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7화
아나스타샤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그녀는 내 말에 토를 달거나 의심하지 않고 잘 들어주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모른 척하고 무작정 따라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특히 내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더더욱 그러했다.
아나스타샤는 내 결정에 영향을 미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빠르게 파악해 냈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에르네스트가 하라고 그랬니?”
“아뇨, 제가 생각해 보고 가능성을 타진해 본 후에 내린 결정이에요.”
혹시나 그녀가 에르네스트를 오해할까 싶어서 난 다시 한번 못 박듯 이야기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다시 말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게 에르네스트잖니?”
“…….”
그녀의 확신엔 흔들림이 없었다. 사실이기도 했고.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에르네스트의 사고로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내겐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구세프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도 대들면서 쏘아붙이듯 말했을 정도였다.
때문에 다시 내게 활동을 권유할 수 있는 건 당사자인 에르네스트뿐이었다.
난 심지어 그에게도 목소리를 높이긴 했지만…… 적어도 그의 이야기가 내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순 없었다.
당분간 활동을 접고 곁을 지키기로 한 날 두고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그냥 그렇게 되어 버렸겠지.
하지만 그는 곡까지 써서 멀리 날 보내려 했다.
나 혼자선 절대 이렇게 빠르게 복귀할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
“맞아요.”
“……정말.”
아나스타샤는 중얼거리며 복잡한 표정을 했다.
그에게 짜증을 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잘했다고 반길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앓는 소리를 내며 그녀는 테이블을 손으로 쳤다.
“정말, 정말로 이해가 안 가. 그 애는 왜 이렇게 어려운 길만 골라서 가려는 걸까…….”
막상 어려운 길을 종용당한 건 나인데도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말했다.
그건 그녀가 이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나스타샤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도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정당하게 대하려 했다.
사고를 당하고 난 뒤에도 내게 문제되지 않으려 했고.
그건 그가 지닌 오롯한 자존심이기도 했고 한층 견고해진 성숙함이기도 했다.
난 사실 차라리 에르네스트가 쉬운 길을 택했으면 하는 바람마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그는 고집이 센 편이었다. 나만큼이나.
“…….”
혼자서 중얼거리던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걸 받아 준 너도 이해가 안 가.”
“사실 혼자 내린 결정은 아니에요.”
“……무슨 소리니?”
“세연이 저희 집에 와 있어요.”
“세연? 세연 임 말이야?”
깜짝 놀라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난 다시 그녀의 맞은편 자리로 돌아가선 며칠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해 주었다.
연주회 관람을 위해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는 것부터 난해하다는 표정을 짓던 아나스타샤는 그걸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왔다는 이야기까지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와……? 이해 못 할 애가 한 명 더 늘었네.”
그런 그녀를 보며 난 미소를 지었다.
말이나 행동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져 오고 있었던 까닭이다.
난 조금 얌전해진 아나스타샤에게 넌지시 이야기했다.
“세 명이나 이해가 안 간다고 하신다면, 반대로 아나스타샤 스스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떤가요?”
“……예리하네 타티아나. 나도 방금 그 생각 중이었는데.”
아나스타샤가 연주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생각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녀는 자존감이 굉장히 떨어져 있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 연주회는 해야 한다고 하는 너희들이 이상한 걸까 아니면 내가 무책임하고 무기력한 걸까…….”
그녀가 잘못된 건 아니었다.
그만큼 너무나 큰 사고가 우리에게 닥쳤을 뿐이다.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라 생각하진 않아요. 사실은 저도 아나스타샤와 같은 입장이었고.”
“그래, 그랬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두 사람에게 설득당한 거니?”
“설득이라기보단…….”
연주자가 무대에 올라가는 일은 누군가 일방적으로 설득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두 사람의 이야기에 결국 마음을 바꿀 수 있었던 건, 스스로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전 제가 멍하니 배회하면서 누군가 발을 걸어 넘어뜨려 주길 기다리는 중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직 여력이 남아 숨 쉬며 움직이고 있지만, 분명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불안함은 날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난 차라리 쓰러져서 꼼짝도 못하는 채로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세연은 내가 그럼에도 서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 본질은 결국 누군가 제 등을 툭 밀었을 때, 저도 모르게 균형을 잡고 마는 데에 있었죠.”
“…….”
“제가 정말 그럴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어졌어요.”
그냥 넘어져 버리지 못하고 내 무의식은 크게 발을 내디뎠다.
무대에 서 보자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에 가득 찼을 때, 난 그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차라리 무너지더라도 무대 위에서 무너져야 한다. 그것이 내게 남은 마지막 각오에 가까웠다.
“…….”
내가 여러 용기와 의욕을 얻어 여기까지 와 있지만 그럼에도 오로지 낙천적이고 밝은 생각만으로 앞을 보고 있진 못하다는 걸 깨달은 아나스타샤는 문득 안쓰럽다는 눈빛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날 긍정하는 목소리를 내어 준다.
“그게 네 프로페셔널리즘이야. 타티아나.”
과연 그런 걸까. 내가 정말 프로의식이 투철한 사람이었다면 구세프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고민하지 않고 무대에 오르려 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옳은가 싶으면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심정이다.
여전히 이것저것 복잡한 마음만이 가득하다. 난 그저 알아보고 싶을 뿐이다.
다만, 이 이야기를 하면서 혹여나 아나스타샤가 날 그저 피아노에 미친 광인으로 보진 않을까 걱정했던 마음은 조금 씻어졌다.
그녀는 내가 무엇을 쥐고 알아보려 무대에 서려고 하는지 이해해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지금 바로 이해하긴 어려워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노력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난 기뻤다.
물론 연주회를 진행해 보겠다는 내 이야기를 아나스타샤가 일단 받아들이고 존중하기로 했다고 해서 무조건 지지해주는 건 아니었다.
곧바로 현실적인 이야기를 짚고 들어온다.
“그래도……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다른 피아니스트를 구하기라도 할 거야? 아니잖니?”
“그건 어렵겠죠.”
“어떻게 하려고 그래……?”
피아노 연주자 한 명이 빠지고 두 명이 남았다고 해서 2/3어치의 역량이 남아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없으면 우리는 연주회의 서곡도 연주할 수 없고 내 듀엣 레퍼토리도 모조리 쓸 수 없다.
1부의 퀸텟 연주를 제외한 모든 프로그램이 무산되는 것이다.
이 엄청난 책임을 이제 와서 다른 누군가에게 돌릴 순 없었다.
만약 진행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무게가 내게 몰리게 될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걱정이라는 듯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그런데 그녀가 마저 묻기 전에 문이 열리며 빅토르가 들어왔다.
한 손에 든 트레이엔 음료가 든 컵과 디저트 등이 올라가 있었다.
“음료 가지고 왔습니다. 아가씨.”
파인다이닝의 웨이터처럼 절도 있는 태도였지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영 어색하다.
우리가 떨떠름하게 바라봐도 빅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척척 다가오더니 우리 테이블 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우리 앞에 각자 놓은 오렌지 주스는 정말 뭔가 싶다.
적당히 부탁한다고 하긴 했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
사실 별것 아닌 일이긴 한데, 나름대로 심각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차려진 메뉴가 너무 깜찍하다 보니 아나스타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풍선을 바늘로 콕 찌르듯 그녀에게 물었다.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들 메뉴 같죠?”
“나, 나도 지금 똑같은 생각 했어.”
“빅토르가 너무하네요.”
“그러게 말이야.”
다 들으라는 투로 소곤거려도 빅토르는 입꼬리도 꿈틀거리지 않았다.
이 장난의 마무리는 그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는 걸 그는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개입하려 들지 않고 우릴 내버려 두는 편이 그로서는 더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빅토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 주려 했다.
이전에 세연을 집으로 그냥 데리고 왔을 때처럼, 그는 그게 내게 도움이 되리란 확신을 지니고 있었고, 그럼에도 내가 진정으로 싫어하지 않고 이해해 주리란 걸 믿고 있었다.
이런 사람 앞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맙다는 뜻으로 웃으며 오렌지 주스 한 모금으로 입술을 축이고 나자 빅토르가 이야기했다.
“그리고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가씨. 방금 전 연주회 관계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내 공적인 부분에 대한 연락은 대부분 빅토르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난 드디어 결정을 내릴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알렉산드라를 찾으면 되는 걸까요?”
“……예. 여건이 되는 대로 그녀에게 전화를 해 달라더군요.”
“여건이라…… 아하하.”
어지간히 사정을 많이 봐주는 말처럼 들린다. 그만큼 우리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주는 것이겠지.
아마 이대로 전화를 한다면 연주회 진행 쪽으로는 이야기를 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가는 수밖에 없었다.
“…….”
난 눈앞에 놓인 카나페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주스도 더 마시고.
배고프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지만, 어쩌면 내가 제대로 기능한다는 걸 증명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니 똑바로 준비를 해 둬야 했다.
아나스타샤에게도 권했다.
“드세요. 아나스타샤. 그리고 이만 슬슬 일어나죠.”
“……응? 지금?”
“예.”
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알렉산드라에게 가서 이야기할 생각이에요.”
아직 연주회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 있는 아나스타샤는 내 말에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난 무대에 오르려 하고 있지만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할지 모른다.
그녀도 빠져 버린다면 콰르텟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그럼 정말 나 혼자 남게 될지도 모른다.
함께 해 줬으면 하지만,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난 아나스타샤의 선택은 오롯이 그녀가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아나스타샤가 어떻게 하실지…… 지금은 묻지 않을게요. 대신 같이 와 주세요. 그리고 거기서 결정해 주셨으면 해요.”
아무것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이번 무대는 아마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사실 정말로 똑똑한 처신은 당분간 쉬는 쪽일지도 모른다.
무대를 고집하는 것이 곧 영리함과 같진 않겠지.
그러니 아나스타샤가 자신없어하며 빠진다 하더라도 난 그녀의 선택을 완전히 존중해 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의심할 것 없이 믿어 달라는 눈으로 바라보니 이윽고 아나스타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그러면서 그녀는 케이크를 덥석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