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28화 (828/1,277)

##  828화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는 더 이상 시간을 미룰 수 없음을 느꼈다.

에르네스트의 사고 직후 그녀는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의 일은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음악가로도, 조금 크게 보면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인 일이었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건 연주회 기획에 대한 트러블이었다.

수많은 관계자들이 그녀를 찾았다.

연주회는 취소인 것인지, 만약 진행한다면 어떠한 변경이 있는지 등등.

당연히 빨리 결정이 나야 할 부분들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그 어떤 것에도 대답하지 않고 연주자들과 의논 중이라고만 했을 뿐이었다.

사실 의논다운 의논은 한 번도 하지 못했음에도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알렉산드라는 약간 자괴감에 빠졌다.

‘내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되는데.’

원래대로라면 훨씬 빠르게 연주자들을 불러모아서 이야기를 들어 봐야 했다.

그리고 당연히 콘서트 디렉터가 추진해야 할 방향은 연주회 진행 쪽이다.

하지만 지난 며칠간, 그녀는 몇 번이나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콘서트 디렉터로서 이런 마음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십수년 동안 연주회와 연주자들을 접하면서 그녀는 많은 트러블들을 해결해 온 경력이 있었다.

연주자가 사고를 당한 일도 처음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생겨서 연주자 한 명이 빠졌다 하더라도 대신할 사람을 구해서 넣고 남은 연주자들을 케어하며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서 연주회를 성사시키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알렉산드라는 그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진행해서 무엇이 남는 걸까.’

리허설 때 세 사람이 보여 주었던 광경을 그녀는 또렷이 기억한다.

음악가로서의 역량뿐만이 아니다.

친구이자 라이벌로서 세 사람이 서로를 지지하며 의지하는 모습은 그녀로 하여금 감동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유대가 깊었던 만큼 상처도 깊다.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가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잠적한 상태라는 걸 들은 알렉산드라는 두 사람에게 쉽사리 전화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연주회를 3일 앞둔 지금에 와서야 마지막으로 확인한다는 명분으로 타티아나에게 연락할 수 있었을 뿐이다.

“…….”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연락을 취하도록 한 뒤, 알렉산드라는 사무실에서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끓여 놓은 커피가 다 식도록 그녀는 미동도 안 하고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취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장 진행에 앞장서야 할 콘서트 디렉터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렉산드라는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두 사람이 그간 얼마나 협조적으로 잘해 주었는지 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똑똑하고 센스가 뛰어난 두 사람은 그동안 기획에 있어서 일반적인 연주자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그걸 계속해서 기대하는 건 음악가를 떠나 인간으로서 지독한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지금은 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라는 세 사람이 지금은 진정하고 서로를 돌보는 데에 집중했으면 하는 바람을 솔직하게 느끼고 있었다.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견뎌 내고 나서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어른들의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음악계 전체에 진저리나지 않도록 잘 지켜 주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언젠가 복귀할 수 있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알렉산드라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한 직원이 보고했다.

“알렉산드라 일리예브나. 피아니스트 타티아나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

그간 그녀의 개인 전화번호로 통화도 몇 번 했었는데, 굳이 이쪽으로 연락하지 않은 것을 보니 분명 긍정적인 상황이나 이야기가 있을 것 같진 않단 생각이 든다.

알렉산드라는 별 기대 없이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절할 듯 놀랐다.

“지금 이쪽으로 곧장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준비하실 것이 있다면…….”

“뭐라고요? 지금 온다고요?”

“예? 아…… 예. 지금 바로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전화로 이야기할 생각을 하고 있던 알렉산드라는 그제야 허둥지둥 사무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신경 쓰지 않은 사무실은 엉망이었다.

얼마 전 깨먹은 컵도 새로 채워 놓지 않아서 새 컵을 빌려와야만 했다.

최소한의 준비를 마친 알렉산드라가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타티아나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얼른 올려보내 달라고 이야기하니 이윽고 사무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알렉산드라.”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타티아나는 평소 늘 입고 있는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자주 보기 어려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라는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등의 칭찬을 전혀 할 수 없었다.

늘 정중하고 예의 바르면서도 의욕이 넘치던 모습과 달리, 슬쩍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는 타티아나의 눈빛엔 서늘한 무언가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차가운 분위기는 그녀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따라오는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로 그리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알렉산드라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다.

숱한 베테랑 음악가들을 상대하면서도 이 정도로 긴장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하며 일부러 태연한 척 이야기했다.

“두 분이 같이 오실 줄은 몰랐네요.”

“마침 밖에서 만나고 있었어요.”

타티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고, 알렉산드라는 두 사람을 앞쪽 테이블로 안내했다.

차를 끓이는 동안에도 세 사람 사이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어른이자 콘서트 디렉터로서 무언가 화두를 던져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쉽게 이야기를 꺼내기가 어려웠다.

찻잔을 각자 앞에 내려놓으며 간신히 한 마디 하려던 찰나였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알렉산드라.”

“……예?”

타티아나가 먼저 갑자기 사과부터 건네오자 알렉산드라는 적잖이 당황했다.

허리를 굽힌 채 바라보자 타티아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빛은 그 속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었다.

“그간 연락 없었던 것에 대해 사죄드려요. 책임감 없이 알렉산드라의 배려에 응석을 부리고 있었죠. 너무 늦게 찾아뵌 것 같네요.”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요. 타티아나.”

알렉산드라는 급히 자기 자리에 앉으며 손을 내저었다.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에르네스트의 병문안도 와 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해요.”

“그건 당연한 일이죠…….”

여전히 놀란 채로 알렉산드라가 대답했다.

모든 예상이 빗나갔다.

알렉산드라는 타티아나가 꽤나 큰 충격을 받은 상태로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이끌려 와선 평소 같은 모습을 보이진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단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알렉산드라의 첫 목표였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약간 더 여위고 말소리가 조용해졌을 뿐, 예의 바른 태도엔 전혀 변함이 없었다.

“…….”

생각보다 차분한 모습의 타티아나를 보며 알렉산드라는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어른인 자신이 계속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치료를 잘 받고 완벽하게 낫길 기도하고 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타티아나가 정중히 감사를 보냈다.

알렉산드라는 그 모습조차 대단하다고 생각하다가도, 그녀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알 것 같아서 울적해졌다.

일 이야기를 꺼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냥 냉정하게 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알렉산드라는 괜한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러한 어색함도 먼저 눈치챈 건 타티아나 쪽이었다.

“오늘 연락해 주신 건 역시 연주회에 관련한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인가요?”

“아, 그렇긴 한데…….”

알렉산드라가 급히 그 말을 받았다.

그녀의 생각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타티아나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전화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면 조금 나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알렉산드라는 말했다.

“너무 부담 느끼진 마세요. 원래는 이렇게 부를 생각도 없었어요.”

“중요한 이야기는 직접 와서 해야죠.”

“그건 그렇지만…….”

계속 알렉산드라만 뭔가 우왕좌왕하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 스스로도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문화부 장관이 찾아와도 능숙하게 대처하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두 사람이 찾아왔다고 해서 이렇게 당황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눈앞에 있는 타티아나에게선 어쩐지 아무 말이나 막 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단지 베르체노프가의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만났더라도 알렉산드라는 분명히 위압감을 느꼈을 것 같았다.

찻잔을 들고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알렉산드라는 생각을 정돈했다.

그녀는 타티아나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나마 안다.

그리고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어떤 마음일지도. 그렇다면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비로소 콘서트 디렉터답게 자세를 바로 하며 그녀는 타티아나가 말했던 중요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무튼, 이제 시간이 3일밖에 안 남았으니 마지막으로 의사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어요. 연주회를 취소하더라도 당일에 취소하면 너무 혼란이 크게 되니까요. 적어도 오늘 중으로 안내할 예정입니다.”

“아직 취소가 결정 난 건 아니죠?”

“결정은 아니지만…….”

취소 쪽으로 거의 마음을 정하긴 했지만 그것을 다른 곳에 보고하거나 공표하진 않았다.

일단 모든 진행과 일정을 잠시 중단시켜 놨을 뿐이다.

연주자 당사자들과 연락이 안 되긴 하지만 각자 자택에 있다는 걸 안다.

그런데도 아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무턱대고 취소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3일이 남은 오늘을 기점으로 알렉산드라는 두 사람에게 의사를 묻고 연주회의 행방을 결정할 생각이었다.

원래 계획은 전화 통화로 확답을 받는 것이었다. 그쪽이 두 사람으로서도 편할 테니까.

그런데 생각하다 보니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타티아나?”

“예.”

“혹시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온 건가요?”

물어보면서도 알렉산드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연주회 취소를 바라는 것이라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책임감을 가지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려 한다? 그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렵고 싫은 일은 피하려 한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연주자들도 피치 못 할 일로 연주회를 취소할 땐 직접 오는 것이 아니라 매니저나 에이전트를 보낸다.

알렉산드라는 몇 번이나 그런 일들을 마주해 왔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물론 타티아나가 훨씬 더 강한 책임감을 지니고 이 자리에 왔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책임감이 연주회 취소로 향하지 않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알렉산드라가 반쯤 확신한다는 걸 알아차린 타티아나는 조용히 자신의 목적을 이야기했다.

“연주회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왔어요.”

“……진심인가요?”

묘하게 차분한 태도다 싶었는데, 그렇게 차분하다고 해서 모든 게 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건 아니다.

알렉산드라는 지금 타티아나가 모든 것을 이겨 내고 왔다고 믿지 않았다.

그 정도는 당장 얼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타티아나는 지금 정말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그 마음이 언제 부러질지 모른다.

소름이 돋는 기분을 느끼며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타티아나…… 잠깐만요. 정말 괜찮겠어요?”

“괜찮아야만 하겠죠.”

“……그렇게 말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알렉산드라는 처음으로 강하게 말했다. 지금은 경력자이자 어른으로서 단호하게 이야기해야 할 때였다.

“무조건 해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절대로.”

타티아나는 의아한 듯 바라본다. 알렉산드라가 이렇게 반대하듯 나서는 게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는 콘서트 디렉터이기에 앞서 음악가였다.

앞으로도 길게 오랫동안 후배들을 보고 싶은 심정으로 그녀는 진지하게 타이르듯 이야기했다.

“번지점프 같은 것과는 달라요. 용기 있게 올라가서 눈을 감고 그냥 뛰어내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알잖아요?”

심지어 무대 위에는 안전줄도 없고 떨어질 높이가 정해져 있지도 않다.

그 말까진 하지 않았다. 대신 알렉산드라는 분명하게 말했다.

“무대에 올라가 버리고 나면 그때부턴 도와줄 수가 없어요.”

지극히 현실적인 경고다.

음악가의 무대는 단순히 견디는 자리가 아니다. 음악을 다루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자리다.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인 마음으로 그런 자리에 올라갔다가 제대로 된 솜씨를 보이지 못한다고 해서, 아무도 그 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

그럴 거면 무엇 하러 무대에 섰냐는 격렬한 비난만이 이어질 뿐이다.

사람들의 평가는 무척이나 냉정하다.

그 점을 잘 아는 알렉산드라는 지금 아직 무대에 올라가지 않았을 때,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돕고 싶었다.

올려보내지 않는 것 또한 한 가지 방법으로써 포함되어 있었다.

“잘 들어요. 타티아나. 지금 어떤 심정으로 여기에 와 있는진 알겠어요. 책임감과 프로정신.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겁을 주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진지한 목소리로 알렉산드라는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하지만 전 그렇게 무대에 올랐다가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하는 연주자들을 너무나 많이 봐 왔어요.”

“…….”

“타티아나…… 전 타티아나가 걱정되어요. 그러니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해 주세요. 정말로 무대에 오를 수 있겠어요?”

줄 없이 낭떠러지로 번지점프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언제든 한 번에 연주자의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건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할 뿐이었다.

“항상 그런 세계에 살고 있었죠 우리들은.”

이미 연주자로서 프로라 할 수 있는 타티아나는 그 모든 것들을 안다.

자신이 반드시 박수만 받으리라 교만하게 믿고 있지도 않고, 언제든 어둠 속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을 알기에, 타티아나는 두려움을 외면하며 눈을 감고 이를 악물며 무대에 오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공포를 직시하며 입을 열고 노래를 하기 위해 발을 내딛는다.

“그러니 괜찮아요. 전 안심시켜 드리려는 것뿐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에르네스트를?”

“사람들을.”

타티아나의 시야는 이미 이 사무실을 초월한 다른 어딘가에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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