 지금 말한 이야기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어.”
“…….”
“진지하고 멋진 사람이니까. 그는.”
성급한 부분이 씻겨 내려간 에르네스트는 훨씬 차분하고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생각도 깊고 멀리 보며 현재를 준비한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부분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네가 제대로 봤어. 그 애만큼 괜찮은 애를 찾기도 어렵지.”
“예전에 내가 처음 물어봤을 때도 네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그랬던가? 그랬겠지.”
능력도 출중하고 성격도 괜찮고. 얼굴도 훌륭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 본다면 사실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가볍게 사귀어 보는 건 아깝지. 그 애랑은.”
그렇게 아나스타샤가 말을 맺자, 타티아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약간 즐거움을 느끼던 미소는 싹 사라지고 다시 냉정한 변호사의 얼굴을 한다. 그 목소리에도 진지함이 깃들었다.
“그럼 잘못도 없는 그 애를 왜 괴롭히려는 거야? 날 이용하면서까지.”
아나스타샤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말대로였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면 모를까, 지금 보이는 대로면 타티아나가 이해한 바대로였다.
허탈한 목소리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렇게 들으니까 정말 최악이네.”
“내가 오해하는 거라면…… 물론 그렇겠지만, 그 오해를 풀어 줬으면 해. 부탁이야.”
타티아나는 비단 에르네스트를 변호하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나스타샤 또한 변호하고 싶어 했다.
어느새 보다 가까이 다가온 타티아나의 눈가는 막 울 것 같아 보였다.
어떻게든 강하게 맞대응하고 있지만, 지금 그녀는 정말로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막 떨궜을 때였다.
누가 잠겨 있는 연습실 문손잡이를 잡고는 덜컹덜컹 하고 흔들었다. 그러더니 성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뭐야 이거. 안에 누구냐. 문 안 열어?”
깜짝 놀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얼른 타티아나가 잠긴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밖에는 남자 선생님 한 분이 서 계셨다.
피아노과의 담당이 아니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수업을 곧 앞두고 복도를 돌아보다가 이곳을 발견한 것 같았다.
여학생 두 명이 있는 걸 본 눈빛은 곧 별일 아니겠거니 싶었는지 조금 풀어졌지만, 그래도 짐짓 성난 목소리로 선생님이 말했다.
“너희 뭐 하고 있지? 곧 수업 시작이야. 반으로 돌아가.”
“잠시 이야기 중이었어요.”
“잡담은 교실에서 하고. 여긴 연습실이야. 피아노를 치지 않을 것이라면 나가라. 어서.”
교칙대로의 정론이었다.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어서 나가려고 아나스타샤가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타티아나가 그 앞을 살짝 가로막듯 서며 말했다.
“방금 연습했던 곡에 대해 연습할 부분이 있어서요.”
“곡은 무슨 곡? 듣자하니 아무것도 치지 않던데.”
“이런 곡이에요.”
그녀는 곡 이름을 대지도 않고 그대로 휙 돌아서선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갑자기 연주를 하려고 하니 선생님의 표정은 황당하다는 듯 변했지만, 곧 이어지는 타티아나의 연주에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
타티아나는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파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실력은 저번에 봤을 때보다도 훨씬 더 깔끔하게 수준이 높아져 있었다.
이 곡을 잘 모르는 그 누가 듣더라도 타티아나가 보통 실력이 아님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건 선생님의 귀에도 똑같이 들릴 터.
겨우 30초 정도 이어진 연주를 마치고 타티아나가 일어서자 선생님은 무언가에 홀렸다가 정신을 차린 것처럼 짧게 고개를 흔들더니 아까 전처럼 혼내는 것이 아닌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업을 빼고 자율연습을 할 생각이라면 지금 말하면 들어주마.”
“예?”
“선생님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 아니냐.”
연주자만이 느낄 영감이 불현듯 찾아왔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습득해낼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도와주겠단 의미였다.
그렇게 자신의 연주가 성공했음을 확인하고도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앞으로…… 3분 정도이니까. 금방 돌아갈게요.”
“…….”
그러고도 무언가 아쉬운지 선생님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습실 문을 닫고 다시 나갔다.
아나스타샤는 지금까지 학교에 다니면서도 이런 일은 처음 보았다.
연습실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걸리면 보통 바로 쫓겨나는 게 일반적인 일이다.
타티아나처럼 대응하는 학생은 사상 최초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삐딱하게 보고 있을 선생님을 음악으로 납득시킨다는 건 절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혹시 마법 같은 거 건 것 아니지?”
“농담하지 마세요…….”
방금 전 일로 무언가 자각이 들었는지 타티아나의 어투는 다시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약간 섭섭함을 느끼면서도, 아까 전처럼 하지 않느냐고 묻지 못했다.
그게 장난처럼 바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엔 말이 없었다.
타티아나도 여러모로 고민하는지 잠시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저와 이야기하기 힘들죠. 아나스타샤.”
“응? 아니야. 괜찮아.”
“미안해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한다던가.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한다던가. 여러모로 이 애와 있다 보면 정말 놀랄 일이 많았다.
타티아나는 평범한 대화를 하기에 좋은 친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이미 그런 그녀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사과해야 할 건 따로 있었다.
“나야말로 미안해. 네가 느끼는 오해…… 그걸 내가 만들었잖아.”
갑자기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에 타티아나가 자신의 오해에 대해 한 말은 아나스타샤의 가슴에 가시처럼 깊게 박혀들었다.
절대 그런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변명처럼 들리지 않길 바라면서 아나스타샤는 이야기했다.
“고의는 아니었어. 정말로. 난 너도 에르네스트도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아. 진심이야.”
“다행이에요.”
“난 다만 그저…….”
다음으로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타티아나는 지금 자신이 에르네스트를 낙담시킬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설픈 핑계를 지어 내어서 이해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럴 방법도 없었고, 자신도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느끼는 이 죄책감이 더 심해진다면 정말 스스로를 증오하게 될 것만 같았다.
타티아나는 참을성 있게 아나스타샤의 말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에르네스트의 단점들도 모두 상관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아나스타샤의 단점들 역시 타티아나는 잘 알고도 상관없다고 말해 줄 사람이었다.
차라리 솔직해져 보라던 에르네스트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도 아나스타샤를 이끌었다.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 해 봐도 되니?”
“……?”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나 저 얼굴이 일그러진다면 아나스타샤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을 거란 신뢰로, 아나스타샤는 천천히 말했다.
“아까 말한 실험삼아 사귀어 보란 이야기…… 그럼 그 애가 아니라 난 어때?”
의문을 느끼는 표정은 한순간뿐이었다. 타티아나는 크게 놀라지도 않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이상한 이야기인가요?”
“이상한 의미니까.”
“…….”
마치 고요한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가 아나스타샤를 직시한다.
그 표면에 약간 파문이 일긴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나스타샤는 마음의 안도를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