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5화
이즈베스티야의 취재기자 라시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오늘의 취재가 난관이 되리란 것을 직감했다.
‘취소표도 많다고 들었는데……?’
미리 접수한 정보와 달리 그야말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현장 티켓을 구하기 위한 사람들도 굉장히 많아 보였다.
그 전에도 그는 몇 번이나 이 문화부 주최의 가을 연주회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주로 대편성 오케스트라들을 필두로 한 프로그램들을 무대에 올려서 꽤 인기가 있는 정기 연주회였으나, 사람이 이렇게 몰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 인기몰이에 대해 라시드는 몇 가지로 분석하여 추론했다.
우선 문화부에서 파격적인 편성 변화를 준 것이 유효했다.
최근 들어 오케스트라를 앞세운 연주회는 점점 인기가 떨어지는 추세였다.
원래 200년 전부터 대중들은 뛰어난 비르투오조에게 열광하기 마련이었다.
그 현상을 정확하게 짚어낸 문화부에서는 기존의 구조에서 탈피하여 소편성의 퀸텟과 피아노 듀엣으로 연주회를 조성했다.
상당한 모험이었지만 이목을 끄는 건 성공이었다.
특히 피아노 듀엣을 이룬 두 젊은 피아니스트는 최근 클래식 음악계에서 제일 주목받는다고 해도 무방한 인물들이라 더더욱 큰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티켓을 판매하기 시작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온라인에선 전부 매진된 것만 보아도 문화부의 도전이 성공적이었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비단 그것뿐이었다면 이 연주회가 작금 클래식에 관심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화두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불안하군, 불안해.’
라시드는 차에 기대어 서서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웅성거림 사이에서 기대감과 불안감 등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이 연주회엔 지금 큰 문제가 하나 터져 있었다.
바로 주축이라고 할 수 있었던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의 부상 소식이었다.
제일 실력도 뛰어나다고 인정받고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인지도도 높은 그가 갑자기 큰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들이 전해지자 클래식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온갖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은 피아니스트 은퇴와 연주회 취소 등 부정적인 내용들뿐이었다.
사람들은 뛰어난 비르투오조에 열광하지만 동시에 몰락에도 똑같이 관심을 가지니까.
그 때문에 취소 후 환불을 기다리지 않고 미리 티켓을 취소한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그 누구도 기대를 별로 가지지 않았다. 연주회는 자연스레 취소 수순을 밟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책임자로부터 공식적인 입장이 나왔다.
일정 변경 없이 프로그램만 수정하고 그대로 연주회를 진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차라리 취소하겠다는 발표였다면 사람들도 그냥 납득했을지도 모른다.
연주자들 역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이해해 줄 만했다. 애초에 기대도 없었고 희망도 가질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연주회 진행은 혼란에 기름을 더 붓는 일에 가깝게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지금도 홀 앞은 혼란의 도가니나 다름없어 보였다.
“…….”
모든 관심이 에르네스트에게 쏠리면서 당연히 취소로 생각되었던 연주회가 강행 입장을 밝히자, 온갖 곳에서 루머가 떠들썩하게 쏟아져 나왔다.
문화부 음악예술국에선 여러 곤란한 상황 등을 고려하여 취소를 종용했는데 콘서트 디렉터가 무리해서 강행했다는 이야기나, 혼자가 된 듀엣 연주자가 정신적인 충격으로 자택에 칩거했다가 강제로 끌려나왔다는 이야기까지.
정말 별의별 충격적인 소문들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연주자를 강제로 데려와 무대에 세우려 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한 헛소문이었다.
그 연주자가 다름 아닌 베르체노프의 영애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였기 때문이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가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그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타티아나가 칩거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다시 무대에 서기로 한 것 같았다.
그 이유에 대해선 알 도리가 없었던 라시드는 차라리 거꾸로 타티아나가 무대에 오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로 했지만, 그것도 전혀 알아낼 수 없었다.
전혀 얻어낼 것이 없다.
연주자가 무대에 올라 얻을 것이 없다는 건 우스운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타티아나가 처한 상황은 그랬다.
대중들은 에르네스트가 병실에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타티아나가 무대에 오르는 것에 대해 다양한 입장들을 보이고 있었다.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인간미 없는 인형 같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연주회가 그저 음악만을 감상하는 자리가 아니게 된다.
긴 기자 생활로 라시드는 앞으로 이어질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연주회 관계자들은 어떻게든 책임감으로 강행하기로 결정한 것 같지만, 사실 지금 이 연주회는 성공해도 문제고 실패하면 그야말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흠.”
그 증거는 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본래 연주회 직전의 홀은 어지럽기 마련이지만 일반적으로 청중들 사이에서 맴도는 분위기가 기대와 흥분이라면, 지금은 혼란과 삐딱함 등이 혼재되어 떠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연주자들이 다 함께 몰락하는 것을 직접 지켜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라시드는 알고 있다.
“…….”
라시드는 카메라를 들어 홀 앞을 찍었다.
오늘 저녁, 어떤 기사를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사진 아래에 쓸 문장은 벌써부터 떠오른다.
불안의 거인이 사람들을 옥죄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에 휩쓸리기도 하고,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상 이미 모두가 거인의 발 아래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2시간 후 찾아올 것이 절망과 분노의 거인이 아니길 바란다.
기자의 입장에서 사진을 찍고 묘사를 할 땐 거기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면 안 된다.
하지만 라시드는 지금 무기력한 기분을 느끼며 셔터를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연주자들을 찍을 수 있을까.’
홀의 사진을 찍던 라시드는 지금 이 모두의 태운 배의 조타를 쥐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미리 사진을 찍고 싶었다.
돔 무지키의 구조를 잘 아는지라 라시드는 연주자 대기실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갈수록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사람이 거의 없는 곳까지 다다랐을 때, 라시드는 관계자 외엔 들어올 수 없도록 쳐 놓은 펜스를 발견했다.
괜히 몰래 들어갔다가 경비원에게 걸려 쫓겨나기라도 한다면 손해가 훨씬 더 크다.
혹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라시드는 그 근처에서 서성였다.
그리고 잠시 후, 거물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검보랏빛 드레스 차림의 타티아나가 복도 코너에서 돌아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라시드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여 타티아나가 라시드 쪽을 바라보았다.
펜스가 쳐져 있으니 그냥 눈인사 정도만 하고 갈 만도 한데, 타티아나는 굳이 발걸음을 옮겨 왔다.
잠시 후, 타티아나가 그 앞에 섰다.
“부르셨나요?”
불러 놓고 보니 지금 타티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였다.
아마 열성적인 팬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라시드는 여기서 그녀를 속일 수도 있었지만, 순진하게 올려다보는 눈을 보니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조끼 사이에 가려져 있던 기자증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즈베스티야의 라시드입니다. 잠시 이야기 가능할까요?”
“……연주 전에 인터뷰 요청하시는 분은 처음인데.”
“아뇨. 그게…….”
기자란 말을 듣자마자 타티아나의 태도가 조금 차가워졌다.
라시드는 그녀를 속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라시드는 허둥거렸지만 베테랑 기자답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는 기자증을 도로 집어넣었다.
카메라도 조금 더 단단히 등 뒤로 돌려 멨다. 지금 타티아나에게 경계를 사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인터뷰가 아니라 이야기만으로도 괜찮습니다.”
“기자분이시라면서요?”
“기자와는 이야기하지 않으십니까?”
혹시나 싶어 농담조로 건네본 말이었는데, 뜻밖에도 타티아나는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경계부터 한 건 자신의 실수라는 걸 인정하는 듯 보였다.
타티아나는 고개를 젓더니 약간 누그러진 태도로 그를 마주했다.
“그렇진 않아요. 좋아요.”
그리고 그녀는 한 걸음 더 다가오며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나요? 라시드.”
그 정중한 물음에 라시드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 말이나 입에 담았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되리란 사실은 분명했다.
사실 묻고 싶은 건 정말 많았다.
하지만 대중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 중 하나인, 에르네스트의 일에 대한 심경 등을 물어볼 순 없었다.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던 라시드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이번 연주회가 성공할 것이라 보십니까?”
“……?”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시비거는 건지 궁금해하는 표정이다.
초짜 기자들도 잘 하지 않을 법한 멍청한 질문이었다.
라시드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물어보기로 했다.
이건 기자가 아니라 홀에 있는 그 어떤 사람들을 데려오더라도 똑같이 의문을 가질 만한 일이었다.
“그게…… 솔리스트로서 준비할 기간이 3일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타티아나는 프로그램도 공개하지 않았고요.”
“아, 그렇죠.”
“엄청난 관심을 받고 계시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그 관심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해선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타티아나가 그 부분을 인식하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부분이었으니.
타티아나는 대답 없이 라시드를 바라보더니, 비스듬하게 서면서 물었다.
“저도 한 가지 여쭐게요.”
“예?”
“괜찮잖아요? 인터뷰가 아니라 대화인 거니까.”
말문이 막힌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티아나가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의 분위기는 어떻나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라시드는 타티아나가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피아노 건반만 만지다가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었다. 라시드는 자신이 본 것 그대로 말했다.
“불안합니다. 사실.”
“역시 그런가요.”
“……역시?”
라시드가 되묻자 타티아나는 다시 반대편으로 비스듬하게 서면서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전 그 불안들과 마주하고자 여기에 왔어요. 만약 제가 피해 버렸다면 불안들은 빙글빙글 퍼져 전 세계를 맴돌게 될 테니.”
그녀는 한 손을 들어 허공에 천천히 원을 그리며 크게 저어 나갔다.
마치 그렇게 무언가가 퍼질 것이란 예언같이 보인다.
하지만, 잠시 후 타티아나는 넓게 퍼졌던 원을 다시 돌려 작게 만들어 나갔다.
서서히 작아지던 허공의 원은 타티아나가 손가락만 까딱해도 될 정도로 작아지더니 결국 움직임을 멈추고 손가락 끝으로 수렴되었다.
그 손가락을 들고 타티아나가 말했다.
“저희가 막아 보려 해요.”
라시드는 홀에서 불안의 거인을 마주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저 손가락으로 그 거인을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게 가능하려면 마법이라도 부려야 할 테지.
그런데 우스운 건, 지금 라시드의 눈엔 타티아나가 정말 마법사처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머지는 연주회 후에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해 주세요.”
짧게 자기 이야기를 마친 타티아나는 빙그레 웃더니 휙 돌아섰다. 미련 없는 몸놀림이었다.
잠시라도 더 붙잡아야 한다.
불현듯 라시드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말을 걸어도 받아 주는 친절함을 지니고 있으니 조금만 더 대화를 부탁해도 그녀는 못 이기는 척 들어줄 것 같았다.
타티아나의 말엔 사람을 끌어당기는 진지함과 무게감이 있었다.
지금 그녀의 말을 조금이라도 더 들어 둬야 한다는 직감을 느끼며 라시드는 다시 입을 열었다.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잠시만…….”
“아, 그리고 이즈베스티야에서 오셨다 하셨나요?”
그런데 막 돌아섰던 타티아나는 다시 고개만 돌려 라시드 쪽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신비한 마법사였던 타티아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섬뜩할 정도의 예기를 지니고 있었다. 라시드는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로 타티아나가 말했다.
“취재도 하지 못한 사고에 대해 추측성 기사들을 싣는 건 그만둬 주세요. 러시아에서 가장 큰 신문사가 신뢰를 잃으면…… 안 되잖아요?”
“…….”
얼마 전 실었던 에르네스트의 기사에 대한 이야기임을 라시드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경고라는 것도.
그가 쓴 기사는 아니지만 같은 소속이라는 것만으로도 타티아나가 좋게 볼 이유가 없다.
라시드는 지금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티아나는 정말로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
타티아나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라시드는 정신을 차렸다.
일단 에르네스트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들을 남발하는 기자들에겐 적당히 하라고 한 마디쯤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다고 들어먹을진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았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엔 오늘 쓸 기사의 첫 문장들이 다시 새롭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검보랏빛 마법사의 예언을 듣고 난 뒤, 그의 눈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하게만 보이던 세상이 조금 더 밝게 보였다.
안내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둘 홀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가을 연주회의 시작을 알렸다.
모두가 느끼는 가을의 이미지는 같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홀 안에서만큼은 일치하게 될 것이다.
“…….”
잠시 후 다섯 명의 연주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라시드는 이것이 예언의 첫 개시임을 확신했다.